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 과거의 인연(2).
화살이 연이어 최한별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최한별이 손을 뻗자, 2미터의 작은 얼음벽이 솟아올라 화살을 막아버렸다.
그 사이 양태섭이 최한별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이야!”
양태섭의 기합과 함께 일본도가 그어지고, 얼음벽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연타.
최한별은 막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양태섭은 그녀의 심장을 향해 긴 칼을 겨눴다.
“달빛 가속!”
양태섭의 평소 속도에서 순식간에 2배의 속도를 내며 칼이 찔러진다. 그런데 그 순간 최한별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며 손을 뻗었다.
“아이스 블라스트.”
얼음 창!
날카로운 반투명 얼음 창이 축축한 바닥에서 위로 솟구쳤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다.
파파파파팟!
“크윽!”
양태섭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온몸 여기저기 한기에 당한 흔적이 가득했다.
노하연이 화염 화살을 최한별에게 쏘자, 솟아오르던 얼음 창이 멈췄다.
“괜찮아?”
“제길, 저년이 우리 기술을 다 알고 있어.”
몇 년 동안 게이트에서 함께 괴수를 잡던 사이였다. 그들도 그녀의 기술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그들의 기술과 공격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지?”
갈등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태준은 그녀가 게이트에 들어오기 직전에 혼자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했을 때 허락했다.
그녀가 말하는 과거는 바보처럼 이용만 당했던 지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까지 해치려는 자들에 대한 응징이었다.
양태섭이 좌측으로 노하연이 우측으로 갈라졌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작전이란 게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쩡! 콰지지직!
일본도와 얼음 창이 만나자, 얼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칼날 같은 얼음 파편이 양태섭에게 쏘아지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달려들던 노하연의 화살은 최한별의 등을 향해 조준했다.
“잡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짧은 거리에선 불꽃 화살이 빗나갈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발밑에 무언가가 물결쳤다.
노하연은 균형을 잃어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발사했다.
이는 최한별의 스킬 얼음 파도(frozen wave)였다.
지금처럼 바닥이 물기에 젖어 있거나 강이나 호수 표면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다.
‘윽!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옆으로 넘어진 노하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음 창으로 양태섭을 상대하면서 프로즌 웨이브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이스 월!”
팍! 파파팍! 팍!
두꺼운 얼음벽이 최한별의 주위로 생기더니, 노하연과 최한별을 동시에 감싸버렸다.
“큭! 당했다!”
양태섭이 검으로 두꺼운 얼음을 때렸다.
하지만 얼음벽에 금은 갔지만, 뚫리진 않았다.
그가 조금만 침착했다면 가장 약한 얼음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질이 급해 이중으로 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가장 두꺼운 얼음을 공략하고 있었다.
“저리 가!”
펑! 펑! 화르르르!
반투명 얼음벽 안에서 노하연의 목소리와 화염이 번쩍이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그리고.
“얼어붙은 손길!”
“아, 안돼! 아아아!”
노하연의 끔찍한 비명이 들리더니 순식간에 멈췄다.
그 순간 양태섭의 칼에 얼음벽이 깨졌다.
그리고 내부가 보였다.
최한별이 노하연의 손목을 잡고 있었고, 노하연은 온몸이 얼어 입김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는 얼어 죽었다.
“너무 약해! 평소에 다른 기술을 연마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최한별이 양태섭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서리 같은 눈길에 양태섭이 몸을 떨었다.
자신 혼자서 그녀를 이길 확률은 없다.
“제길, 죽어!”
어쩌면 그게 최선일 지도...
양태섭이 그녀에게 달려드는 척하더니 방향을 바꿨다.
실력 차이도 크게 나는 데다 자신의 기술까지 상대가 다 알고 있는데, 싸운다는 것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달아난다고 해도 그게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이스 월.”
순식간에 신전 주변이 얼음이 덮이고 양태섭은 갇혔다.
그는 앞이 막히자 나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뭐지? 인질을 잡으려고?’
자신을 C등급 헌터로 알고 있으니, 나를 제압해 인질로 삼으려 했다.
좋아, 상대해 주지.
칼을 들었지만, 그는 내 곁에 오지 못했다.
최한별의 7미터짜리 얼음 창이 양태섭의 허벅지에 박혔다.
“크아!”
“이렇게 주변에 물이 많은 곳에선 내 사정거리가 늘어난다고 몇 번이나 말해줬을 거야. 그런데도 방심하다니.”
양태섭을 향해 최한별이 다가갔다.
“저리 가! 이년아.”
그녀가 다가오자, 그가 미친 듯이 일본도를 휘둘렀다.
카캉!
허벅지에 박힌 얼음 창을 깨버리고, 최한별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태섭이 몸을 날려 최한별을 덮쳤다.
하지만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 창이 그의 몸을 먼저 뚫어버렸다.
“휴! 그렇게 무작정 달려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녀가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여태 그녀가 양태섭을 몇 번이나 구해줬는지, 그 기억이 떠오르자 아쉬움이 밀려왔다.
“후회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주변의 얼음을 모두 회수했다.
“후회할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둘 남았군요.”
“고종수는 내가 상대하지요.”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어깨에 상처부터 확인하지 그래요?”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까 양태섭의 일본도와 얼음 창이 부딪혔을 때, 큰 상처를 입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감쌌다.
“그럼 고종수를 맡아 주세요.”
김우리 자신의 제자이자, 블리자드 길드의 이인자.
자신이 가르쳤고, 같은 얼음 계열이었기에 방심할 순 없었다.
태준은 녹음의 링을 이용해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을 신전으로 데려왔다.
처음엔 두 사람의 죽음을 믿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활과 일본도를 보여주자, 그제야 믿었다.
신전 안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죽이진 않겠다.”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차라리 끝을 보겠다.”
김우리가 앞으로 나섰다.
“네 상대는 나다.”
최한별이 말했다.
“김우리! 왜지? 그렇게 네게 잘 해줬는데?”
“웃기지 마, 난 네년의 인형이 아니야.”
“뭐?”
“네년이 있는 한 난 영원히 이인자에 멈춰있겠지. 그러니 너를 넘어서 블리자드 길드의 일인자가 되겠다.”
“일인자? 그게 뭐가 중요하지? 지금의 내 꼴을 봐. 한때 사랑했던 사내에게 버림받고, 길드에서도 쫓겨났잖아. 너도 더 늦기 전에 네 길을 찾아.”
“내 길은 블리자드 길드다. 네가 목숨을 구해주고 키워준 이곳이 나에게는 집이자 삶이다. 그런데 나와 길드를 버리고 떠나?”
“무슨 소리야? 나를 내쫓은 것은 저기 있는 길드장과 길드위원회잖아.”
“내게 블리자드는, 블리자드는...”
김우리는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내게 블리자드는 너다!’
푹!
“커헉!”
고종수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들렸다.
“윽! 왜, 나를?”
김우리가 얼음 창을 고종수의 옆구리에 박은 것이다.
뜻밖에 상황에 최한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종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김우리가 양손에 두 개의 얼음 창을 들고 최한별에게 달려들었다.
“저년은 내게 맡겨주세요.”
최한별 역시 얼음 창을 만들어 달려들었다.
둘 사이에 엄청난 얼음 폭풍이 불었다.
사방에서 얼음 창이 삐져나오고, 얼음 장벽이 솟아났다.
점점 싸움이 격렬해지자, 신전이 흔들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고종수를 데리고 신전 밖으로 나왔다.
‘냉기가 엄청나군.’
비가 억수로 쏟아붓는 데도, 신전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주변에 물이 얼 정도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두 사람의 대결은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겨울 때쯤이었다.
콰직!
“으아아!”
고종수의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엄청나게 큰 악어 괴수인 암무트가 고종수를 목까지 삼키고 있었다.
고종수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갈고리를 꺼내 들었다.
“막간을 이용해 네놈이나 잡아야겠다.”
B급 괴수 암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해체(lv9) 스킬을 사용합니다.]
[흉포한 마그투스의 각반(유니크)를 사용합니다.]
[회복의 반지(레어)를 사용합니다.]
암무트의 등으로 올라타 백정의 칼을 놈의 등에 쑤셔 박았다.
놈의 채찍 같은 꼬리와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거대한 입을 피하기 가장 좋은 곳은 등이었다.
[도살(lv5) 스킬이 발동됩니다.]
칼이 등에 박혔다.
하지만 놈의 피부는 엄청 두꺼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칼이 박히자, 놈이 거칠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놈이 몸을 뒤집어 나무와 바위에 연달아 박았다.
나를 떨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예 땅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큰 고통이 밀려왔다. 놈의 육중한 몸에 짓눌리고, 바닥의 거친 돌들이 나를 압박했다. 그나마 땅이 젖어서 버틸 수 있었다.
마그투스 각반의 힘과 놈의 피부에 박은 백정의 칼에 매달려 한참을 씨름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언제 다시 놈을 찾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통 속에 매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놈이 지쳤는지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때였다.
“비대각(批大卻)! 도대관(導大窾)!”
백정의 칼을 놈의 피부에 쑤셔 박기 시작했다.
비대각 스킬로 놈의 두꺼운 피부를 벌리고, 도대관 스킬로 살에 구멍을 냈다. 도살과 해체 스킬의 레벨이 늘면 구멍의 숫자가 늘어나기에 전보다 구멍의 개수가 늘어났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숲을 박살 내며 달려갔고, 갈고리까지 놈의 등에 걸어 끝까지 버텼다.
그리고 뚫린 구멍을 향해 연이어 도대관 스킬과 도살 스킬을 퍼부었다.
그렇게 마나를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놈이 지나온 길엔 온통 피가 범벅이었다.
그렇게 암무트는 나를 매달고 한참을 달리더니, 갑자기 멈춰서 앞으로 대자로 뻗었다.
거친 숨을 쉬고 있는 놈의 등과 옆구리의 살을 발라내고, 마지막으로 심장에 검을 박았다.
[암무트(B)를 잡았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이 게이트는 24시간 후에 소멸합니다. 남은 시간 - 23:59:59]
[보상으로 가고일 소환룬(유니크)을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정신의 룬(노멀)을 얻었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테프누트의 신전으로 돌아왔다.
“뭐야? 아직도 싸워?”
신전이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와 여자들의 짧은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그 순간 최한별의 부상이 걱정되었다.
두 사람의 실력이 큰 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어깨 부상은 대결의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백정의 칼을 들었다.
도와줘야 하는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가 이번에 온전히 과거를 지우지 못하면, 어쩌면 앞으로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 말대로 이번에 완전히 과거를 청산해야 했다.
잠시 후.
짧은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신전에서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한쪽 다리를 쩔뚝거리는 실루엣은 또 한 명의 여자를 힘겹게 끌고 나오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최한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한탄하듯 외쳤다.
“이... 이 멍청한 년이 그냥 데리고 나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걸...”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년을 도와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최한별도 쓰러졌다.
두 사람 다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