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 헌터, 이름을 날리다(5).
태준은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제발 무사하길...’
린드부름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린드부름과 A등급 일본 헌터들이 서로 치열한 싸움 끝에 린드부름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S급 괴수 린드부름은 늪에선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의 비명, 그 공포에 찬 울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이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인간들의 비명이 그쳤고, 뒤를 쫓아오는 거대하고 빠른 존재를 느꼈다.
늪에 사는 거대 악어 암무트(B)의 고기를 섭취해, 괴수의 능력을 발휘하며 달리고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따라잡혔고, 린드부름과 일전을 피할 수 없었다.
높은 완벽한 하나의 난공불락의 성처럼 느껴졌다.
40명이 넘은 A급 헌터를 겨우 10여 분만에 전멸시켰으니 그 강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물속에서는 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고, 늪 밖으로 나오면 놈이 독가스를 뿜어내는 통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자신은 A급 독 수련자의 업적까지 있었다.
하지만 S급 괴수인 린드부름의 독과 산성 가스는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상의는 전부 산성 가스에 사라지고, 맨몸으로 싸우고 있었다.
린드부름의 약점을 파악하고, 죽기 살기로 싸울 수 없었기에 더 힘들었다.
자신이 늦으면 늦을수록 동료들이 위험에 빠진다.
머릿속에 그런 걱정이 가득했으니 놈과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온몸에 독가스가 노출되고 놈의 날카로운 발톱과 꼬리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나 끈질기게 버티고 달아나자, 곧 땅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엔 이곳에서 놈과 결단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린드부름은 물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태준은 일행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제길, 너무 많이 지체했어!’
퍼엉! 화르르르르!
멀리 붉은 빛이 번쩍이고, 시커먼 화염이 달빛을 향해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살아 있구나!
조금은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자, 피라미드 같은 사원 위에서 커다란 도끼를 든 전사가 몰려오는 헌터들을 맞이해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윤상희였다.
순간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복받쳤다.
“으아아아아!”
[도살자의 포효(lv3)가 발동됩니다.]
[도살자의 포효 - 상처 입은 괴수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는다. 데미지 50% 이상의 괴수에게 50%의 확률로 상태 이상을 만든다.
상태 이상에 걸리면 이동 속도 50% 저하, 출혈 증가.]
상대는 인간이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살자의 포효가 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성공이었다.
“나태준이다!”
“놈이 저기 있다!”
“모두 나태준을 잡아라!”
지휘부 헌터들이 소리를 지르자, 사원을 둘러싼 헌터들이 방향을 바꿨다.
헌터들이 나태준을 죽이기 위해 몰려갔다.
방금 헌터 셋을 몰아붙였다고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저놈을 죽여라!”
“나태준, 레전더리 아이템을 내놔라!”
“와아아아! 죽여!”
태준은 백정의 칼과 쇠사슬을 뺀 갈고리를 들었다.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헌터들을 보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욱! 후욱!”
그리고 괴수 백정 스킬인 도살자의 눈을 실행하기 위해 그 느낌과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도살자의 눈이 발동돼 S급 괴수 블랙 드라칸의 약점을 찾아냈었다.
거대 개미 안탈리안 여왕을 상대할 때 처음으로 개안(開眼)한 스킬 도살자의 눈.
하지만 항상 발동되진 않았다.
‘이 순간 나는 진정한 도살자가 된다.’
마음을 다잡는다.
도살자의 눈은, 죽을 고비에 빠지거나 정말 절실하게 괴수를 죽이고 싶었을 때만 발동되었고, 발동되는 순간 괴수의 몸속을 볼 수 있었다.
괴수의 혈관을 볼 수 있었다.
괴수의 뼈와 근육을 볼 수 있었다.
괴수의 심장과 내장을 볼 수 있었다.
살아서 생명 활동을 하는 괴수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동료들을 공격했을 자들에 대한 분노가 끌어 오르고, 괴수를 죽이며 느꼈던 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도살자(屠殺者)의 눈이 발동됩니다.]
됐다!
달려오는 자들의 발소리, 거친 숨소리, 심장이 뛰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네놈의 목은 내 것이다!”
가속 능력을 극대화한 자신의 대도를 내려찍는 헌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나태준이 무방비로 서 있었으니, 그를 죽여서 얻는 엄청난 행운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태준이 눈을 떴다.
“헉!”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턱!
게다가 자신이 내려친 대도는 태준의 갈고리에 걸렸다.
그리고.
“헛!”
그저 눈앞에서 빛이 번쩍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난 15년간 대도를 잡았던 두 손이 사라졌다.
“내 손? 으아아아악!”
몰려드는 헌터들을 향해 백정의 칼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찔러지는 창을 갈고리로 밀고, 칼을 그었다.
상대의 손목이 잘렸다.
뒤에서 검이 찔러지자, 몸을 회전하며 흘리고.
“절야(折也)!”
서걱!
“크아아악!”
검을 든 팔이 뼈째 잘렸다.
태준이 몸을 낮췄다.
반원을 그린 칼과 수직으로 그은 갈고리가 동시에 휘둘렸다.
“크헉!”
칼은 헌터의 다리를 잘랐고, 쓰러지는 그의 목을 향해 갈고리가 찍었다.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헌터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도살(屠殺)!”
“으악!”
“난도(亂刀)!”
“끼악!”
백정의 칼과 갈고리가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럴수록 비명은 늘어갔고, 헌터들은 뭔가 크게 잘못됐다고 느껴졌다.
“으아악! 내 다리!”
팔과 다리가 잘린 헌터들은 바닥에 쓰러져 비명과 함께 울부짖었다.
“저, 저리가!”
“살려줘!”
급기야 뒷걸음질 치는 헌터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C급과 B급 헌터들은 아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 소환수를 보내라!”
오우거 한 마리가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촤악! 쿵!
하지만 단 일격에 발목이 잘리며 쓰러졌고, 쓰러진 오우거의 목에 칼이 그어지며, 강제 귀환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야!”
“저건, 인간 도살자다!”
태준은 사원을 향해 달리며 무기를 휘둘렀다.
모세의 기적처럼 헌터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블랙 드래곤이 포효했다.
“쿠아아아아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드래곤이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트롤과 오우거들을 뿌리쳤다.
그리고 사원을 오르며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에 맞은 골렘들이 박살 나고, 드래곤은 끝부분에 멈춰 서더니 건물을 향해 앞발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그리곤 몇 번 만에 천장을 뚫어 버렸고, 손을 뻗었다.
“으아악!”
드래곤의 발에 딸려 올라온 헌터가 비명을 지르다가 몸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블랙 드래곤 브레스!
“끄아아아아악!”
그 녹색의 화염이 헌터들과 달려드는 소환수를 향해 뿜어졌다.
“피해라!”
“끄아아아!”
브레스는 순식간에 살을 녹이고, 뼈를 태운다.
블랙 드래곤 카올렌은 전투 중 단 한 번도 브레스를 뿜은 적이 없었기에 헌터들은 방심했고, 그 방심은 대량 살상을 만들어 냈다.
‘수호가 해냈구나!’
블랙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던 태준은 눈물이 핑 돌았다.
늘 열심히 따라오던 이수호.
위기도 많이 겪었고 실망할 일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고, 남들이 자는 시간에도 훈련했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소환수와 교감을 나누었다.
그렇게 노력을 하더니 드디어 드래곤을 뽑았고, 이젠 브레스까지 뿜어냈다.
A급 소환술사라고 해서 모두 최민지나 이수호처럼 드래곤을 뽑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고났든 길러졌든 감응(感應)력 수치가 매우 높아야 했고, 소환된 드래곤과 소환술사가 교감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비싼 돈으로 룬을 구매했어도 드래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드래곤 소환에 성공했어도 실제 전투에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고, 유니크 등급의 소환수보다 못한 경우 허다했기에, 최민지 같은 드래곤을 소유한 소환술사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크헉!”
콰직!
카올렌이 몸을 날려 브레스를 피한 헌터의 다리를 물었다.
그리곤 공중에서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헌터는 다리가 잘린 채로 몸이 날아갔고, 블랙 드래곤은 닥치는 대로 헌터들을 공격하고, 발광했다.
카올렌은 지금 무척 분노하고 있었다.
“크, 큰일인데? 이제 어쩌지?”
이태성의 지휘부 헌터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C급, B급 헌터들은 이미 사방으로 줄행랑을 쳤고, A급 헌터들도 나태준의 잔혹함에 고개를 흔들며 하나둘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드래곤이야 힘을 합쳐 죽이면 되지만, 저 나태준은 막을 길이 없어.”
“맞아! 벌써 절반 이상이 당했어.”
A급 헌터들이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 있었다.
이제 그들의 전멸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일단, 베이스 캠프로 후퇴하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이태성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아니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하긴...”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태준이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크헉!”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고리가 헌터의 목에 박혔다.
그리고 나태준이 손을 뻗자, 헌터가 그에게 끌려갔다.
“제길, 달아나!”
“저놈은 괴물이야!”
지휘부 헌터들까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남아서 저항하던 헌터들도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났다.
그렇게 치열했던 사원 앞에서의 전투는 끝이 났다.
하지만 아직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태준은 급하게 사원 위로 올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큭!’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 사지가 잘린 시체가 가득했다.
“상희씨!”
“수호야!”
“수진아!”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다.
“상희씨?”
파괴의 날을 들고 윤상희가 태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크아아아!”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태준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치이익!
빠르고, 엄청난 일격에 뒤로 밀려났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피를 원하는가?”
온통 피범벅에 귀신같이 변한 윤상희,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죽어라!”
“허!”
그녀는 이미 파괴의 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상황을 끝낼 방법은 하나였다.
태준이 윤상희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태앵!
휙휙휙휙! 푹!
파괴의 날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윤상희가 힘없이 쓰러졌다.
태준은 몸을 날려 윤상희를 안았다.
그리고 바닥에 눕혔다.
그때 통로에서 수호와 수진이가 나왔다.
“헛! 상희 언니!”
수진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려갔다.
그러자 윤상희가 눈을 떴다.
“언니, 괜찮아요?”
윤상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태준이 말했다.
“괜찮을 거야. 워낙 튼튼한 양반이잖아.”
“크윽! 그게 무슨 소리야. 곧 죽을 것 같은데.”
윤상희가 악을 썼다.
“봐봐, 괜찮을 거라 그랬지.”
태준은 말을 하면서 인벤토리에서 생수를 꺼내 그녀의 얼굴과 몸에 뿌렸다.
“으윽!”
피를 닦아내자,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보였다.
“참, 지독하게 당했네요.”
“큭! 그거야 태준씨가 늦어서 그렇지.”
태준이 목에 걸린 회복의 목걸이(유니크)를 꺼내 윤상희의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오다가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담부턴 늦지 않을게요.”
“상희 언니 고마워, 언니가 나를 지켜줬구나.”
수진이가 지독하게 당한 윤상희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니야, 수호가 너를 지켰어.”
“응? 수호 오빠가?”
수진이가 두어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수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수호가 쑥스러운지 바닥에 떨어진 헌터들의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태준이 상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왜 나를 공격한 겁니까?”
“그거 이 파괴의 날 때문에 그래, 머릿속에선 멈춰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몸이 안 따라주더라고.”
“그럼 그 힘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때까지...”
“잠깐 쓰지 말까?”
“아니, 계속 써서 극복해야죠.”
다들 무사한 것을 봤으니, 이제 안심이 됐다.
태준이 일어섰다.
“난 지금 한별이한테 갈 테니까. 여기 잘 정리하고 따라와.”
태준이 입구를 박살 내고, 이태성과 싸우고 있을 최한별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