소설리스트

도살자-55화 (55/149)

# 55

55. 과거의 인연(1).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 선 헌터들은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님에도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쏴아아아아!

“제길, 우산이라도 가져올걸.”

“게이트에 누가 우산을 가져와?”

게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쏟아진 폭우에 블리자드 길드원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낮이었지만, 워낙 빗줄기가 굵어 시야가 매우 좁았다.

[물에 잠긴 신전(C등급) - 비의 신 테프누트의 진노로 사흘 동안 폭우가 내린다.]

[게이트 클리어 조건 : 늪의 지배자 암무트(B)를 죽이시오.]

[보상 - ?]

“하필 암무트라니, 이 빗속에서 골치 아프겠는데.”

암무트, 거대한 악어의 형상. 몸길이만 15미터에 이르고 한입에 황소도 삼킬 수 있는 무지막지한 놈이었다. B등급 괴수였지만, 늪에서는 A급 괴수보다 무서운 놈이었다.

“그보다 이거 비부터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 너무 많이 오는데.”

양태섭과 노하연은 고종수를 쳐다보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비였다.

하지만 그는 주변을 살필 뿐 두 사람의 대화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

후두두두둑!

반투명의 커다란 얼음이 머리 위에 씌워졌다.

“오! 좋은데.”

“땡큐!”

얼음의 마법사 김우리가 일행의 머리 위에 커다란 얼음 지붕을 만들었다.

“마...마나 때문에 오, 오래 유지할 순 없어요.”

주변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고종수가 입을 열었다.

“저 앞쪽에 숲이 있다. 그리 간다.”

“네.”

일행은 빗속을 뚫고, 한참을 달려 숲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비가 워낙 거세 울창한 나무 아래도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밖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했기에 조금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휴,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그 두 사람은 어디 있을까요?”

노하연의 물음에 고종수가 말했다.

“우리처럼 비를 피하고 있겠지.”

“하긴 이런 비에 무슨 괴수 사냥을 하겠어. 괴수들도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걸.”

“그럼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까?”

노하연이 다시 물었다.

“아니, 우린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 기습한다.”

“하지만 빗속에서 최한별의 사정거리는 2배나 늘어나요.”

얼음 마법사 김우리가 말했다.

그러자 고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우린 숫자도 많고, 더 사정거리가 긴 궁수도 있으니 기습이 유리해. 그리고 무엇보다 놈들은 우리가 그들을 따라 게이트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니 기습만큼 좋은 작전은 없지.”

“그 눈빛이 더러운 새끼는 제가 맡겠습니다.”

양태섭이 이빨을 갈았다.

B급 게이트에서 겨우 C급 헌터인 나태준에게 꼬리를 내린 것을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놈을 죽이기 전에 레전더리 아이템을 확보하는 게 중요해. 그러니 바로 죽이지 마.”

“알겠습니다.”

“최한별은 상관없죠?”

노하연이 물었다.

“그래, 최한별은 죽여도 상관없다. 일단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 조금 쉬었다가 2개 조로 나눠 놈들을 찾는다. 그리고 놈들을 찾아도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마, 기습은 우리 넷이 모두 모였을 때 한다.”

“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이런 빗속에서 적을 찾아야 하는 헌터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뜨끈한 커피나 한잔 인벤토리에 넣어올걸.”

계속된 비에 체온이 많이 떨어졌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이 간절했다.

“할 수 있겠어?”

고종수는 조용히 김우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 물론이에요. 최한별은 제게 맡겨주세요.”

솔직히 고종수는 김우리가 이 일에 참여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최한별은 김우리의 스승이자,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같은 얼음 마법사라 최한별이 그녀를 특별히 더 챙긴 것도 있었고, 자신의 기술도 모두 전수해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두 사람은 자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한별이 블리자드 길드를 나갔다는 말을 듣자, 분노했기에 이번 일에 합류시켰다.

“자신 없다면 다른 사람하고 바꾸는 게 좋아.”

“아...아닙니다. 이번에 최한별을 넘어서지 못하면, 전 영원히 이인자로 남을 겁니다.”

김우리는 최한별 다음으로 블리자드 길드에서 강했다.

최한별의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재능도 있었고, 최한별 다음으로 B등급 헌터가 된 것도 그녀가 가장 먼저였다.

김우리는 나무에서 벗어나 비를 맞으며 각오를 다졌다.

그 모습을 보고 양태섭이 고종수에게 물었다.

“저 또라이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그래도 조금 걱정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최한별의 편을 들지나 않을지...”

“며칠 완벽히 세뇌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가 없다면 최한별을 이기기 힘들어.”

“혹시나 배신의 조짐이 보이면 제가...”

고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하연이 말했다.

“그보다 그 서윤아가 걱정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솔직히 그녀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레전더리 아이템을 가져오라니요.”

고종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일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윤아, 그녀가 B급 게이트에서 나온 레전더리 아이템을 찾아오라고 했을 때, 고종수는 약혼자인 자신을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는 그녀에게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서윤아의 힘으로 B급 게이트도 들어갈 수 있었고,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헌터들이 공략하고 있는 게이트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의 힘은 자신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올리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꿈은 대한민국 10대 길드의 길드장이 되는 것이다. 그럼 부와 명예는 자연히 따라올 테니까.

“이러다 서윤아가 다른 것들도 요구할까 겁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다음부턴 내가 잘 막아볼 테니까.”

길드장의 말에도 양태섭과 노하연은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막을 수 있었다면, 이번 일부터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이 일로 서윤아에게 잘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길드 운영위원들이었으니, 고종수가 아니라도 서윤아와 교섭할 수 있었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지면 나가려 했지만, 2시간이 지나도록 큰 변화가 없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고종수가 명령을 내렸다.

“자, 그만들 쉬고 이제부터 둘로 나눠 놈들을 찾는다.”

“네.”

양태섭과 노하연이 한 조가 되었고, 고종수와 김우리가 한 조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놈들을 발견하면 바로 이 자리로 돌아와.”

“네.”

일행은 둘로 헤어져 나태준과 최한별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놈들을 찾을 수나 있겠어?”

“우리처럼 어디 나무 아래에 있을 테니, 숲이나 동굴 같은 데를 뒤져야지.”

노하연의 말에 양태섭도 그럴 것 같다며 동의했다.

두 사람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쪽이 비를 훨씬 덜 맞는 길이었다.

“응?”

“왜?”

“숨어! 저길 좀 봐.”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다행히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태준이다.”

“그런데 왜 혼자지?”

“가만 기다려봐.”

나태준은 커다란 나무에 바짝 붙어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20분여가 흘렀음에도 최한별은 보이지 않았다.

“최한별하고 헤어진 거 아냐?”

“그런가?”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함께 있다가 비 때문에 길이 엇갈릴 수도 있었고, 괴수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었다.

나태준과 자신들의 거리는 겨우 40미터, 나무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들켰을 것이다.

“어서 돌아가서 알리자.”

“그럴까.”

노하연이 양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잠깐, 저것 봐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해.”

나태준이 칼을 들고 더 깊은 숲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따라가 봐야지.”

두 사람은 나태준을 따라갔다.

나태준이 안쪽으로 한참을 가더니, 곧 큰 나무에 바짝 붙어 쉬고 있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왔어.”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도 걱정이네.”

“그거야 숲 가장자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올 테니 괜찮을 거야. 그런데 아직도 혼자네.”

양태섭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끼리 해치울까?”

“뭐? 하지만 길드장이 동시에 공격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건 나태준하고 최한별 둘이 있을 때 이야기지. 지금 저놈은 혼자라고.”

노하연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양태섭은 자신의 일본도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저놈을 잡은 걸 알면 서윤아도 우리 능력을 더쳐줄 거라고.”

“괜찮을까? 저놈의 기술도 잘 모르잖아.”

“아무려면 어때 2대1이잖아. 내가 놈과 싸울 테니까. 네가 빈틈을 노려.”

노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자.”

서슬 퍼런 화살이 겨눠졌다.

그런데 태준이 아니고 먼저 나무 사이에 하늘을 겨눴다.

피픽픽픽!

노하연이 하늘을 향해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나태준을 향해 화살을 겨눴다.

피슉! 피슉!

두 개의 화살이 연이어 날아갔다.

“헛!”

태준의 입에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몸을 날려 전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파파파팟!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네 개의 화살이 쏟아졌다.

노하연의 장기인 폭사 스킬이다.

화염까지 더해진 화살이 떨어지자, 태준은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피했다. 다행히 화살은 맞지 않았지만,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개새끼 죽여주마!”

그때 양태섭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달빛 가속!”

일본도가 흐려지더니 어느새 가슴을 향해 찔러진다.

푸른 빛의 칼은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었다. 칼 주변으로 푸른색 기류가 쏟아지는 것이 보통 칼이 아니었다.

쩌엉!

백정의 칼로 쳐올렸다.

그 순간.

패애앵!

날카로운 파공성이 머리를 향해 다가왔다.

“흣!”

콰직!

나무에 화살이 박히더니 화염이 번쩍였다.

하지만 곧 거센 빗줄기에 화살에서 뻗어 나온 화염은 사그라들었다.

“죽어!”

다시 양태섭이 푸른 검을 휘둘렀다.

태준은 맞받아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도망간다! 잡아!”

양태섭이 뒤를 따라 달렸고, 노하연이 달리면서 연이어 화살을 쏘았다.

퍽! 퍽!

등 뒤로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유니크 아이템이군.’

지그재그로 달리며, 노하연의 화살을 피했다.

최한별의 말이 맞았다.

양태섭은 성격이 급해서 내가 혼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달려들 거라 했다.

그리고 노하연의 활과 화살은 화염이 더해져 폭사 스킬을 쓰면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폭우가 내린다.

전장을 이곳으로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쪽이야!”

양태섭이 노하연을 불렀다.

두 사람이 뒤처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 달리고 있었다.

“여기다!”

숲 가운데 반쯤 무너진 신전이 있었다.

태준은 그쪽으로 사라졌다.

“어디 갔어?”

“저 신전 안으로 들어갔어.”

“우릴 유인한 거 아냐?”

“혼자 유인해봤자지. 들어가자.”

양태섭이 서둘러 들어가자, 노하연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신전 내부는 꽤 넓었다.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비바람은 막을 수 있어 이곳이라면 숲보다 오래 머물만했다.

“어디 숨었나? 그만 나오지그래?”

양태섭이 앞서고 바로 뒤에 노하연이 화살을 겨누며 뒤를 따랐다.

그러다.

“설마?”

양태섭의 눈이 흔들렸다.

“왜 그래?”

노하연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최한별?”

신전 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너희를 오래 기다렸어!”

“제길, 함정이야.”

두 사람이 몸을 돌리자, 자신들이 들어왔던 입구엔 나태준이 서 있었다.

“네놈! 함정을 팠구나.”

“함정이라니, 난 최한별에게 너희를 데려다줬을 뿐이야.”

“뭐?”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들 싸우지.”

나태준은 한쪽에 무너진 기둥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양태섭이 최한별을 바라보았다.

“혼자 우리 둘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물론, 일대일로 너희와 싸우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이게.”

노하연이 최한별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양태섭이 앞으로 달렸다.

나태준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최한별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