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 과거의 인연(3).
“으으... 머리야.”
최한별이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 여기는?”
“병원입니다.”
“아!”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 꼴이 뭡니까? 자신 있다면서요?”
“기, 김우리는 어디 있죠?”
“옆방에요.”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침대를 내려왔다.
“잠깐이면 되요.”
그녀는 링거를 뽑고, 기어이 옆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병실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김우리가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다쳤나요?”
“솔직히 말해 드려요?”
“네.”
“최한별씨가 더 많이 다쳤어요. 김우리씨는 어제 깨어났습니다.”
“에?”
최한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둘이 무슨 사이죠?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그날 김우리씨나 한별씨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이트에 들어온 것도, 고종수를 공격해 쓰러트린 것도, 그리고 최한별과 싸운 것도 모두 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방으로 돌아가죠. 긴 이야기니까.”
방으로 돌아온 최한별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팀으로 당연한 거죠.”
“김우리까지 구해주셨잖아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김우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김우리가 블리자드 길드에 들어온 건 그녀가 막 고등학생으로 올라갈 때였어요. 말수도 없고, 정말 눈에 띄지 않은 길드원이었죠. 사실 초창기 우리 길드원들이 대부분 그랬죠.”
전에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능력 있고, 뛰어난 헌터들은 이미 대기업이나 대형 길드에서 데려가고, 정말 능력 없고, 돈 없고, 소외된 헌터들만 데려가 길드를 키웠다고 했다.
김우리는 게이트 발생으로 부모님을 잃고, 그 게이트 때문에 각성해 헌터가 된 케이스였다. 어찌 보면 6학년 3반 친구들과 같은 처지였다.
그녀의 처지를 알고 난 후 최한별은 그녀에게 유독 잘해줬다고 했다. 그녀와 같은 마법사 계열에 얼음 마법이 특기였기에 기술도 전수해주고, 게이트에도 함께 들어가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김우리의 마법 재능이 처음엔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한별이 지도해주자,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3년 만에 최한별을 거의 따라붙었고, 블리자드 길드 전력도 올라가고, 새로운 길드 간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최한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다.
게이트에 들어갈 때는 꼭 최한별이 있어야 했다.
그녀가 함께 들어가지 않을 때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실수투성이가 되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나중에 최한별이 김우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니 “의존성 성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존성 성격장애란, 주변 사람들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 자신의 의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매달리고, 의존 욕구가 거절될까 봐 무서워 다른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순종적으로 응하는 인격장애를 말한다.
“길드원들도 이상하게는 생각했겠지만, 정확한 내용은 나하고 김우리밖에 몰라요.”
“그럼 김우리가 게이트에 들어온 것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겁니까?”
“네, 고종수를 공격한 것을 보고는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왜 한별씨를 공격한 거죠?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저도 아직 그걸 모르겠어요.”
“그건 한별 언니를 넘어서야 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죠.”
김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럽게 반대편 빈 침대에 걸터앉았다.
“좋은 대결이었어.”
“그래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다음엔 내가 질 수도 있겠어.”
“무슨 말이야 대결엔 내가 이겼는데.”
“뭐?”
최한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 안 나나 본데. 내가 마지막에 너를 신전에서 끌고 나왔어.”
“언니야말로 기억 안 나나 본데, 마지막에 서로의 창에 찔려서 동시에 쓰러졌잖아. 그런데, 내가 더 빨리 깨어났으니까 내가 이긴 거지. 내가 상처도 훨씬 적고.”
최한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쓰러졌다가 일어나서 그녀를 끌고 나온 것을 내가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편을 들진 않았다.
갑자기 김우리가 나를 향해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난 일반 병실이고, 언니는 특실이죠?”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건방졌다.
“당연하죠. 최한별씨는 우리 팀이니까.”
“아, 그렇군.”
너무 쉽게 이해했다.
최한별이 진지한 표정으로 김우리에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보면 몰라요? 컨디션이 이렇게 좋은 적이 없어요.”
그녀가 어딘가 변한 모습이었다.
말투도 달라졌고, 옛날에 주눅 들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길드장도 없고, 길드운영위원들도 죽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언니야말로 어떻게 할 거죠?”
“난 이쪽 팀에 묶인 몸이야 당분간, 태준씨 팀에서 활동할 거야.”
당분간?
앞으로 쭉 우리와 함께할 것 같다.
김우리가 나를 노려보았다.
“팀원에게 특실도 잡아주고, 이런 팀장이라면 언니를 맡겨도 되겠네요. 전 블리자드 길드를 대한민국 10대 길드로 키울 거에요.”
“뭐? 블리자드로 돌아가겠단 말이야?”
“네. 그곳이 제집이자, 삶이에요. 길드장은 없어도 500명이나 되는 길드원들이 있잖아요.”
블리자드 길드는 이제 B급 헌터가 김우리와 다른 한 명까지 총 2명밖에 없었다. 길드원 숫자는 많았지만, 최한별까지 한 번에 B급 헌터가 넷이나 빠졌으니, 이제 중급 길드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앞으로 제가 블리자드 길드를 어떻게 키울지 지켜봐 주세요.”
그녀는 자신감이 대단했다.
정말 이번 일로 병을 이겨낸 것 같았다.
김우리에게 명함을 하나 건넸다.
“이게 뭐예요?”
“국가 헌터원 최국장이라고, 내 친구가 있는데 그놈 명함입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거죠?”
“앞으로 헌터 협회에서 불이익이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서윤아가 블리자드를 먹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일이 생기면, 그놈에게 연락해서 내 이름을 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길드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받아놓죠.”
“난 잠깐 음료수라도 뽑아오죠.”
냉장고에 음료수가 잔뜩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최한별이나 김우리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일은 서윤아의 치밀한 계략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나와 최한별을 죽이고, 레전더리 아이템을 가지고 나갔어도 그녀에게는 큰 이득이었을 것이고, 반대로 우리 손에 네 명의 B급 헌터가 죽었다면, B급 헌터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블리자드 길드를 통째로 삼키려 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김우리가 살아남았으니, 최규환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길드를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드르륵!
한참 만에 문이 열리고 김우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퉁퉁 부었다.
“전 오늘 퇴원합니다.”
“벌써요?”
“네, 아까 하신 말을 들으니, 정말 서윤아가 우리 길드를 통째로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당장 길드로 돌아가 길드원들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가?
김우리가 고종수보다는 더 길드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킬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병실로 돌아가는 김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행운을 빌어요.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언니와 소중한 추억이 담긴 길드는 반드시 제가 지킬 겁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왠지 블리자드를 더 크게 키워낼 것 같았다.
최한별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이제 혼자 있어도 괜찮겠죠?”
“어디 가려고요?”
“다른 팀원들이 들어간 게이트에 들어가 봐야죠.”
생각보다 보스를 너무 빨리 잡아, 하루 만에 C급 게이트를 클리어했고, 병원에서 이틀을 지냈으니 총 사흘이 흘렀다.
다른 팀원들은 아직도 게이트에서 괴수를 잡고 있었으니, 그들을 도우러 갈 생각이었다.
“저, 이제 말 놓으세요. 나이도 한 살 많으시잖아요.”
“그럼, 그럴까.”
“조심히 다녀와요.”
“그럼 몸조리 잘하고, 다음 게이트에 들어가야 하니까, 틈틈이 체력도 올려놔.”
“네. 명심합죠.”
그녀 역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말은 안 했지만, 10년을 사귄 고종수가 죽었다.
끝은 좋지 않았지만, 잠시 애도할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병원을 나와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15년 전. 그날 게이트가 뜬 하늘도 오늘처럼 맑았다.
체육 시간이던 우리 반은 운동장에서 그 거대한 것을 지켜봤다. 암흑의 게이트가 이글거리고, 주변의 아파트와 건물들이 휴지처럼 구겨져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나이가 13살.
그에 반해 김우리가 부모를 잃고 각성한 것이 17살이었다.
어쩌면 6학년 3반 친구들은 그녀보다 더 이상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연희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불과 며칠 전에 본 연희가 다시 보고 싶었다.
창수 그놈도...
그 길로 용산 헌터 시장으로 향했다.
***
[창수 가게]
돈은 모을 만큼 모았다.
인벤토리에 절반이나 현금이 꽉 차 있었고, 계좌에도 상당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유니크 아이템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동안 돈을 악착같이 모았으니, 드디어 쓸 때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용산 헌터 시장엔 살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아이템은 노멀과 레어가 가장 많았고, 가끔 유니크 아이템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진짜 가격이 비싸고 인기가 좋은 유니크 아이템이나 레전더리 아이템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팀원들의 아이템을 맞춰 주기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강해지려면 더 좋은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창수 후배 김성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지하 헌터 시장을 말하는 건가요?”
“네, 소문으로 들으니 그곳에 등급이 높고, 좋은 아이템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건 맞아요. 아무래도 거래 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 세금도 그렇고, 정보도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용산보다는 지하 헌터 시장을 이용하지요.”
“그곳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제 거래등급으로는 1층까지밖에 못 가요.”
지하 헌터 시장, 게이트가 발생하고 얼마 후에 생겼다고 했다.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권력이나 세력 싸움, 괴수를 죽이거나 게이트 클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아이템을 사고파는 일에만 몰두했다.
지하 헌터 시장은 처음부터 철저한 중립을 고수했고, 현재까지도 정부나 헌터 협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지하 헌터 시장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고 했다.
1층엔 용산 헌터 시장과 비슷한 물건을 거래하고, 정말 등급이 높은 아이템은 2층에서 주로 거래가 된다.
“2층을 가려면 그럼 뭐가 필요하죠?”
“거래등급이 높은 카드가 필요하죠. 고레벨 헌터가 아니라면 발급받기 힘들어요. 적어도 천억원 이상의 아이템 거래 실적이 있어야 하거든요.”
“흠, 그 정도 돈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하나 알긴 하죠.”
***
[국가 헌터원]
1층 로비에 김성하를 기다리게 하고 최규환을 찾아갔다.
“서윤아 일은 어떻게 됐어?”
“넌 오자마자 일이냐...”
최규환이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앉아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난 커피.”
커피가 나오고, 최규환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우리가 강력하게 헌터 협회에 항의했다.”
“결과는?”
“결과는 아직이야. 위에선 우리 이미지가 많이 올라간 지금이 목소리를 높일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여론에 정보를 흘리고, 헌터 협회를 대대적으로 압박하고 있지.
“그러다 큰일 나는 거 아냐?”
“이 정도 일은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어.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공격 수위가 더 올라갈 수도 있어.”
사실 이번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국가 헌터원이 확보하고 관리하는 게이트를 헌터 협회 헌터들이 임의로 공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서가 진짜라고 밝혀진 이상, 공격권은 국가 헌터원에 있었다.
“이번 기회에 게이트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가져오기만 해도 대성공이야.”
“모두 내 덕분인 거 알지?”
“물론, 네 역할이 컸지.”
최규환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거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큰 사고 칠 줄 알았다.”
“사고?”
“좋은 의미야. 당분간 헌터 협회 놈들이 잠잠하겠어.”
“그런 큰일은 모르겠고, 재발 방지는?”
“앞으로 너희 팀이 공략하는 게이트는 특별히 서기관급 헌터를 파견하기로 했어. 아무리 정식 허가증이 나와도 절대 출입을 금지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그건 됐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최규환이 의자에서 살짝 물러섰다.
“또 뭔데 그래?”
“너 지하 헌터 시장 알지?”
“알기야 알지.”
“거기 지하 2층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출입카드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