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 나는 괴수 백정이다(2)!
“연, 연희야!”
힘겹게 눈을 떴다.
‘으윽!’
옷이 녹고 있다.
의식이 흐려진다.
이건...
부모님도 여동생도 모두가 허상이다!
점점 놈의 공허에 잠식되고 있다.
끈적한 액체 속에서 뱀같은 촉수가 다가와 인간과 괴수의 사체를 한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촉수를 피해 몸을 계속 움직였다.
아래로 아래로...
드디어 바닥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꾸만 졸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연희를 구해야 한다!’
연희를 떠올렸다.
그 시커먼 게이트 안에 갇혀 있을 연희!
귀족들에게 사육당하며, 헌터를 죽이고 등급을 올리고, 그들을 위해 게이트에서 괴수를 죽였다.
그녀의 성격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시간이 싫었을까.
그때 나는 곁에 없었다.
아니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연희를 구해야 한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대로 네놈에게 잠식당할 것 같으냐!’
백정의 칼을 꺼냈다.
‘도살(屠殺)!’
바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작은 틈이 생겼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비대각(批大卻)!’
미친 듯이 파고들어 구멍을 넓혔다.
그리고.
‘도대관(導大窾)!’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크윽!’
이곳은 놈의 살 속이다.
다행히 나른한 감정이 들거나 억지로 꿈을 꾸게 하진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다.
갑자기 사방으로 살이 오그라들면서 숨이 막혔다.
이대로 압사당할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윽!
이대로 죽는 것인가.
[지경긍경지(技經肯綮之)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이 상황에서 스킬이 활성화되다니...
망설이지 않았다.
뭔가 해야 했다.
‘지경긍경지(技經肯綮之)!’
손목이 회전하며, 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은 놈의 살을 빠르게 저미고 잘라, 작은 공간이 생겼다.
미끄러지듯이 백정이 칼이 움직이며 사방을 베고 가르며, 그 공간을 점점 넓혔다.
탁!
그러다 뼈에 걸렸다.
칼이 그 아래를 스치며 뼈와 근육을 갈랐다.
그러자, 몸을 움직일 공간이 생겼다.
안으로 몸을 밀어고 칼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눈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칼끝이 마치 손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놈의 근육과 살, 뼈가 칼에 닿자, 가장 약한 부분을 그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몸을 계속 밀어 넣었다.
마치 괴수의 살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푸하!”
[지경긍경지(技經肯綮之) - 칼이 손처럼 느껴지는 단계.
손놀림이 근육과 살, 뼈의 결대로 미끄러지며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렇게 괴수의 살 속을 물결치며 앞으로 나아가자, 밖으로 나왔다.
쿠쿵! 쿠쿵!
태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거센 진동과 울림이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괴수의 심장이다!”
힘차고, 거센 박동이 느껴졌다.
한 번에 수십 톤의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은 괴수의 심장 가까운 곳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심장이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저것만 부수면 이놈도 끝난다!
그때였다.
눈앞에 기생충같이 생긴 커다란 벌레 수백 마리와 나방처럼 생긴 괴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휴! 쉬운 일이 없구나!”
백정의 칼과 갈고리를 들었다.
그리고 도살자의 눈빛을 번쩍였다.
“너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그리고 괴수의 심장을 향해 달렸다.
앞을 막는 것은 모조리 도륙할 생각이었다.
***
“쿠오오오오!”
판타지 세계의 악마 발록이 굉음을 질렀다.
불꽃 채찍을 휘두르고, 커다란 발로 괴수들을 차고, 주먹으로 배를 뚫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괴수를 맞이해 발록은 꽤 잘 싸웠다.
하지만 결국, 엄청난 숫자에 밀려 쓰러졌다.
그러자 괴수들이 달려와 발록의 몸뚱어리를 물고 사지를 찢어발겼다.
“크윽!”
발록을 소환한 국가 헌터원 SS급 헌터 강민경.
그녀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자신의 레전더리 소환수는 발록 하나였지만, 그 힘은 상급 드래곤과 맞먹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발록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세상으로 강제 귀환했다.
거대한 몬스터 발록이 지키고 있던 자리에 발록이 사라지자, 사방에서 거미형 괴수들이 새까맣게 밀려들었다.
그것과 싸우는 헌터들은 지금 극한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어렵지 않은 상태였지만, 끝도 없이 나온다는 것이 문제였다.
“중력장!”
손끝에서 뻗어진 중력장을 이철용이 밝고 커다란 돌골렘 머리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발록이 사라진 빈틈으로 수없이 밀려오는 괴수 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압축중력장!”
“파쇄중력장!”
“폭렬중력장!”
쾅! 콰앙! 콰아아앙!
밀려오는 괴수 사이에 이철용의 중력장이 작렬했다.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A급 괴수 소형 브라키페르마 수십 마리의 사지가 찢기고, 괴수의 사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는 역시 SS급 헌터가 맞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올 것 같은 이철용의 중력장도 점점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체력적인 한계와 정신력의 고갈이 문제였다.
이곳에서 괴수가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S급 헌터였던 강민경도 SS급이 되었다.
“아무래도 후퇴 해야 합니다.”
강민경이 소리쳤다.
다시 발록을 소환할 감응력이 남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소환해봤자, 오우거 정도였다.
‘제길, 이대로 버티다간 당하고 만다!’
벌써 국가 헌터원의 헌터 절반이 죽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헌터들이 많이 상했고, 이번 전투로 피해가 컸다.
헌터들의 개별적인 능력이야 다들 올랐지만, 죽어서야 전력이 될 수도 없었다.
이철용이 헌터 협회의 다른 팀을 쳐다보았다.
“괴수를 죽여라!”
이지은, 신화 길드의 SS급 헌터.
그녀의 소환수인 이무기 드라코네스와 불꽃 거인 수르트는 역시나 잘 싸웠다.
이번에 SS급이 된 헌터들과 다르게 그녀는 용산 게이트에서 이미 SS급으로 올랐기 때문에 더욱 강했고, 그녀의 소환수는 더 큰 힘을 내고 있었다.
이무기가 입을 벌려 한 번에 A급 괴수 서너 마리를 물어 죽이고, 채찍처럼 꼬리를 내려쳐 괴수들을 압사시키고, 때려 죽였다.
그리고 거인 수르트는 불꽃 검으로 괴수를 찔러죽이고, 발로 밟고, 손으로 잡아 터트려 죽였다.
그 두 레전더리급 소환수가 앞에서 버티고 있었고, 그 뒤에 SS급 헌터인 타룬 메이가 번개검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아직은 버틸만했다.
그리고 최민지의 드래곤 길드 공략팀은 길드 이인자이자, SS급 헌터 헥토르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헥토르는 권법가로 손에 장갑 대신 날카로운 칼날을 장착했는데, 옛날에 유행한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질럿의 무기와 유사했다.
그가 괴수에게 돌진에 양손의 칼날을 찌르고 휘두르면 어김없이 괴수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속도가 매우 빨라 꼭 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헥토르의 순간 이동 공격과 타룬 메이의 귀신 검술은 뭔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드는 신화 길드처럼 거대한 소환수가 없어서 그런지,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저쪽은 오래 버티지 못하겠군.’
마지막으로 가장 멀리 있는 도경수의 하세신 길드를 쳐다보았다.
거대한 불꽃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괴수들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공격력은 하세신 길드의 SS급 헌터인 김미영이 최고였다.
그녀의 별명인 작염((灼炎)의 마법사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김미영의 불꽃은 용암처럼 뜨겁고, 산불처럼 빠르게 번져갔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를 태워죽일 정도의 화력이었다.
하지만 수천이나 되는 괴수들의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타버린 놈들은 어느새 다른 놈들이 가져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괴수들이 채워졌다.
놈의 배에서 나온 수천 마리의 괴수는 인간 헌터들을 질리게 했다.
“뒤로 천천히 물러서라!”
이철용의 입에서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다른 공략팀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차라리 자신이 이곳 게이트에서 아주 장기간 버티며 사냥을 하며 최초의 SSS등급이 되거나 다른 헌터들이 모두 한 단계 등급 업을 기다렸다가 다시 공략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대로는 전멸이 눈앞에 보였다.
“모두 뒤로 후퇴해라!”
괴수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것은 죽는 지름길이었다.
최대한 싸우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뭐하는 거지?”
국가 헌터원 공략팀이 뒤로 물러서자, 신화 실드의 이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팀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다.
물론 저 거대한 브라키페르마(SS)를 죽이진 못하겠지만, 다른 팀들이 더 버텨준다면, 놈의 약점을 찾을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국가 헌터원이 뒤로 천천히 물러서자, 그나마 힘들게 버티던 헥토르가 이끄는 드래곤 길드 팀도 물러서기 시작했다.
‘제길,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 건가?’
하세신 길드의 김미영 역시 이지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팀이 물러서면 자신과 신화 길드 공략팀으로는 괴수의 물결을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김미영이 명령했다.
“우리도 후퇴한다!”
하세신 길드는 천천히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격하는 괴수는 김미영이 거대한 불꽃 폭탄을 난사하며 막고 있었기에 다른 팀보다 상대적으로 달아나기 수월했다.
그러자, 이지은 팀도 소환수들을 댐처럼 남겨두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형 브라키페르마들은 달아나는 헌터들을 쫓아가기 시작했고, 공중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박쥐 괴수들은 달아나는 인간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지금 달아나는 공략팀의 리더들 머릿속엔 모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이 S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러야 했다.
그러면 최민지나, 도경수같은 최고의 SS 헌터들이 팀을 짜서 추가로 들어올 것이다. 그때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하거나 그 전에 자신들이 최초로 SSS급 헌터가 돼서 저 괴수를 잡아야 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헌터들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이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카올렌 등에 타고 있는 태준의 팀원들뿐이었다.
“헌터들이 모두 달아났어. 이제 어떻게 하지?”
정기용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태준의 팀원 중에서 등급이 가장 낮은 것은 정기용이었다.
이수경과 김서라도 S등급 헌터가 되었으니, 남은 것은 정기용뿐이었다.
“기다려야지!”
윤상희의 말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기용씨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나 봐. 태준씨를 몰라? 분명 기다리면 괴물에게서 이상한 신호가 올 거야. 우린 그때 움직이면 돼.”
“휴, 나도 그건 알지만, 걱정이 돼서 그래요. 차라리 처음부터 함께 들어갈걸.”
정기용의 조바심은 조자룡 때문이었다.
주군을 사지에 보내놓고, 장수가 구경만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 저기 봐! 저놈이 좀 이상한데?”
소리를 지른 최한별의 무표정한 얼굴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괴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거대한 몸뚱어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거 신호일까?”
“분명해요. 저건 태준 오빠가 괴수 뱃속에서 놈을 조지고 있는 겁니다.”
한수진이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한 번도 태준이 괴수에게 져본 적이 없다는 말은 그녀가 한 말이었다.
고딩 때부터 태준과 가장 많은 게이트에 들어갔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누구보다 태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크큭! 그럼 그렇지. 자, 모두 장비 챙겨! 대장을 데리러 간다.”
윤상희가 웃으며 파괴의 날을 꺼냈다.
“수호야 준비됐냐?”
“물론이죠.”
“저기 괴수 뱃속으로 가자!”
“넵!”
블랙 드래곤 카올렌이 검은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며 거대한 괴수의 배를 향해 날아갔다.
“조심해!”
수십 개의 촉수가 카올렌을 향해 뻗어왔다.
그 끝에 날카로운 칼날 손톱을 감추고 있었기에 무대포로 뚫고 들어갈 순 없었다.
“카올렌! 착지해!”
쿠웅!
놈의 구멍 입구로 내려오자마자, 사방에서 괴수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천장에선 수백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놈들을 막아!”
“얼음 장벽!”
최한별이 얼음벽을 만들어 좌우에서 달려오는 괴수를 막았다.
“폭풍의 화살!”
“버닝 에로우!”
한수진과 김서라가 촉수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정기용과 이수경이 검으로 날아오는 촉수를 베어버렸다.
“크아악!!
쩌억!
윤상희는 파괴의 날을 바닥에 찍었다.
피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바닥에선 피가 나오지 않았다.
“쿠아아악!”
커다란 블랙 드래곤이 괴성을 질렀다.
날개와 다리가 촉수에 칭칭 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카올렌이 촉수를 향해 독 브레스를 뿜었으나, 직격에 맞은 몇십 마리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 사라진 자리에 다시 촉수가 자라는 것이었다.
괴수의 재생력이 엄청났다.
콰앙!
“조심해!”
얼음 장벽이 버티지 못하고 깨졌다.
그러자 괴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위에선 촉수가 옆에선 괴수들이 달려드니,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끄와아아아!”
붉은 형상이 말볼 주위로 뿜어졌다.
잊고 있었다.
화룡 헬라카스 샤먼이 접신한 것이다.
말볼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촉수가 일제히 말볼을 향해 뻗어갔다.
말볼이 촉수를 유인함이다.
그 덕분에 위기에 몰렸던 팀원들은 옆에서 달려드는 괴수만 상대하면 됐다.
“말볼 조심해!”
쾅! 쾅!
말볼이 움직일 때마다 촉수가 바닥을 찔렀다.
아슬아슬하게 피하긴 했지만, 오래 버틸 순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날아가던 촉수가 멈췄다.
그러자, 카올렌이 이빨과 발톱으로 촉수를 자르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촉수뿐만이 아니었다.
소형 브라키페르마들이 갑자기 미친 듯이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놈들이 왜 이러는 거야?”
그때였다.
갑자기 이 거대한 놈이 급격히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람이 떴다.
[브라키페르마(SS)를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