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 내 식구를 건들지 마라(3)!
“쿠아아아아!”
사나운 포효(咆哮)가 대기를 울린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 괴이한 울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허!”
“백색의 마녀다!”
“와! 언제 봐도 믿기지 않는다니까, 사람이 어떻게 드래곤을 부려?”
소설에서나 나오는 드래곤.
그 거대하고 포악한 것이 사람의 명령을 들었다. 그것도 작고 연약한 여인의 명령을...
헌터 협회 건물 위로 거대한 백색의 드래곤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백색의 마녀라고 부르는 최민지가 도착한 것이다.
헌터 협회의 관계자들은 잔뜩 긴장했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헌터.
두 마리의 드래곤으로 괴수를 압살하며, 뭐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엎어버리는 포악한 성정의 그녀.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지?”
회의실로 들어오자마자,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최민지가 물었다.
“일단 앉지그래.”
비딱하게 앉아있던 도경수가 말했다.
최민지가 들어오자, 한 사내가 잔뜩 경계한 모습으로 그녀 뒤를 따라 들어왔다.
“헥토르는 밖에 두고 오지그래?”
그러자 최민지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싫은데, 내 새끼들이 없는 곳에선 나도 연약한 여자라고.”
“연약해? 어이가 없군. 네 몸에 두른 보호 장빗값만 수조 원이 넘을 텐데.”
“이런 것이 아무리 많아도 SS급 헌터에게는 한방이지?”
“왜? 내가 두렵나?”
“후후, 그 주둥이에 내 새끼의 얼음 브레스를 먹여줄까?
창밖에서 백색의 드래곤 기가테스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아니면 볼테우스의 전격 브레스도 괜찮고,”
반대 유리창에 블루 드래곤 볼테우스가 성난 이빨을 드러냈다.
도경수가 피식 웃었다.
“그만하지, 저놈들하고는 싸울 마음이 없어.”
최민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드래곤들이 사라졌다.
“야! 최민지! 네 새끼들 좀 멀리 치워! 건물 망가지잖아.”
김상국이 가장 늦게 들어오면서 투덜댔다.
최민지가 인상을 찡그렸다.
“망가지면 수리하면 되지. 돈도 많은 새끼가 그깟 일로 투덜대기는.”
“야, 저놈들이 발톱 한번 긁고 가면 수십억은 그냥 사라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바쁜 사람 왜 부른 거야?
최민지와 도경수가 김상국을 바라보았다.
오늘 회의는 김상국이 요청한 것이었다.
“그보다 일본 쪽 일은 잘돼가고 있어?”
“물론이지. 이번에 우리 측 요청을 거부했던 놈들을 모조리 솎아내고 있어.”
“일본 헌터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뭐, 나야 경험치 올리고 좋지.”
김상국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독하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헌터를 죽임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저런 무대포가 세계 최강이 되었으니, 누가 말리겠는가. 연희가 있을 땐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이번엔 김상국이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유럽 쪽은 어때?”
“그쪽이야 헌터들이 문제인가. 괴수와 게이트가 난리지. 미영이와 S급 몇 명 보냈으니까. 곧 잠잠해질 거야.”
“네가 직접 하는 건 어때?”
“시시하게 A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사양한다.”
“하긴, 경험치도 거의 오르지 않는 곳이니...”
이야기가 길어지자, 최민지의 이마가 살짝 좁아졌다.
“빨리 본론을 말하라고.”
“좋아.”
김상국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불이 꺼지며 창문과 벽에 모니터가 켜졌다.
“먼저 이철용 문제야.”
이철용의 이름이 나오자, 최민지와 도경수도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뉴스 봤겠지만, 이철용이 국가 헌터원의 원장이 되면서 전면으로 나섰어. 그리고 그의 똘마니 최규환과 노병원 등도 모두 국가 요직에 앉았지.”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철용을 치자는 거야?”
최민지는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지금 그놈에게는 군대와 정치인들이 있어, 전면전을 벌이면 최소한 우리 중에 둘의 세력을 모두 움직여야 이길 수 있어.”
“그러면 되지.”
“그럼 너와 도경수가 움직일 거야?”
“뭐?”
“그리고 우리가 움직이면 반드시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귀족 놈들도 움직일 거야. 그럼 우리 셋이 모두 움직여야 이길 수 있어.”
“아씨, 그러니까 귀족 새끼들을 진작 씨를 말리자니까. 그날 다 죽였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이미 지난 이야기를 해서 뭐해. 그때 연희를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최민지 네가?”
이연희 이야기가 나오자, 최민지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그년은 죽어서도 짜증나게 하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헌터 협회 힘을 하나로 뭉치자는 거지.”
“지금은 하나가 아니란 말이야?”
“솔직히 다들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잖아.”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스쳤다.
다들 일인자가 되기 위한 플랜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당장 실행했다가는 다른 두 사람의 견제를 받아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지금 당장, 대표를 두고 하나로 뭉치자는 건 아니야.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대응 체제를 만들자는 거지. 오늘만 봐도 그래 우리 세 사람이 이곳에 모이는데 얼마나 걸린 거 같아?”
“반나절? 하루?”
최민지 대답했다.
김상국이 피식 웃었다.
“아니 사흘이야. 이래선 적들이 하나로 뭉쳐서 공격하면, 각개 격파당하기 딱 좋지.”
도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네 말대로 조금 더 긴밀한 연락 체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경수는 이해했군.”
두 사람이 최민지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어쩌자고? 우리끼리 바로 연락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오랜만에 민지가 옳은 말을 했군. 헌터 협회를 통하지 않고, 우리끼리 연락도 하고, 각 사무실과 지휘부의 헌터들과도 서로 연락망을 구축하는 거야.”
“괜찮은 생각이군.”
오랜만에 세 사람의 뜻이 하나로 합쳐졌다.
과거 헌터협회는 수십 개로 쪼개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커다란 세 개의 덩어리로 만든 것이 이들이었다. 이들이 진작 힘을 합쳤다면, 귀족이나 국가 헌터원이 이렇게 커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좋아! 결정됐군. 난 헥토르를 남겨두지. 그와 상의해서 결정되면 말해줘.”
최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아직 안건이 남았다고.”
“또 뭐야?”
“이태성, 그놈 이야기야.”
최민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새끼, 또 사고 쳤어?”
“그래 이번엔 아주 커. 임영호와 살라딘 길드를 쳤어. 그것도 헌터 사무실이 밀집한 용산 헌터 거리에서.”
“미친 새끼.”
헌터 협회는 헌터법을 준수했다. 적어도 게이트 밖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헌터 협회 전체를 흐리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 헌터원하고, 경찰과 청와대까지 소명하라고 난리야.”
“그놈 그냥 죽이면 안 되나?”
최민지의 말에 이번엔 김상국과 도경수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게이트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커. 국가 헌터원은 군대와 경찰을 지휘하고 있으니, 인력이 우리의 수천 배 이상이야. 그걸 누르고 우리가 게이트를 2배 이상 확보하는 건 모두 그놈 때문이야.”
“휴, 죽이지도 못하고,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할까?”
“다들 그놈을 알잖아, 죽더라도 절대 입을 열 놈이 아니야.”
“그럼 어쩌라고?”
“내가 그놈의 비밀을 캐볼게.”
김상국이 말하면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너희가 허락하면 말이지.”
두 사람은 김상국의 예상대로 의심 어린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김상국이 이태성의 비밀을 캐고, 그의 세력을 흡수한다면, 게이트가 김상국의 손에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단숨에 단독으로 치고 올라갈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야.”
최민지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후후,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럼 다시 제안하지, 그놈을 감시할 팀을 만드는 건 어때? 우리 세 사람이 믿는 사람을 뽑아서 말이지.”
“하지만 놈이 우리가 감시하는 것을 안다면, 더욱 깊숙이 숨길 텐데.”
“소수 정예로 움직이면, 모를 거야. 이태성의 비밀을 캐야 더는 놈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야.”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결정이 곧 헌터 협회의 결정이다.
“오늘 안에 사람을 보내지.”
“나도.”
“오랜만에 의견이 맞으니 좋네.”
“이제 정말 끝난 거지?”
“아직 서윤아 실종과 나태준의 안건이 남았는데.”
“서윤아 그년이야 병신 같으니까, 누군가 죽였을 거고, 나태준은 왜?”
최민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뭔가 싫으면서도 조금은 안타까운 느낌이라고 할까.
“나태준이 요즘 너무 두각을 보이고 있어서 말이지.”
“우리에게 위협적인 수준이야?”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A급 헌터 하나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번엔 도경수가 일어났다.
“그런 거면 김상국, 너 혼자 처리해도 되잖아.”
“그래?”
최민지도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네가 알아서 해.”
“알았어.”
두 사람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이 많아서 좋긴 한데... 나태준 이놈은 어쩌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김상국의 그림자였다.
“그를 이용해 최민지를 흔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나태준이라... 일단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할까.”
***
최한별이 거실 소파에 힘겹게 앉았다.
“아고, 아이고 죽겠다.”
“무슨 20대 처녀 입에서 60대 할머니 앓는 소리가 나?”
부엌에 있던 윤상희가 놀렸다.
“뼈가 열여섯 개나 부러졌다고요.”
“나야말로 게이트에선 괴수 잡고, 여기선 집안 살림까지 해야 하니까 죽을 맛이다. 가정부를 하나 구하든지 해야지.”
“수진이는 어디 갔어요?”
“곧 올 거야. 아침에 태준씨와 창수씨가 활 사러 데려갔어.”
“활이요?”
수진이의 활은 유니크 급이었다.
지금 활을 산다는 것은 레전더리 급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진이도 돈을 꽤 벌었죠?”
“그렇긴 하지만, 레전더리 급을 살만큼은 아닐걸.”
“그럼 태준씨가 또?”
“그렇겠지. 전에 우리 장비도 모두 태준씨가 해준 거잖아.”
“그렇군요.”
최한별도 전에 아이템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마법사라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적인 무기를 쓰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저 근접 전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체력 관련 아이템과 마나 관련 아이템이었다.
“나도 슬슬 도끼를 알아봐야 하는데.”
“레전더리 급으로 사려고요?”
“그러고 싶긴 한데, 역시 돈이 문제겠지.”
“얼마나 있는데요? 제가 빌려드릴게요.”
“하지만 한별이도 아이템을 사야 하잖아.”
“전 이미 충분히 있어요.”
“그래? 그럼 그럴까.”
윤상희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A급 헌터가 되더니 온몸의 근육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라, 뒷모습만 보면 머리긴 남자라고 할 정도였다.
“다녀왔습니다.”
지하 헌터 시장에 갔던 일행이 우르르 들어왔다.
“저 활 샀어요.”
혼자만 아직 B등급 헌터였기에 의기소침했던 수진이가 인벤토리에서 붉은빛이 번쩍이고 영롱해 보이는 활을 꺼냈다.
“수진이는 좋겠네.”
“네! 이걸로 어서 A등급으로 올라야죠.”
수진이가 떠들기 시작하자, 집안의 분위기도 좋아졌다.
태준이가 최한별에게 다가갔다.
“몸은 이제 괜찮아?”
“보다시피, 멀쩡해요.”
최한별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태준이 다가가 최한별의 팔과 뼈를 만지기 시작했다.
“뭐 좀 알고 하는 거야?”
“이제 인체에 대해서는 대충 알 것 같아요.”
사람의 신체는 괴수와 달랐다.
전에는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헌터들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체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었다.
기태가 갑자기 최한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어? 한별이 이모 어디 아픈가 봐?”
“응? 왜?”
“얼굴이 빨개.”
“뭐?”
최한별이 창피한지 갑자기 팔을 내리더니 말했다.
“이, 이제 괜찮다니까요.”
“화낼 기력이 있는 거 보니까 다 나았군.”
태준이 웃자, 다들 웃기 시작했다.
“그럼 한별이도 괜찮아졌으니까, 본격적으로 놈을 잡고 게이트를 공략할 작전을 짜야지.”
“그런데 놈이라니요?”
“이태성 말이야.”
“네? 저 때문이라면, 이제 괜찮아요.”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나도!”
“나도 그놈을 가만둘 수 없어요.”
옆에 있던 팀원들이 전부 잔뜩 흥분했다.
“하지만 꼭꼭 숨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찾아요?”
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놈은 불법 게이트를 중개하면서 큰 이득을 챙기는 놈이야. 우린 그놈이 찾은 불법 게이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잖아.”
창수와 기태가 만든 내비게이션 같은 레이더를 흔들어 보였다.
“이 기계로 게이트 몇 개만 가로채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걸.”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