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 S급 게이트(4).
수북수북.
전날부터 내린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고, 세상은 온통 백색으로 변했다. 차가 다니지 않은 도로, 사람이 다니지 않는 인도, 온기가 전혀 없는 지붕과 건물, 모두 눈이 덮여 꼭 얼음 왕국에 온 것 같았다.
게다가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눈발은 잦아들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바람이 고요한 것이 다행이었다.
“오늘은 아니겠지?”
“후우.”
입과 코에서 뿜어진 담배 연기가 내리는 눈과 함께 묘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설마, 새해 첫날에 뜨겠어. 며칠은 있다가 뜨겠지.”
“야, 나도 담배 하나 줘봐.”
“뭐? 너 끊은 지 몇 년 됐잖아?”
“5년 됐지. 하지만 오늘은 좀 피워야겠다.”
“미친 새끼, 마누라한테 혼나려고.”
“티 나려나?”
“그럼, 난 못 준다. 너희 마누라가 내가 담배 준 걸 알면...”
사내가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으! 괴수보다 더 무서워.”
“아씨, 장난치지 말고, 한 대 줘.”
“다시 말하지만 난 못 주니까. 저기 군바리에게 얻어 펴.”
“군대 담배 독해서 못 펴.”
“그럼 그냥 손가락이나 빨아.”
“추, 충성.”
담배를 피우고 싶다던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그러자 담배를 피우던 사내도 담배를 발로 끄며, 일어서 경례를 붙였다.
“충성.”
“식당에 사발면 준비됐으니까, 와서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최한별 헌터님.”
식당이라고 해봐야 서울역 1층에 있는 공간을 비우고,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은 것이 다였다.
최한별은 서울역 주변을 다니며 헌터들에게 사발면을 권하고 있었다.
“새끼, 침 떨어진다.”
“쓰읍. 참 미인이란 말이야.”
“최한별 헌터가 도도한 매력이 있지. 어여 가서 먹자. 아직 교대하려면 멀었으니까, 배 좀 채워둬야 해.”
서울역 주변에 배치된 수백 명의 헌터들이 뜨끈한 사발면 국물로 추운 몸을 녹이고 있었다.
태준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어제보다 헌터 숫자가 줄었어.”
“통신 수단이 모두 끊겼으니, 이때다 싶어서 도망간 거겠지.”
창수의 말대로 이탈한 헌터들이 제법 많았다.
그나마 가정이 있고, 나이 많은 헌터들과 국가 헌터원 소속의 헌터들이 버티고 있어 이 정도 숫자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두 위치로!”
“서둘러!”
“네!”
서울역 고가 아래에 있던 지휘 천막에서 이설록 헌터와 헌터 사무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설록은 곧장 도로 정중앙에 있는 태준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먼저 물었다.
“시작된 겁니까?”
“네,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척후병이 알려왔습니다.”
통신이 안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전 후암동 지부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을 잘 부탁합니다.”
“네. 죽지 않으려면 지켜야지요.”
이설록은 A급 헌터로 서울역과 그 주변 전선의 책임자였다.
그가 그리폰을 소환하더니, 등에 타고 동남쪽으로 곧장 날아갔다.
국가 헌터원의 서기관과 사무관들이 각자 자리에 도착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저기다! 게이트다!”
적외선 쌍안경으로 남쪽을 관측하던 군인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수천 쌍의 눈이 일제히 남쪽을 향했다.
“세, 세상에!”
“정말 무시무시하네!”
검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검은색이 눈 내리는 밤하늘에 뜨자,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허! 정말 지름이 1km는 되겠군.”
창수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용산역 상공 200미터 위쪽으로 거대한 S급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가 워낙 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도 관측이 가능한 정도였다.
척! 철컥!
창수가 지옥의 묵시록을 장전했다.
“아주 긴 밤이 되겠어.”
내 신호를 받고 주변에 있던 팀원들이 창수와 내 주변으로 모였다.
“다들 무전기 확인해봐.”
차례로 가슴에 달린 버튼을 누르고 말하기 시작했다.
- 잘 들리는가? 오바.
- 오케이, 난 잘 들린다. 오바.
창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말할 때도 소리는 별도로 들리니까 끝에 오바라고 안 해도 돼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만 버튼을 누르고 말하면 됩니다.”
게이트 파장을 이용한 최초의 무전기였다.
거리는 아직 300m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질 순 없었지만, 음질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 최고였다.
“여길 지나가는 큰놈들만 막아. 혹시나 우리를 지나쳐 가는 약한 놈들이 있다면, 그냥 보내버리고.”
“괜찮겠어?”
“후방에 괴수 처리팀이 별도로 있어. 잔챙이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알았어.”
게이트와 다르게 전장이 서울 시내였기에 팀원들의 긴장감도 상당했다.
“저기 봐 쏟아진다!”
“제길 많이도 떨어진다.”
지름이 1km나 되는 거대한 게이트에서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꼭 폭포 같았다.
그때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반짝거리며 게이트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공략팀이 들어가는군.”
저 헬리콥터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추락할 것이다. S급, A급 헌터들이 다칠 일은 없었지만, 땅에 떨어지자마자 괴수들이 달려들면 죽을 수도 있었다.
눈을 감고 간절히 단 하나의 소원을 빌었다.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수호야, 준비해!”
“네!”
미노타우로스 세 마리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컨테이너로 만든 바리케이드 앞으로 섰다.
수진이와 남창수, 김성하가 바리케이드 뒤쪽에 모여 있었고, 그 뒤로 원거리 무기를 가진 헌터들과 마법사, 그리고 수천 명의 군인이 중화기를 전방을 향해 겨눴다.
이들을 지휘하는 것은 창수였다.
창수는 전투 경험도 많았고, A급 헌터였다.
게다가 타고난 눈썰미가 좋아 괴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가장 강력한 원거리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대한 괴수와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괴수를 중점적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리고 수진이가 옆에서 미리 괴수 위치를 알려주면 집중사격하는 연습도 마친 상태였다.
바리케이트 부근과 그 앞쪽엔 헌터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몸으로 괴수들을 막을 것이다.
“수호오빠 잘 부탁해.”
“네.”
수진이가 소리치자, 수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철퇴를 들고 원거리 팀 앞을 막아섰다.
“온다!”
용산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널찍한 도로가 괴수들의 주 이동 통로였다.
가장 먼저 도로 위를 가득 메우고 D급 괴수 닭대가리 잘루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창수야 약한 놈들이야. 환영 인사를 해줘야지.”
“알았어.”
창수가 마력 발칸포를 달려오는 괴수 무리를 향해 겨눴다.
그러자 원거리 헌터들과 중화기도 일제히 전방을 향했다.
명령은 따로 필요 없었다.
창수가 쏜 예광탄이 날아가는 곳이 곧 이들의 목표였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
지옥의 묵시록이 불을 뿜었다.
퍼퍼퍼퍼퍼펑!
순식간에 수백 발의 마력 탄환이 날아가 잘루스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수진이의 폭풍의 화살과 헌터들의 마법이 날아갔다.
땅이 울릴 정도의 굉음이 터지고, 사방에 불길이 번쩍였다.
“좋았어!”
수백 마리가 넘는 괴수들이 죽었다. 아니 녹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서울역 앞쪽 도로는 잘루스의 붉은 피와 살덩이가 가득했다.
“또 온다!”
이번엔 강력한 놈들이다.
B등급 괴수 검치호랑이 마카이로! 거대하고 빠른 괴수, 커다란 송곳니로 사람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뚫어버리는 모습에 낮은 등급의 헌터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발사하라!”
또다시 화염과 번개가 날아간다.
그 순간 마지막 헬리콥터가 S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아렸다.
좋아하는 여자를 사지로 보내야 하는 마음이 이런 것인가.
그냥 최규환에게 떼를 써서라도 함께 갔어야 했을까?
하지만 자신은 아직 그녀에겐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쉬지 않고, 괴수를 잡았건만 S급 헌터의 길은 아직 멀고 험했다.
6학년 3반 출신 헌터들은 이미 5년 전에 대부분 A급을 넘어섰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그중에서 S급이 된 헌터는 겨우 다섯이었고, 대한민국의 20만 헌터 중에서 S급은 모두 열 명밖에 없었다.
“대장, 드레이크야!”
최한별의 외침에 생각을 멈췄다.
A급 괴수 드레이크가 세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날아오고 있었다.
“하필 이쪽으로 올 게 뭐야!”
- 창수야. 전방 상공에 드레이크다.
- 알았어.
[드레이크(A) - 날개를 활짝 펴면 30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놈이다. 하늘에서 멈춘 자세로 땅을 향해 화염을 쏜다. 놈이 지나간 자리엔 나무하나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모두 재가 된다.]
드레이크를 향해 헌터들의 공격이 쏘아졌다.
하지만 놈은 공중에서 몸을 움직이며 마법과 총알을 피했다.
놈이 저공비행을 하며, 바리케이드 위쪽에 접근해 헌터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화아아아아!
“얼음 장벽!”
파파파파팍!
커다란 얼음벽이 바리케이드를 보호하며, 솟아올랐다.
화염이 얼마나 뜨거운지 얼음이 순식간에 녹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창수의 지옥의 묵시록이 조준을 끝내고 얼음 총알을 쏘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타!
“크와왁!”
날개에 구멍이 뚫리며 드레이크가 비명을 질렀다.
놈의 날개가 꺾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자, 최한별이 달려갔다.
“아이스 블라스트!”
눈 위로 얼음창과 냉기가 뿜어 올라 추락한 드레이크를 휘감았다.
놈은 몸이 땅에 달라붙었다.
“죽어!”
윤상희가 야수의 도끼를 드레이크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놈의 머리가 얼음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 한 놈 처리했고.
그리고 후암동에서 돌아온 이설록 헌터의 그리폰 세 마리가 드레이크 한 마리를 공중에서 공격했다.
그리폰 한 마리가 드레이크의 화염에 강제 소환됐지만, 이설록이 타고 있던 그리폰이 뒤에서 발톱으로 드레이크의 목을 물고, 다른 한 마리가 날개를 부리로 찢어 버리자, 드레이크가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추락한 드레이크를 두 마리 그리폰이 발톱과 부리로 난도질하자 놈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사이 마지막 드레이크가 서울역 상공에 있던 공격헬기를 공격해 순식간에 추락하기도 했다.
“철길 쪽에 마그투스가 나타났데.”
-창수야! 나머지 드레이크 한 놈을 부탁해.
급하게 철길로 향했다.
그곳엔 마그투스 두 마리와 헌터들이 싸우고 있었다.
헌터가 소환한 오우거 네 마리가 마그투스 한 마리와 뒤엉켜 싸우고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헌터들과 싸우고 있었다.
10미터에 달하는 키와 육중한 몸체, 거기에 엄청난 힘 때문에 오우거 세 마리도 밀리고 있었다.
‘급한 것은 헌터들 쪽이다.’
마그투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격의 마법사이자, B등급 헌터 서기관 이광옥의 번개가 마그투스에 작렬했지만,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흉포해져 헌터들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
“으아아!”
콰직!
C급 헌터 하나가 몸이 터지며, 붉은 눈밭 위에 피를 뿌렸다.
권법가이자, 주먹을 쓰는 B급 헌터 서기관 강태산이 달려들어 주먹으로 동료를 짓밟은 마그투스의 발목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번엔 효과가 있었는지, 놈이 휘청거렸다.
“비켜!”
[흉포한 에이션트 마그투스의 각반(레전더리)을 사용합니다.]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날렸다.
퍼걱!
짧고 굵은 단발의 타격음이 들리며, A급 괴수 마그투스의 다리가 안쪽으로 꺾였다.
무릎이 완전히 반대로 꺾이며 육중한 놈이 쓰러졌다.
쿠웅!
눈밭을 달려가 놈의 눈을 향해 백정의 칼을 박았다.
“죽어! 도대관(導大窾)!”
눈알이 파이며 다섯 개의 구멍이 뒤통수까지 펑 뚫렸다.
마그투스는 크게 한번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죽었다.
전에 B급 게이트에서 놈을 잡고 해체했기에 마그투스의 약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다른 괴수들과 다르게 눈이 크고, 눈알 뒤에 뼈가 약했기에 도대관 스킬만으로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이쪽에서 한 마리를 처리하는 사이에 오우거 네 마리가 마그투스를 쓰러트리고, 거대한 도끼로 마구 찍고 있었다.
저쪽 마그투스도 곧 고개를 떨궜다.
A급 소환 술사 강윤호가 나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틀 전에 이곳에서 처음 만난 헌터였고, 대통령의 호위 헌터로 청와대 소속이었다.
오우거는 레전더리급 소환수는 아니었고, 이수호의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유니크급이었지만, 숫자가 네 마리나 됐고, 강윤호의 능력이 뛰어났기에 혼자서 A급 괴수 마그투스를 잡을 수 있었다.
“와아아아!”
“괴수를 잡았다!”
“이길 수 있다!”
갑자기 헌터들과 군인들의 함성이 들렸다.
마지막 드레이크가 헌터들의 공격으로 땅으로 추락했기에 나는 소리였다.
헌터들이 모두 힘을 합치자, 큰 피해 없이 괴수를 효과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르! 쿵!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남영역 옆쪽에 있던 커다란 21층 오피스텔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건물 옆으로 거대한 이빨과 발톱, 체격을 가진 괴수 칸(Khan)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에스급 괴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