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62화 (62/149)

# 62

62. 난도(亂刀)질(2).

“이 여자가 왜 여기 있어?”

모닥불 앞에 누워있는 브로커 이수경을 보며 윤상희가 물었다.

“예전에 한번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태준 오빠와 나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이번에도 돕기 위에 왔을까요?”

수진이가 대답했다.

그동안 여러 번 만났고, D급 게이트에서 함께 하루 동안 괴수를 함께 잡았기에 나름 정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요. C급 헌터가 우리를 돕기 위해 B급 게이트에 들어왔을 거라는 예상은 이상합니다.”

최한별이 고개를 흔들며 수진이의 말을 반박했다.

두 사람은 나이가 제법 차이가 남에도 아직 말을 놓지 않았다.

최한별은 브로커 이수경이 C등급 헌터란 말을 듣고는 절대 일부러 들어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게이트 브로커가 소개했으면 끝나는 일이지 클리어되지도 않은 던전에 들어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추측뿐이었고, 자세한 것은 이수경이 깨어나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매우 지쳐있었다.

이수경은 우리를 따라 산을 오르면서 남겨진 괴수와 싸우거나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을 것이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기에 기력만 회복하면 곧 깨어날 것 같았다.

“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정기용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은 나였다.

“글쎄, 내 생각엔 이수경씨가 우리에게 뭔가 다급히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왔을 거야.”

“무슨 일?”

“그거야 깨어나 봐야 알지.”

이수경은 평소 책임감이 강했다.

불법 게이트를 소개하는 브로커였지만, 게이트를 소개하고 우리가 클리어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과거에 우리가 독점한 게이트에 침입자가 들어가자, 곧바로 뒤를 추격해 직접 해결하려고 했으니, 돈을 받으면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유 없이 게이트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최한별이 물었다.

“그럼 이대로 마냥 기다려?”

“일단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이 좋아. 괜히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소멸 시간에 쫓기게 돼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을 거야.”

다들 태준의 말이 옳게 느껴졌다.

이수경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윤상희가 따듯한 물을 계속 먹였다.

“그런데 이 여자한테 왜 이렇게 고소한 커피 냄새가 나지?”

“그 여자 커피 성애자야. 인벤토리에 먹을 건 없어도 커피는 가득할걸요.”

처음 이수경을 만났을 때, 느꼈던 커피향이 떠올랐다.

불법 게이트를 소개받기 위해 나간 커피숍에서 그녀는 이미 2잔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는 호전됐지만, 곧바로 의식을 차리진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말볼을 데리고 주변 수색을 다녀올 테니까, 쉬면서도 긴장들하고 있어.”

“나도 같이 가요.”

내가 일어나자 최한별이 따라 일어났다.

“좋아, 다른 사람들은 경계 철저히 해. 그 A급 괴수가 나타나면 싸우지 말고 일단 자리를 피하고.”

“대장, 너무 걱정하지 마. 이런 눈보라에 이 이글루는 완벽한 은신처니까.”

말볼에게 목줄을 채웠다.

갑자기 괴수에게 달려들 수도 있었기에 안전장치를 한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최한별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괴수의 서식지나 은신처라도 찾아야지.”

말볼을 앞세우고 산 위로 더 올라갔다.

위쪽은 바람이 더욱 거셌다.

추위에 끄떡없는 얼음 마법사 최한별도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 강추위에서도 계속 이수경이 왜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을까를 고민했다.

헌터 협회나 국가 헌터원에 불법 게이트가 발각된 것일까?

아니면 저번처럼 누군가 우리가 독점한 게이트로 무작정 들어온 것일 수도 있었다.

설마, 도하준 그놈이 암살자라도 보낸 것일까?

최근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없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글루 안에선 이런 고민을 할 수 없었다.

다들 내 표정만 봐도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느꼈을 것이다.

“게르르.”

말볼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이다.

쿵! 쿵! 쿵!

뭔가 육중한 것이 아래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쉿! 말볼 조용히 해.”

최한별이 얼음으로 우리 주변을 두르자, 순식간에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

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디울리스(A), 거대한 고릴라인가?

영화에서 보던 킹콩과 닮아 있었다. 놈의 온몸은 흰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양팔이 다리보다 2배나 길어 보였다.

놈의 주먹이 우리 은신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주먹의 크기가 웬만한 자동차보다 더 컸다. 저런 주먹에 맞으면 3미터의 미노타우로스도 곤죽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 손엔 B급 괴수 히스트릭스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고슴도치 괴수의 날카로운 가시도 놈의 피부를 뚫지 못했고, 먹이가 된 것이다.

만약 S급 게이트가 발생한다면, 이런 A급 괴수가 수십, 수백 마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등급이 약한 헌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사람들은 스치는 바람에도 죽을 것이다.

얼음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멀어지는 놈을 바라보았다.

[디울리스(A등급) - 거대한 괴물 고릴라. 피부는 강철 같고, 힘이 매우 강하다. 두 주먹의 공격력이 무시무시해 산과 바위를 부수고, 내려치는 일격이 특히 강력해 탱크를 한 방에 캔커피처럼 납작하게 만든다.]

“게르르.”

말볼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 순간 디울리스가 몸을 돌렸다.

급하게 안으로 들어가 말볼의 입을 막았다.

이곳은 저놈과 싸우기에 장소가 좋지 않았다.

전에 B급 게이트에서 A급 괴수 "마그투스"를 잡은 것은 사실 운이 매우 좋은 경우였다.

마그투스는 숲의 지배자, 숲에서 싸울 때 그 힘과 위력은 배가 된다.

그리고 놈의 장기는 무시무시한 다리였다. 하지만 다리가 늪에 빠져 있었으니,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우리에게 쉽게 잡힌 것이다.

“크릉!”

놈이 코를 한번 털어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위쪽으로 올라갔다.

“휴!”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허! 이거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최한별도 팔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이는 추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눈밭에서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어.”

놈의 흰털 때문에 자동으로 스텔스 모드가 된 괴수를 어떻게 잡겠는가.

“일단 따라가서 놈의 은신처를 알아내자.”

조심스럽게 놈의 뒤를 밟았다.

거센 눈보라와 바람 때문에 놈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긴가 봐요.”

최한별이 먼저 거대한 얼음 동굴을 발견했다.

거대한 산 뒤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고, 놈은 발로 먹이를 잡고 양손으로 절벽을 올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접근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곳이었다.

“일단 돌아가자.”

이글루로 돌아갔다.

***

“왔어.”

“고생했어요.”

이글루 안으로 들어가자, 팀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깨어났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수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런 고생을 하며 우리를 뒤따라왔죠?”

이수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이태성 헌터 협회 이사를 아십니까?”

이름을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났다.

“네. 초등학교 동창이죠.”

최한별을 빼고는 다들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이름을 말하는 이수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의 보스가 이태성, 그 사람이었습니다.”

“잠깐,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헌터 협회 이사가 불법 게이트를 소개하는 회사를 운영한다고요?”

“네. 저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9위에 링크된 거상 길드도 실질적으로 이태성이 운영하고 있더군요.”

이태성, 이놈을 떠올리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장사하는 놈이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 많이 성숙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자애들에게 야한 잡지나 야동 CD를 팔기도 하고, 게임팩이나 고등학생 친누나의 속옷도 파는 놈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싸움 한 번 없었고, 선생님에게 한 번도 걸리지도 않은 치밀함도 있었다.

“갑자기 그런 정보를 어떻게 얻은 거죠?”

“이태성이 직접 게이트로 찾아왔습니다.”

“예? 지금 공략하고 있는 이 B급 게이트로 말입니까?”

“네, 그리고 밖에 복면을 쓰고 있는 헌터들은 모두 거상 길드의 헌터들입니다.”

이수경의 말을 듣자, 어떻게 게이트 브로커들이 B급 게이트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사실 헌터 협회나 국가 헌터원의 내부 도움 없이 게이트를 빼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태성은 헌터 협회 이사였고, 대한민국 9위의 길드를 가지고 있었으니, A등급 게이트는 힘들어도 B등급까지는 얼마든지 몰래 빼돌리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이태성도 돈을 벌려고 하는 걸 텐데요. 설마, 그걸 알려주려고 목숨 걸고 들어온 건 아니죠?”

“네, 보스가 누구든 사실 여러분과 상관없죠. 하지만 그가 외부인을 함께 데려왔습니다.”

외부인이란 말에 순간 머리가 띵했다.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존재를.

“혹시, 서윤아인가요?”

내 물음에 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수경의 입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이태성이 서윤아를 데려왔고, 서윤아가 직접 게이트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리려고...”

이수경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제가 소개한 게이트인데, 끝까지 책임져야죠. 직접 막지는 못했지만...”

이수경은 차라리 국가 헌터원 같은 곳에서 공무원을 했으면, 아주 잘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쉽게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상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서윤아가 설마? 우리를 죽이려고?”

“설마가 아니라 그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최한별이 치를 떨었다.

고종수와 블리자드 길드의 B급 헌터들이 죽었다.

그 책임의 절반은 그녀에게 있었다.

“서윤아 혼자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내 질문에 이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혼자 해결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혼자라지만, 상대는 A급 헌터잖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접신하지 않은 정기용이 말을 꺼냈다.

B급과 A급 헌터는 그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B급 헌터 수십 명이 붙어도 A급 한 명을 이기지 못했다.

A급은 헌터로서 한계를 넘고 환골탈태를 한 것과 비슷한 의미로 진정한 고레벨 헌터가 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서윤아는 A급 헌터가 된 지 5년이 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동안 실력이 더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골렘 마스터야. 쉽진 않을 거야.”

팀원들 모두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괴수보다 그녀가 더 무서운 건 당연했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A급 괴수를 처리했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릴 막으면 쓰러트리면 돼.”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다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죽을 힘을 다했기에 이 짧은 시간에 B등급 헌터까지 됐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우리가 힘을 합쳐 싸운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맞아. 형이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도 못 왔어.”

이수호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정기용이 웃으며 말했다.

“까짓거 상대해주지.”

“그래 그년의 머리통에 광전사의 도끼를 박아주지.”

“난 화살을!”

최한별도, 윤상희도, 한수진도, 정기용도 모두 태준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서윤아는 분명 게이트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서윤아를 상대하기 전에 부탁이 하나 있어.”

“말해봐요.”

“이제 체력 수치를 2만 올리면, 나도 B등급으로 승급할 거야. 그러니 저 위에 괴수는 내가 혼자 상대할게.”

“뭐?”

내 말에 팀원들이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특히 A급 괴수 디울리스를 직접 본 최한별은 너무 놀라 고개까지 흔들었다.

“A급 괴수를? 괜찮겠어요?”

“혼자서는 위험할 텐데.”

처음엔 팀원들이 모두 만류했다.

하지만 다들 내 고집을 알고 있었다.

만약 B등급으로 승급한다면, 다음 백정 스킬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서윤아를 이길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

그래야 팀원들을 지키고, 이 게이트를 무사히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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