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73화 (73/149)

# 73

73. 거래(2).

최민지와 도경수, 두 사람은 분명 연희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버리고 왔다?

사실 그 상황도 이상했다.

이태성이 말하길 연희가 탈출 직전에 이미 SS급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했다.

그럼 치명상을 입은 괴수와 동귀어진을 했다는 말인데, 그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뒤에서 연희를 공격했다는 말인가?’

그것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연희가 타격을 받았고, 괴수와 함께 파묻혔을까?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연희를 공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침묵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했을까?

그렇다면 왜?

연희를 공격한 것일까?

그것을 그들에게 묻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힘을 써서라도 나를 죽일 것이다.

연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헌터이자 국민 영웅이었고, 헌터들의 우상이었다.

그녀가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한 이유가 두 사람 때문이라면, 그들은 모든 헌터들에게 외면을 받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그리고 연희를 SS급 게이트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져야 했다.

그 어떤 헌터보다 더!!

“지금 혼자 B등급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말이야?”

“그래. 그게 조건이야.”

내 제안을 들은 이태성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태준이 A급 헌터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B급 게이트를 혼자 공략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태준이였기 때문에 가능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계속 새로운 게이트를 제공해 주면 나는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어.”

“그거야 나도 알지. 사실 지금까지 네 행보를 보면,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그런데 네 팀은 어쩌고, 혼자 들어간다는 거지? 보아하니 꽤 쓸만한 헌터들이던데?”

“그들은 이 일과 상관없어. 이건 너와 나의 거래야.”

“그래?”

이태성이 뭔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좋아, 테스트 삼아 B급 게이트 하나를 주지. 열흘 안에 클리어한다면, 네 제안을 수락하지. 일단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일주일 후에...”

“아니, 내일 당장 들어가지.”

“허, 급하군.”

***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팀원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요?”

눈치가 빠른 최한별이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수진이도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태준 오빠가 힘을 내야죠. 연희 언니를 구하려면, 앞으로 2년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그전에 열심히 게이트를 공략해서 등급을 올려요.”

“그래, 고맙다. 나 먼저 들어갈게, 오늘은 좀 피곤하네.”

“태준씨, 밥이나 먹고 들어가!”

윤상희가 말했지만, 손을 저으며 곧장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다들 잠든 시간.

거실에서 혼자 작업하는 창수에게 다가갔다.

“창수야. 나 좀 잠깐 보자.”

“지금?”

“그래.”

창수가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물었다.

“그런데 낮엔 어딜 다녔길래 그렇게 늦게 들어왔어?”

“헌터 협회에 다녀왔어.”

“헌터 협회를?”

창수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조용히 녀석의 눈을 바라봤다.

“창수야.”

“어? 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뭔데 그래? 불안하게.”

창수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내 행보에 대해서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고, 내 이야기를 들은 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 너라면 이해해 줄지 알았어.”

내 말에 창수가 이번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너와 함께 한 동료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도 알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중에 SS급 게이트가 다시 열려도 그들과 함께 들어가야 해. 그러니 그들 사이에서 연희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져야만 해.”

창수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러다 나처럼 될 수도 있어.”

“알아, 그래도 넌 지금 성하씨와 함께 있잖아.”

“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 좋은 팀원들이야. 네가 떠나면 그들이 망가질 수도 있어.”

“그래서 너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휴! 솔직히 난 너처럼 잘할 자신이 없어. 하지만 최선을 다해볼게.”

“고맙다. 내가 네게 너무 큰 짐을 맡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꼭 무사히 강해져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서 곰같은 창수를 꼭 껴안았다.

‘너희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지.’

헌터 협회의 두 사람을 적으로 생각한 그 순간, 팀원들의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내 문제로 그들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었다.

에이션트 마그투스의 각반을 사고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국가 헌터원으로부터 펜트하우스를 샀다.

어쩌면 내가 동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몰래 펜트하우스를 떠났다.

***

[B급 게이트]

‘놈의 발자국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

괴수를 추적한 지, 이틀째.

[A급 괴수 오라흐(Orah) - 15미터의 기다란 몸길이에 드래곤을 닮은 모습, 1억 도의 마력 소이탄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

엄청난 화염 내성 때문에 화염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괴수였고, 날개가 있으나 퇴화해 날지 못했다.

하지만 날개를 퍼덕거리면 제자리에서 자기 몸의 2, 3배 만큼의 점프를 한다.

주요 공격 - 입에서 불을 뿜는 괴수로 치명적인 사정거리가 50미터였고, 불길이 약 100여 미터까지 뿜어진다. 한번 불을 뿜고 다시 내뿜기 위해서는 5분의 휴식기가 필요하기에 그 전에 처리하는 것이 좋다.]

오라흐는 상처 입었다.

괴수가 인간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아니 잔혹한 도살자를 피하는 것이다.

분노는 때론 진보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강력한 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으아아아!”

[도살자의 포효(lv1)가 발동했습니다.]

[도살자의 포효 - 상처 입은 괴수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는다. 데미지 50% 이상의 괴수에게 50%의 확률로 상태 이상을 만든다.

상태 이상에 걸리면 이동 속도 50% 저하, 출혈 증가.]

도살자의 포효가 울리자, 커다란 바위 뒤에 숨이 있던 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놈을 따라 달린다.

상태 이상에 걸려 놈이 느려졌다.

칼을 휘둘러 놈의 뒷발을 그었다.

“쿠에에엑!”

쿵! 쿠쿵! 쾅!

거대한 놈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면서 앞으로 세 바퀴나 굴렀고, 주변의 나무가 모두 부러졌다.

달려가 놈의 위로 올라타 배를 향해 백정의 칼을 찌른다.

“도살(屠殺)!”

푹! 푹! 푹!

촤악!

괴수가 산채로 자신의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발광했지만, 흉포한 에이션트 마그투스 각반의 힘에 저항할 힘을 잃었다.

칼이 괴수의 몸속을 파고들어, 팔딱거리는 심장을 꺼낸다.

그리고.

신선한 심장을 잘근잘근 씹는다.

‘섭취(攝取)!’

몸에 생기가 돌고, 상처 부위가 몇 배나 빠르게 치료된다.

오라흐가 자신의 심장이 인간 도살자에게 먹히는 모습을 보고는 몸을 축 늘어트렸다.

괴수의 살이 씹히고, 놈의 피가 온몸에 물드는 이 순간 나는 포식자의 전율을 느낀다.

[A등급 괴수 오라흐(Orah)를 잡았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피와 살, 잔인함과 무자비함.

괴수 백정이자, 도살자(屠殺者)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노가 더해진 나의 칼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잔혹해졌으며, 무자비한 폭군이 된다.

변해버린 내 모습, 냉혹한 도살자의 눈빛이 쏘아졌다.

어쩌면 동료들에게 이런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괴수의 머리를 분해하자, 감정이 격양됐다.

그렇게 나는 진정한 도살자로 눈을 뜨고 있었다.

***

[거상 길드 이태성 사무실]

똑똑.

“들어와!”

거구의 헌터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태준이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뭐? 4일 만에 해냈단 말이야?”

“네, 점점 시간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처음 테스트로 내주었던 B급 게이트는 간신히 열흘 안에 클리어했다.

그것 자체로도 획기적이고 엄청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 B급 게이트를 4일 만에 클리어한 것이다.

“지금 어디 있지?”

“이리 오고 있습니다. 출발한 지 꽤 됐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몸 상태는 어떻지?”

“그것이 아주 멀쩡하답니다.”

“제길, 또 바로 게이트를 달라고 떼를 쓰겠군.”

“저희도 이제 보유한 B급 게이트가 없습니다.”

A급 헌터이자, 이태성의 오른팔인 강남길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나도 없단 말이야?”

“네, 전부 다른 길드에서 공략 중인 것밖에 없습니다.”

“허! 이를 어쩐다.”

“이제 슬슬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놈의 뱃속에 들어간 B급 게이트가 자그마치 14개입니다.”

불법 게이트로 팔거나 자신들이 공략했다면, 수천억의 가치가 있었고, 정식으로 헌터 협회를 통해서 다른 길드에 넘겼어도 수수료만 수백억은 더 벌었을 것이다. 거기에 괴수 부산물을 더하면 추가로 수십억의 공돈이 더 들어왔을 물건을, 태준이 혼자서 그것도 석 달 만에 싹쓸이한 것이다.

“벌써 쓰기엔 조금 아까운데.”

“대체, 그놈이 뭐라고 이리 칼만 가시는 겁니까?”

“아주 큰 변수가 될 거야. 우리가 헌터 협회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변수 말이야.”

“차라리 중급 헌터들을 대량으로 모집해 우리가 게이트를 클리어해 길드의 몸집을 더 키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겨우 A급 헌터 하나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강남길의 말에 이태성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후, 네놈은 모르겠지만, 장사꾼에게는 타고난 촉이 있는 법이야. 그리고 내 촉은 특별해서 지금까지 틀린 적이 거의 없지, 그 촉이 지금 저 녀석을 키우라고 재촉하고 있어. 호랑이를 물어뜯을 사냥개가 될 거라고 말이지.”

“그런데 게이트가 없는데 어쩌실 겁니까?”

“그럼, 조금 빨리 써야 하나...”

이태성이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나태준 헌터가 왔습니다.

- 알았어.

끼익.

문이 열렸다.

“나태준, 오랜만에 보는군.”

태준의 눈빛에 흐르는 살기에 S급 헌터 이태성이 움찔했다.

‘뭐야, 이게 그 나태준인가?’

불과 석 달 전에 본 그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음 B등급 게이트는 어디지?”

“미안하지만 다음은 없어.”

“뭐? 게이트가 없다는 말이야?”

“그래, 새로이 게이트가 발생하면 모를까, 더는 B등급 게이트가 없어.”

“그럼 우리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후후, 급하긴. B급 게이트가 없다는 거지. 게이트가 없는 것은 아니야. 아무래도 이제 A급 게이트로 가야 할 것 같아.”

“A등급?”

A급 게이트, S급 게이트가 뜨기 전까진 현존하는 최고 등급의 게이트였다. 물론 지금도 최고로 공략하기 어려운 게이트란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A급 헌터들과 S급 헌터들이 가장 최우선으로 공략해야 하는 게이트였고, 한 번에 수십에서 수백 명의 헌터들이 들어가서 함께 공략해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게이트였다.

나태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기겠군.”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이제 너의 그 솜씨를 시험할 때가 된 거 같아.”

“A급 게이트라면, 나 혼자 하는 건 아닐 테고?”

“물론이야, 우리 거상 길드원들이 함께 들어갈 거야. 그리고 헌터 협회 소속의 다른 헌터들도 들어가겠지.”

쟁쟁한 경쟁 상대가 있는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일이었다.

이태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A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해!”

“원하는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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