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 내 식구를 건들지 마라(1)!
고급 벤 창밖으로 많은 사람이 보였다.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네.’
최한별의 시선은 용산역 광장에 만들어진 이연희 헌터의 추모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날 S급 게이트가 생기고 벌써 6개월이 지났다.
함께 들어갔다가 죽은 A급 헌터 80여 명의 위령비도 그 옆쪽으로 늘어서 있었으나, 사람들은 유독 이연희의 커다란 추모비 앞에 모여 있었다.
“살아 있겠지?”
앞자리에 앉은 윤상희도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솔직히 포탈은 잘 모르겠고, S급 게이트에 홀로 남았다면 생존이 쉽진 않을 걸요.”
윤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 대장을 위해서라도 살아 있어야 할 텐데...”
“그런데 정기용씨는 왜 이 차에 타지 않은 거죠?”
윤상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철용의 차를 함께 타고 갔어.”
“네?”
“그리고 헌터 협회 쪽에서 마련해준 숙소로 옮길 거래.”
“왜 갑자기?”
“난들 아나? 그냥 일방적인 통보였어.”
최한별의 이마가 좁혀졌다.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생겼다.
팀의 균열.
윤상희와 한수진은 워낙 태준을 향한 마음이 확고했기에 걱정이 없었지만, 정기용은 떠났고 이수호는 왠지 모르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수호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스스로 행동하기보단 대장을 따라다니며, 실력을 키우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나태준이 사라지자 의지할 곳이 사라졌고, 윤상희나 남창수를 전적으로 믿기에는 두 사람의 실력과 리더쉽이 부족했다.
그런데 최근 이철용이 우리 팀원들에게 잘해주자, 그의 명령을 잘 따르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봐도 이철용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 다루기 어렵다는 헌터들을 말 한마디로 이끌고, 거대한 S급 괴수를 압도하는 실력까지.
게다가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컸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인가?”
윤상희의 말에 다시 창밖을 보았다.
버스 정류장에 이철용이 괴수를 죽이는 모습의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이번엔 대형 전광판에 이철용이 메인으로 나오는 국가 헌터원의 공익광고가 보였다.
거리엔 온통 새로운 영웅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띠리리리!
최한별의 휴대폰이 울렸다.
블리자드 길드의 김우리였다.
인벤토리에 넣어 놓으면 배터리도 소모되지 않아, 게이트에 나오자마자 쓸 수 있었다.
피곤해 받지 않으려 했지만, 부재중 전화가 몇 번 와 있었다.
급한 일일 수도 있으니.
[내가 게이트에서 나온 건 또 어떻게 알았데?]
[몰랐는데요.]
[왜? 계속 전화질이야?]
[관심이 있을 텐데, 나태준 헌터 일이에요.]
[뭐?]
최한별이 주변을 둘러봤다.
수진이와 수호는 자고 있었고, 윤상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좀 만나.]
[어딘데요?]
[서울역에 도착했어.]
[그럼 블리자드 길드 사무실로 와요.]
[너 많이 컸다.]
[그럼요. 이제 길드장이 됐는데요.]
[알았어 내가 가마.]
윤상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 김우리요. 길드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난 걔 좀 이상하더라, 혼잣말도 자주 하고.”
“그래도 본성은 착한 애예요.”
최한별이 살짝 웃으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저 좀 여기서 내릴게요.”
“지금 만나러 가게?”
윤상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헌터원에서는 태준의 파티원들에게 고급 벤까지 내주며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
최한별은 블리자드 길드 사무실이 있는 용산역 뒤쪽을 찾았다.
“쳇! 평소엔 한 번도 안 들리더니, 나태준 이야기에 바로 달려왔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어디 있어?”
“이야기가 긴데, 밥이나 먹으면서 할까?”
“아니, 여기서 해봐.”
김우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블리자드 길드장이 됐다곤 하지만 아직 위엄이나 진득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 나 A급 헌터 됐다.”
“알았어.”
“뭐야, 내가 먼저 A등급 헌터가 됐다고 축하해 주지도 않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두 달 전에 이미 A급이 됐어?”
“그럴 리가?”
“단지 등급 테스트만 받지 않은 거야.”
“그걸 누가 믿어?”
“안 믿어도 상관없고.”
김우리가 도끼눈을 떴다.
“쳇! 본론으로 들어가지. 살라딘 길드 알지?”
최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상 길드도 알고?”
“뜸 들이지 말고 계속해.”
살라딘은 대한민국 7위 길드였고, 거상은 9위 길드였다.
헌터라면 기본적으로 30위 이상의 길드는 전부 꿰고 있었다.
“그 살라딘과 거상이 붙었어.”
“붙다니?”
“싸웠다는 소리지.”
“게이트에서?”
“아니, 이 근방에서.”
“뭐?”
최한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우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게이트 밖에서 헌터들이 싸울 수 있지?”
“흐흐,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어서 몰랐지? 아주 살벌했다니까.”
김우리는 며칠 전 벌어진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길드끼리, 아니 헌터끼리 대결이나 전투는 게이트 안에서는 당연하였지만, 게이트 밖에서는 거의 싸우지 않았다.
헌터법 자체가 싸움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거상 길드의 선공으로 살라딘 길드 건물에 엄청난 마법과 엄청난 화력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살라딘 길드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하지만 7위의 길드답게 곧 흩어졌던 헌터들이 모였고, 헌터 거리는 치열한 전장이 됐다.
주변 건물이 무너지고, 다른 길드의 헌터들까지 싸움에 휩싸여 죽기까지 했고, 엄청난 난타전이 벌어졌다.
“국가 헌터원과 경찰, 군인들까지 파견됐지만, 싸움이 벌어진 장소엔 접근하지도 못했어.”
“왜지?”
헌터 협회에서 용산역 뒤쪽 일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 하루 만에 상황은 모두 끝났어.”
“누가 이겼지?”
“거상 길드.”
“9위가 7위를 이겼단 말이야?”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기습했다고 하지만, 수적으로 질적으로 살라딘 길드가 더 강했다. 그리고 영웅급 샤먼 살리딘을 접신했던 임영호가 길드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그는 S등급 헌터가 되면서 전설급 샤먼까지 접신했다고 들었다. 그런 자가 이렇게 쉽게 밀렸을 리가 없었다.
“이태성이 살라딘의 남은 헌터들을 모두 흡수하고 임영호는 실종 상태야. 그리고 거상이 단숨에 6위로 올라섰어.”
“그건 이상한데, 아무리 두 세력을 합쳤어도 둘 다 피해가 심각했을 텐데, 어떻게 순위가 오르지?”
“거상에 숨은 고수가 많았나 봐, 그리고 나태준 때문이기도 해.”
“뭐?”
갑자기 나태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숨어서 지켜본 헌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데. A급 헌터들을 그냥 막... 썰어버리고, 피가 튀고... 아무튼, 마지막에 임영호와 나태준이 2시간을 싸웠는데, 승부를 가리지 못했데. 결국, 이태성까지 합류하자 임영호가 밀렸다고 하더군.”
나태준이 국가 헌터원 등급 테스트에서 A급이 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상태창에 등급은 B급이라고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상식적으로 B등급이 S등급과 싸울 순 없었다.
유치원생이 아무리 잘 싸워도 어른을 이기지 못함과 같았다.
‘태준씨가 등급이 오른 건가.’
전에도 그랬다고 들었다.
C등급이었지만, B등급 헌터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B급 괴수를 일대일로 죽였다고.
태준이 A등급이 됐다는 것은 테스트 헌터 등급으로는 S급이 됐다는 말과 비슷했다.
김우리는 오랜만에 최한별을 만나 입에서 침을 튀기며 쉴새 없이 떠들었다.
하지만 최한별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연희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자신을 망가트리면서까지 그곳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태준씨 답지 않아!’
최한별이 갑자기 일어섰다.
“거상 길드가 어디지?”
***
[거상 길드]
“이런 미인이 거상 길드를 찾아 주다니 영광인데.”
“나태준 헌터를 만나고 싶습니다.”
“훗, 태준이를 만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어떡하지, 태준이는 여기 없는데.”
“그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최한별을 바라보는 이태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전에 태준이 팀이었다고?”
“네.”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싫습니다.”
“싫어?”
최한별은 단숨에 거절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싫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굳이 대라면 썩은 내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할까요?”
“뭐? 이년이! 미쳤나!”
이태성 옆에 있던 A급 헌터 윤중석이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주먹을 쥐었다.
그는 권법가 클래스 헌터, 주먹 한 번이면 머리통이 터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한별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만.”
이태성이 손을 들자, 윤중석이 뒤로 물러섰다.
“국가 헌터원에서 보낸 첩자라 그런지, 대담하군.”
“나는 첩자가 아닙니다. 그냥 태준씨를...”
“크큭, 네년이 국가 헌터원 헌터들과 A급 게이트를 공략한 것을 내가 모를까? 그런데 그냥 태준이를 만나러 왔다고?”
“그건 사실이지만, 나는 나태준 헌터를 만나러 왔을 뿐이다. 썩은 내 나는 당신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아!”
“B급 헌터라 들었는데, A급 헌터가 득실대는 곳에서 상대를 자극하다니, 목숨이 세 개쯤 되나 보지?”
“나를 해치면 나태준이 가만있지 않을걸.”
“호! 그래? 그걸 믿고 이렇게 대담한 건가?”
이태성이 비웃었다.
“대단한 팀원이야. 우리가 너를 해치면 나태준이 나와 길드를 버리고 나갈 거로 생각하나 봐?”
“맞아.”
“어리석긴 그가 왜? 내 옆에 있는지 알아? 그건 게이트 때문이야.”
최한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도 그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수경에게 들은 이태성은 불법 게이트를 사고파는 중개인이다. 그라면 얼마든지 태준에게 게이트를 제공하고, 그것을 빌미로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를 떠나면 태준은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어.”
“웃기지 마, 게이트는 국가 헌터원에도 있어.”
“크크큭! 몰랐군.”
“뭘 몰랐다는 말이지?”
“최규환과 이철용 패거리는 태준이 자기들 편을 100%들기 전까진 더는 게이트를 주지 않아.”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은 최규환하고 거래하고 있었기에 국가 헌터원에서 소개한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태준에게는 다른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철용이 우리에게 잘해주는 의도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우리 헌터 협회에서 게이트를 내주진 않을 거니까. 들어갈 게이트가 없는 거지. 그러니까 태준은 나를 떠날 수 없어. 알아?”
최한별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헌터 협회에 거상 길드만 있을까? 착각하지 마, 태준씨 실력이라면 더 큰 길드에 들어가서 게이트는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어.”
“크크큭! 착각하는 건 네년이야.”
이태성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내가 살라딘 길드를 접수하고도 왜 멀쩡한지 알아? 오히려 헌터 협회에서 나를 보호해줬지. 다른 신귀족 새끼들도 나를 못 건드려, 내가 없다면 게이트를 지금처럼 많이 확보할 수 없을 테니까.”
최한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게는 게이트가 어디서 뜨는지 미리 아는 방법이 있거든.”
그 순간 기태가 떠올랐다.
게이트가 발생할지 기태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태성이 기태와 같은 능력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네크로맨서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또 있나?
“그런데 그걸 왜 내게 말해주는 거지?”
“멍청하긴, 넌 여기서 나가지 못할 거니까.”
최한별이 입술을 깨물며 창문과 벽을 바라보았다.
“크크, 벽은 물론이고 창문까지 모두 강화 아이템이 발라져 있어. 살라딘 놈들처럼 폭사하긴 싫거든.”
그리고 이미 A급 헌터들이 그녀가 달아날 만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태준씨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글쎄, 이곳에서 네년이 죽은 걸 누가 알까? 그리고 나태준을 너무 믿는군. 그놈은 내 사냥개야. 사냥개는 쫓는 먹이가 있는 이상 주인을 물지 못해. 그리고 놈은 적당한 때에 제거할 거야. 그러니 먼저 죽는다고 해도 외롭진 않을걸.”
최한별이 이를 악물고 마법을 준비했다.
주변에 A급 헌터는 모두 여섯, 게다가 이태성은 S급 헌터였다.
이곳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태준에게 자신이 이곳에서 당한 것만큼은 어떻게든 알릴 생각이었다.
***
문밖에서 듣고 있던 김서라가 온몸을 떨었다.
입구를 지키던 길드원이 엄청난 미녀가 태준을 만나러 왔다길래 누군지 궁금해서 달려왔다가 소리를 엿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너무 놀라 화장실로 달려갔다.
혼란스러웠다.
이태성이 거상 길드의 영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나태준을 사냥개 취급하고 제거하려 하다니, 게다가 그의 지인까지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악당 같은 대사를 날리는 사람이 자신의 길드장인지 귀를 의심했다.
‘아, 어떻게 해야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태준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