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 헌터, 이름을 날리다(3).
전투, 전쟁, 싸움에 있어서 환경이란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태준 팀원들은 이미 익숙해진 장소에서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태성도 베이스 캠프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진한 안개가 스멀스멀 베이스 캠프를 덮자, 이태성이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차디찬 안개라... 최한별이군.”
바닥에 낮게 깔린 안개 사이에서 최한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내가 나타나서 실망했나?”
“하하! 실망은, 미인이 찾아와서 오히려 반가운걸.”
“태준 오빠 말이 부하들은 사지에 몰아놓고, 혼자 이곳에서 숨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사실이었어.”
가벼운 도발에 이태성은 웃음으로 넘겼다.
“후후후. 사지에 몰다니? 말은 바로 해야지. 태준이 그놈이 사지에 있는 거야.”
“태준 오빠가 무섭나 보지?”
이태성은 갑자기 무슨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솔직히 조금 그래, 그 새끼가 임영호와 싸우는 걸 숨어서 2시간이나 지켜봤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술을 쓰는 거야. 게다가 A급 헌터 답지 않게 너무 강하니, 직접 싸우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지.”
“변명도 참 비겁하게 하는군.”
말을 하면서 최한별이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변명이라니? 다들 좋은 무기를 쓰고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싶어 하잖아. 그게 곧 자신의 실력 향상과 연결되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가진 돈은 하나의 아이템이지.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 헌터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나 대신 싸우게 하는 게 어째서 비겁한 거지?”
거리를 좁히던 최한별이 자신이 만든 얼음 안개가 갑자기 불규칙적으로 움직이자, 인상을 찡그리며 멈춰섰다.
“땅속에 언데드 소환수를 숨겨 놓은 것도 비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겠네.”
“크큭. 알아챘군. 적을 죽임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거지.”
이태성이 바닥을 향해 소리쳤다.
“어둠의 군단이여! 일어나라!”
쩌저저저적! 파파팟!
땅이 갈라지고, 그 아래서 수십 개의 칼날이 땅을 뚫고 삐져나왔다.
최한별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앞으로 지나갔다가는 저 칼날에 난자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퍼런 해골들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끄으으으!”
“끄으윽!”
크고 강인해 보이는 푸른빛의 해골 모습을 본 최한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크크크. 어떠냐? 내 용아병을 본 소감이?”
“용아병이라고?”
“그래 이번에 큰돈을 들여 구매한 놈들이지.”
[용아병(龍牙兵) - 스파르토이(Spartoi), 죽은 용의 이빨에서 태어난 해골 전사. 뼈에서 푸른 빛이 돌며, 용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받아 잘 죽지 않는다.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며, 소환한 네크로맨서가 목표물을 지정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는 집요한 놈들이다.
뇌가 없는 스파르토이는 주인의 성격을 닮는다.]
그런 용아병이 언뜻 봐도 수십 마리가 넘었다.
이것들은 이태성이 혹시 모를 나태준과의 대결을 위해 3천억이란 거금을 주고 구매한 레전더리 급 언데드 소환수였다.
“나의 전사들이여! 나의 적을 죽여라!”
따각!
용아병들이 최한별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진 그들은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칼과 방패를 들었다.
“끄아아아!”
용아병들이 달려들자, 최한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쉬운 싸움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모조리 박살을 내주마!’
그녀가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스 필드!”
차디찬 안개가 바닥으로 내려오며 용아병이 달려오는 땅에 얼음이 얼었다.
그러자 앞서 달리던 용아병들이 미끄러지고,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이스 블라스트!”
뒤를 이은 최한별의 스킬이 펼쳐졌다.
파파파파파팍!
얼음판 위로 얼음 창과 지독한 서리 기운이 위로 솟아올랐다.
빠직! 파직!
용아병들의 몸이 얼고, 얼음창에 뼈가 박살이 났다.
“오호! 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군!”
이태성 감탄사를 연발했다.
최한별의 실력이 전에 사무실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의 뾰족한 얼음창에 순식간에 여섯 마리의 용아병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직 그는 여유가 있었다.
***
푹!
“크악!”
헌터 하나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저기다!”
“쫓아라!”
현상금 300억짜리 B급 헌터가 고대 사원과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뭐가 저렇게 빨라!”
헌터들이 거리를 좁히면 한수진은 어느새 다른 곳에 서 있었다.
퍼엉!
“크윽!”
“화살이 터지다니...”
C등급, B등급 헌터들은 속절없이 그녀의 화살에 쓰러졌다.
A급 헌터들도 깜빡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기에 단단히 주의해야 했다.
고대 사원인지, 고대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퇴로는 없었다.
이태성이 보낸 헌터들은 커다란 포위망을 구축했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입했다.
헌터들은 한수진의 계속된 견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쌍년, 저년은 내가 죽인다!”
투타타타타탕!
A급 헌터의 마력 소총이 불을 뿜었고, 총알 하나마다 수천 도의 열을 발산시키는 화염 소이탄(燒夷劑)이 매섭게 날아갔다.
소이탄은 돌로 된 건물을 박살 내고, 나무를 태워버렸다.
다른 원거리 헌터들도 포위망을 유지하며 거리를 좁히는 대신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는지, 화력을 집결시켰다.
화살이 날아가고, 마법이 번쩍였다.
펑! 파파파팍
마법사의 얼음 화살이 날아가 나무에 박힐 때마다 그 주변이 얼어버렸다.
하나만 몸에 박혀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또 사라졌다!”
“제길, 어디 있는 거야?”
하지만 맞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었다.
다른 건물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수진이 화살을 쏘았다.
패앵! 패앵!
“커헉!”
추격하던 헌터 하나가 화살에 목이 뚫리며 쓰러졌다.
“저, 저기다!”
“죽여라!”
그렇게 300억짜리 한수진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오우거를 보내!”
“다른 소환수도 모두 공격시켜!”
거대한 세 마리의 오우거와 소환된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쿠아아아아아!”
엄청난 포효와 함께 블랙 드래곤 카올렌의 꼬리가 휘둘리자, 오우거 한 마리가 꼬리에 맞고 날아가 다른 소환수를 덮쳤다.
“제길, 드래곤을 부리는 놈이 있다는 말은 전혀 없었잖아!”
“아래쪽에서 계속 밀어붙여. 내 와이번이 위에서 공격할게.”
하늘 위를 날던 두 마리 와이번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아래로 급강하했다.
그들은 위에서 달려들었고, 아래쪽에선 오우거나 리자드맨, 버그베어 등의 몬스터가 카올렌을 공격했다.
소환수들의 연합 공격에 블랙 드래곤도 이번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퀘에에엑!”
콱! 콰직!
와이번의 이빨이 드래곤의 날개와 뒤덜미를 물었다.
아래쪽에서 달려들던 몬스터들은 드래곤의 발톱과 이빨, 꼬리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위에서 공격한 두 와이번의 공격은 성공한 것이다.
“됐다! 공격해!”
“죽여라!”
이번엔 사방에서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그때 이수호가 날개를 문 와이번을 향해 창을 겨눴다.
창끝이 두 갈래로 나눠진 특이한 모양이었고, 유니크 급이었지만, 이번에 큰 괴수를 잡기 위해 특별히 장만한 것이었다.
“내 드래곤에게서 떨어져!”
푸푸푹!
수호의 창이 날개를 문 와이번의 목과 가슴, 옆구리에 연이어 박혔다.
와이번은 피를 흘리며 아래로 떨어졌고, 날개가 자유로워지자, 카올렌이 긴 날개를 펴며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자기 목덜미를 문 와이번의 몸통을 발톱으로 잡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와이번의 몸통을 뚫고 들어가자, 와이번이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며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블랙 드래곤은 멀지 않은 사원 위에 내려앉았다.
“놈이 달아난다. 쫓아라!”
만약 이 위치에서 브레스를 뿜을 수 있었으면, 한 번에 많은 헌터들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
일본 헌터 50여 명은 나태준을 쫓고 있었다.
그들이 사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태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늪을 향해 달렸다.
“너희는 미리 가서 앞을 차단해!”
“네!”
“나머진 놈을 쫓는다!”
암살자 중에서 발이 빨라지는 스킬을 가진 10여 명의 헌터들이 태준을 막기 위해 다른 길로 달렸다.
일본 헌터들의 표정은 다른 누구보다도 진지했으며, 그들 역시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일본 헌터 협회는 지금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S급 게이트가 발생할 당시 대한민국 헌터 협회에서 일본 헌터 협회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일본 헌터 협회에서는 이연희나 김득구 같은 아웃사이더 몇 명과 힘없는 길드에서 몇 명을 추려 보낸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이들이 S급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모두 헌터 등급이 올랐다는 것이다.
특히 2명의 S급 헌터가 SS급이 되면서 막강한 힘이 생겼고, 다른 A급 헌터들도 S급이 됐으니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S급 게이트 공략이 끝나자마자, 하나로 뭉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일본 헌터 협회의 실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에 백색의 마녀 최민지가 있었다.
이곳에 온 50여 명은 일본 헌터 협회 소속이었고, 최민지와 그 일당들을 피해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태성이 헌터 협회에서 힘은 약할지 몰라도 이사로 있었고, 최민지나 다른 실세 헌터들이 건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번에 나태준을 처리하는 조건으로 돈 대신에 자신들이 한국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물론 당분간 이태성의 그늘에 있어야겠지만, 일본보다는 한국이 더 안전했고, 이태성은 게이트까지 제공할 수 있었으니, 조용히 힘을 기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피웅! 펑!
“앞을 막았다는 신호가 올라왔습니다.”
“좋아, 포위망을 좁히며 따라 붙는다.”
태준의 앞으로 십여 명의 헌터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암살자들!
은신에 특화된 자들로 두 명을 빼고는 모두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잡았다!”
“개새끼, 어딜 달아나려고.”
그들의 입에서 능숙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태준이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겠어.”
“뭐?”
그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함정을 판 자신들에게 달려들지도 않았다.
태준이 천천히 인벤토리에서 괴수 고기 하나를 꺼냈다.
“섭취(攝取)!”
거대한 악어 괴수 암무트(B)의 고기를 씹어 먹었다.
S급 괴수 린드부름을 늪의 지배자라 불렀다.
하지만 이 린드부름이 없는 곳에서는 암무트가 늪의 지배자였다.
암무트는 B급 괴수였지만, 커다란 체격과 엄청난 치악력으로 A급 괴수까지 사냥할 정도로 늪에서는 독보적인 놈이었다.
다만 땅 위로 올라가면 느린 다리 때문에 헌터들의 밥이나 다름없었다.
“저기다! 포위해!”
뒤에서 추격하던 헌터들까지 달려왔다.
순식간에 겹겹이 포위당했다.
이젠 달아날 틈 같은 건 없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그런데 태준이 갑자기 늪 속으로 사라졌다.
“헉!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늪으로 들어갔잖아.”
“미친놈, 자살한 건가?”
“아니야! 곧 튀어나올 거야. 주변을 샅샅이 뒤져!”
암살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태준을 기다렸다.
그들은 참을성이 많았고, 기척까지 죽이며 목표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달이 거대한 늪을 비추고 있었지만, 워낙 우거진 곳이었기에 시야는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으헉!”
짧은 비명과 함께 옆에 있던 동료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뭐야? 야마토, 장난치지 마. 어디로 간 거야?”
야마토가 사라지자, 켄타는 검을 고쳐 쥐었다.
이 근방에 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따끔거리더니 발밑이 시큼했다.
그가 발을 들어보았다.
“으아아! 내 다리!”
살은 어디 가고, 자신의 무릎 아래가 뼈만 남아 있었다.
충격과 공포가 물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