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96화 (96/149)

# 96

96.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2).

보안 팀장 이준상은 A급 헌터다.

지난 3년 동안 이 거대한 신화 길드의 본부를 지켰고, 사고율 0%를 자랑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누가 세계 최대 규모의 신화 길드에 와서 깽판을 치겠는가.

그는 팀장실에서 느긋하게 오늘 밤에 만날 엘프들의 야한 동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침입자가 있다는 다급한 보고를 받았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뭐? 침입? 자세히 이야기해봐?”

“누군가 로비에서 우리 보안헌터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준상이 보고를 받고 통제실로 이동했을 땐, 이미 삼십여 명의 보안요원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겨우 둘이네, 겁도 없군. B급 보안헌터들을 출동시켜.”

“저... 지금 쓰러져 있는 헌터들이 B급 요원들입니다.”

“뭐?”

다시 모니터를 보자, 검정 체육복을 입은 자가 B급 헌터들을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솜씨가 너무 간결하고 빨라 사내의 손이나 다리가 움직이는 순간 요원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제길, 내 무결점 기록도 끝이군. A급 보안요원들도 로비로 출동시켜!”

“네!”

이준상도 A급 헌터들과 로비로 달려갔다.

“으아악! 내 다리!”

B급 요원 하나가 다리가 부러지며 지른 비명에 로비가 술렁였다.

“무기 사용을 허가한다! 모두 무기를 꺼내라!”

모여 있던 헌터들이 무기를 꺼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무기를 꺼내? 신화 길드는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는 건가?”

보안 팀장 이준상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손님이라니? 우리 요원을 먼저 공격한 것은 너다.”

“내 몸을 보호했을 뿐.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

그러고 보니 상대는 로비 앞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B급 헌터들을 맨손으로 제압했다.

이건 최소 A급, 아니 S급의 실력에 필적하는 솜씨였다.

“당신은 누구지?”

“나는 나태준이다. 김상국을 만나러 왔다.”

“뭐요? 당신이 나태준 헌터라고?”

이준상이 검을 거뒀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나태준의 얼굴은 확실치 않았지만, 그 뒤쪽에 있는 최한별의 얼굴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여자라면 100m 전방에서도 미인을 알아보는 그의 눈썰미였다.

최한별처럼 보기 드문 미인은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물러서라!”

나태준이라면 거상 길드를 박살 내고,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해 전국에 알려진 유명인사였다.

게다가 김상국 길드장과 동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길드장님께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이준상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받아라!”

날카로운 검을 들고 한 헌터가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얼음 장벽!”

태준 앞으로 두꺼운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헌터는 멈추지 않았다.

헌터의 검에서 빛이 뿜어지며, 얼음벽을 향해 휘둘렀다.

촤악! 파팍!

그 두꺼운 얼음이 검에 잘렸고, 무너졌다.

“이얍!”

헌터가 태준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태준은 백정의 칼을 꺼낸 후였다.

카앙!

‘윽!’

태준이 칼을 위로 휘두르자 칼과 검이 부딪쳤고, 엄청난 힘에 헌터가 뒤로 한 바퀴 회전하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호오! 힘이 제법이네.”

태준이 방어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여자였다.

짧은 단발에 몸은 호리호리하고, 말투와 얼굴선이 한국 사람 같진 않았다.

그리고 방금 일격으로 상대의 실력의 자신보다 결코 아래가 아님을 느꼈다.

“타룬 메이 헌터님, 이 사람은 길드장님의 손님...”

이준상이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타룬 메이는 이미 달려들고 있었다.

“히히, 하지만 싸움은 힘만으로 이기는 건 아니지.”

검에서 백광이 번쩍이며, 빠르게 휘둘렀다.

“번개검!”

캉! 카캉!

그녀의 검을 받을 때마다, 백광과 붉은 불꽃이 번쩍였다.

타룬 메이의 검이 순식간에 여러 번 휘둘렸고, 태준은 일일이 받아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파파팍!

검이 찔러오자, 그 끝에서 한 뼘이나 되는 백광이 뿜어졌다.

태준이 칼로 막고 옆으로 피하자, 검은 바닥을 찌르고 로비 안내 테스크를 박살 냈다.

“오, 몸놀림도 제법이네.”

사실 이 말은 그녀의 검을 받는 태준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타룬 메이는 몸놀림은 매우 빨랐고, 통통 튀는 공 같은 탄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어지럽고 현란했다.

태준이 자신의 찢어진 상의 체육복을 보더니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상의를 벗고는 조각같은 근육을 드러내며 칼을 타룬 메이에게 겨눴다.

“히익, 제대로 할 마음이네, 좋았어! 나도 그럼 실력을 발휘해 볼까.”

타룬 메이의 신형이 흐려졌다.

그녀는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낮고 빠른 궤적이 태준에게 휘몰아쳤다.

카앙!

좌측 하단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막자, 그녀는 이미 우측 상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우측 상단의 검을 막자마자, 배를 노리고 검을 찔러왔다.

태준이 검을 피하려 뒤로 한 발 물러서자, 어느새 몸을 회전시켜 옆으로 돌아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헉! 공격이 보이지 않아?”

“저건 귀신의 검술이다!”

지켜보던 헌터들이 탄성을 질렀다.

태준을 공격한 것은 귀신의 검, 타룬 메이!

신화 길드의 S급 헌터로 대만 출신이다.

그녀의 검술을 게이트가 아닌 밖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타룬 메이가 싸운다는 소식이 sns를 타고 퍼지자, 사무실에 있던 헌터들까지 로비로 내려와 구경하고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그런데 나태준이라고? 저 체육복을 입은 사내가?”

“확실해. 저 특이하고 섬뜩한 칼을 봐. 저 칼 때문에 도살자란 별명이 붙었지.”

도살자란 별명은 살라딘 길드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거상 길드와 전면전을 벌일 때, 그의 잔인한 칼 솜씨에 많은 헌터가 목숨을 잃었기에 생긴 별명이었다.

하지만 별명과 다르게 태준이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도살자도 별거 아니네.”

“맞아! 나태준도 어차피 인간이야. 귀신을 어떻게 이겨.”

타룬 메이는 용산역 상공에 발생한 S급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시간에 김상국의 명령으로 이곳 신화 길드 본부를 지켰다.

이곳 본부 건물은 용산역과 가까운 이촌동에 있었고, 괴수들의 공격을 직접 받아야 했기에 서울역 앞쪽보다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활약으로 이 건물은 타격을 거의 입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 S등급 게이트에 들어간 헌터들이었다.

열다섯 명의 A등급 헌터들은 자신의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같은 S급 헌터가 된 것이고, 자신과 신화 길드의 최고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두 명의 S급 동료는 SS급이 됐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신만 여전히 S급에 머물고 있었기에 지독한 패배감이 든 것이다.

대만에서는 최고의 실력이었지만, 대한민국에 와서는 비슷하거나 더 강한 헌터들이 많았기에 기를 펴지 못했고, 이제는 S급 헌터들이 널려 있었기에 자신의 존재감은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이놈이 새롭게 뜨는 놈이었지.’

얼마 전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면서 나태준은 유명인사가 됐다.

타룬 메이는 지금 이자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자신의 존재를 길드장이나 헌터들에게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갑자기 그녀의 인형이 흐려지며, 헌터들의 눈에 마치 두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공격도 꼭 두 사람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준은 묵묵히 칼로 막고 피하며 그녀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것이 오리지널 S급 헌터의 실력이군.’

1년 전에 갑자기 S급이 된 헌터들과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계속된 공격에 상처가 조금씩 늘어갔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녀의 공격은 더욱 살아났다.

김상국을 찾아와서 뜻하지 않게 S급 헌터와 겨룰 기회가 생겨서 태준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시작이군.’

한별은 태준의 다리가 갑자기 굵어지는 것을 보고, 태준이 공격할 마음이 생겼다고 느꼈다.

그녀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아아!”

콰앙!

“뭐? 뭐야?”

태준이 괴성을 지르고 발을 휘두르자, 한쪽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 언제 꺼냈는지 갈고리가 들려 있었다.

백정의 칼과 갈고리, 그것이 갑자기 타룬 메이에게 휘둘렸다.

캉! 카캉! 캉!

그녀가 머리 위로 내려오는 칼을 막고, 옆구리를 찔러오는 갈고리를 막았다. 그러자 태준이 몸을 회전시키며 자신의 다리를 노리고 칼을 휘두르는데, 타룬 메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지? 지금 내 공격을 따라 하는 건가?’

공격하는 패턴이 귀신 검술이라 불리는 자신의 검술과 비슷했다.

“이야!”

콰앙!

태준의 발길질에 로비 한쪽에 있는 기둥이 박살 나며 그 파편이 타룬 메이에게 날아갔다.

“위험해!”

“피해!”

타룬 메이는 검으로 쳐냈지만, 뒤에 있던 헌터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이어진 태준의 공격에 강한 공격에 타룬 메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러서고 있었다.

‘큭! 이게 사람의 힘인가?’

칼을 받을 때마다 몸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제길, 이대로 밀릴 순 없지.’

빠르게 뒤로 물러선 타룬 메이가 인벤토리에서 검 하나를 더 꺼냈다.

두 자루의 검!

“히익! 진정한 귀신의 검을 보여주지!”

“와라! 처녀 귀신.”

“뭐? 처녀 귀신?”

타룬 메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다시 타룬 메이의 신형이 흐려지고,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귀신 같은 몸놀림!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오는 모습이 펼쳐졌다. 게다가 이번엔 검이 두 자루라 공격 패턴이 일정하지 않았다.

초반의 강한 기세에 태준이 잠깐 밀리다가 입술을 깨물곤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결은 신화 그룹의 로비를 초토화하고 있었다.

B등급 괴수의 몸통 공격까지 막아 낼 수 있다는 초 강화유리는 박살 났고, 대리석 바닥은 갈라지고 가루가 됐다.

커다란 조각품과 인공 분수 역시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조각났다.

‘이건 괴물과 귀신의 대결이다!’

보안 팀장 이준상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점점 대결이 격화되고, 로비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까지 박살 날 때까지 두 사람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만!”

한쪽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노득천과 S급 헌터들이 달려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만 멈춰!”

“왜지? 왜 말리는 거야?”

“몰라서 묻나? 나태준은 길드장님의 손님이다.”

타룬 메이가 노득천을 노려봤다.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밑에 있던 놈이 S급이 됐다고, 반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S급 들도 모두 자신의 밑에 있던 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모두 동급의 위치.

헌터는 철저한 계급 사회이자, 등급의 사회였다.

“쳇! 나태준,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

“운이 아니라 실력이 좋은 거지. 억울하면, 언제 게이트에서 제대로 붙어보자고.”

“좋아! 그날을 기대하지.”

타룬 메이가 몸을 돌려 나가면서 검을 집어넣고는 찢어진 옷을 벗어버렸다.

태준의 칼과 갈고리에 그녀의 속옷까지 모두 엉망이 됐고, 피까지 배어 있었다.

“나태준 이게 무슨 짓이지?”

노득천의 말에 태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상국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이들이 먼저 덤빈 거야.”

“올라가지. 기다리고 있어.”

노득천이 태준과 한별을 데리고 길드장 전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나태준, 저 새끼 실력이 어때?”

모니터를 바라보는 김상국의 물음에 천장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룬 메이와 거의 동급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S급에 필적하는 실력이란 말이지...”

김상국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저게 헌터로 각성한 지 2년 만에 올린 실력이라는데, 믿어져?”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렇게 살아 있는 증거가 있는데?”

“각성은 오래전에 했을 거고, 이태성과 함께 움직인 것을 보면, 그동안 불법 게이트를 꾸준히 공급받아 실력을 올렸을 겁니다.”

“흠, 불법 게이트라... 그럼 이태성과 함께 일하다가, 저놈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란 말인가?”

“그게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군.”

나태준의 강함은 뭔가 이유가 있어야 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김상국은 의자에 앉아서 태준과 한별을 맞이했다.

“헌터들을 내놔.”

다짜고짜 헌터를 내놓으라는 말에 상국은 노득천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지?”

“거상 길드에서 잡아 온 헌터들을 말하는 겁니다.”

노득천은 같은 동창임에도 김상국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김상국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지? 너와 거상 길드는 철천지원수일 텐데? 내가 처리해 주면 좋은 게 아닌가?”

게이트에서 거상 길드원들은 나태준을 죽이려 했었다.

그랬으니,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을 것이다.

“게이트뿐만 아니라 이태성의 것은 모두 내가 접수했다. 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거상 길드원들은 내가 데려가야겠어. 그리고 거상 길드의 건물과 재산도 모두 내놓고.”

“겨우 그것 때문에 우리 1층 로비를 박살 낸 건가?”

“확실히 하고 넘어가지. 난 단지 너와 만나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야. 먼저 덤빈 것은 그쪽이야.”

김상국이 노득천을 노려보았다.

“맞아?”

“CCTV를 확인했는데, 저희 측 보안요원이 먼저 나태준 헌터의 옷을 잡아당긴 것으로 나왔습니다.”

“보안 팀장, 그 새끼 자르고, 보안팀 헌터들 전부 옷 벗겨.”

“네.”

김상국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말처럼 나태준이 이태성과 쭉 함께하다가 그를 죽이고 길드를 접수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으니 거상의 재산과 길드원들을 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상을 돌려주면 넌 내게 뭘 줄 건데?”

그 순간 나태준은 눈빛을 반짝였다.

“최민지, 도경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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