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 귀족(3).
“나는 진작 이 바닥에서 은퇴한 사람이야.”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게. 자네가 말하는 진짜 귀족이 올 거야.”
황노인은 인벤토리에서 산삼 한 뿌리를 꺼내더니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SS등급 게이트란 말인가?”
“네. 그것도 이 서울 상공에 발생할 겁니다.”
황노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세상이 멸망하려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손주들하고 여행이나 좀 다녀오는 건데...”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 몇 개월 남았거든요.”
“마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 기분이네.”
산삼을 씹어 먹었음에도 황노인의 표정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 내일부터 장사 접고, 손주들하고 유원지나 가을 산이나 가야겠어.”
태준이 인벤토리에서 괴수 고기를 한 조각을 꺼냈다.
“이게 뭔가?”
“S급 괴수 울트라 피스토마의 고기입니다.”
“어? 뭔 피스마?”
황노인은 처음 듣는 괴수였다.
“어디 다니려면 체력이 있어야죠. 피스토마의 고기는 피를 생성하고, 피부를 재생하며, 몸의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죠.”
“오! 그런 고기가 다 있었군.”
황노인은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태준 손에 들린 고기를 잡고, 입에 넣었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서더니 자기 몸을 바라보았다.
“헉! 이거 엄청 나구나!”
황노인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거 얼마에 팔 텐가? 엄청 비싸게 팔 수 있겠어. 완전 정력제가 따로 없구나!”
“하하하! 손주들하고 여행 가신다면서요.”
“지금 여행이 문젠가. 헌터한테 이 정도 약효라면 일반인은 손톱만큼만 먹어도 엄청난 활력이 생길 거야. 그 고기 한 덩이만 해도 수억은 받겠구먼.”
태준이 피식 웃었다.
“여기 테이블 좀 치우겠습니다.”
태준이 약재들을 한쪽으로 몰아넣곤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괴수 고기 하나를 꺼냈다.
“뭐하는 건가?”
“선물 좀 드리죠.”
슥! 스스슥! 타타타탁!
한 덩어리였던 괴수 고기가 순식간에 수백 조각으로 나뉘었다.
“기력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씩 드시면 됩니다.”
“고, 고맙네.”
황노인은 황급히 괴수 고기를 챙겼다.
“S급 게이트에는 이런 괴수가 수천 마리도 더 되죠.”
“정말 신기하구먼.”
“이번엔 SS급 게이트에 따라 들어오시면 이것보다 더 효과 좋은 고기를 드리죠.”
“뭐?”
“왕년에 한 가닥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보니 이거 뇌물이군.”
“후후. 맞습니다.”
“쩝, 너무 좋은 뇌물이라 돌려줄 순 없네.”
잠시 후.
중년인 몇 명과 노인 몇 명이 황노인의 약재상으로 다가왔다.
“SS급 게이트라니, 지금 우리와 장난을 치는 건가?”
재계 5위 대서양 화장품의 회장 우건우였다.
1세대 헌터였고, 현재 귀족들의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활력 가득한 황노인이 태준을 보며 말했다.
“자네를 보고 싶다는 내 친구놈 있지. 작은 화장품 회사를 한다는, 이놈이 그놈이야.”
“반갑습니다. 나태준이라고 합니다.”
우건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렇게 만나자고 할 땐 외면하더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귀족들과 황노인의 가게 안 창고로 들어왔다.
수만 가지의 약재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온갖 냄새가 풍겨왔다.
“하필 이런 데서 이야기해야겠나? 내 호텔로 가지.”
세계 호텔왕인 남서영이 코를 막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호위 헌터들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시죠.”
“무슨 소리야 호위 헌터라니...”
“알았네.”
우건우가 손짓하자, 그의 그림자에서 헌터가 모습을 드러내 밖으로 나갔다.
“곧 죽을 놈이 호위 헌터는...”
“여우 같은 영감쟁이 우리를 만날 때도 호위 헌터를 숨기고 왔어?”
귀족들의 물음에 우건우는 대답 대신 그냥 살짝 웃었다.
“그보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보다시피 다들 바쁜 사람들이야.”
“SS급 게이트가 뜰 겁니다.”
“그건 이미 들었고,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뭔가?”
우건우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했다.
“제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뭐?”
“곧 국가 헌터원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힘을 빌려달라고요.”
“이철용, 그놈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처음엔 귀족들에게 힘이 되겠다고 접근하더니 지금은 우리를 밀어내고 국가 헌터원과 정치권, 군부대까지 장악했지.”
국가 헌터원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오히려 헌터 협회보다 국가 헌터원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이철용에게 힘을 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시간 끌지 말고, 그 이유를 말해보게.”
태준은 지금 현 상황을 귀족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게이트에서 헌터 협회와 국가 헌터원, 그리고 자신의 세력이 크게 싸울 것 같다는 말을 하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신급 아이템 이야기를 하자, 다들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리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우건우가 말하자, 다들 태준의 입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가 세력을 잡던지 그들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움직일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 필요했다.
“돈은 이미 넘치실 테니 필요 없으실 거고, 헌터 협회를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뭐, 뭐라?”
“이번 게이트에서 최민지와 김상국은 제가 처리할 겁니다.”
여태 담담하게 듣던 귀족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세계 최강의 헌터를 죽이고, 신화 길드장을 죽인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되면 헌터 협회는 혼란이 빠질 겁니다. 그때 귀족분들이 나타나서 혼란을 잠재우고, 각 길드의 수장을 맡아 주신다면, 자연스럽게 헌터 협회는 여러분들이 장악하게 될 겁니다.”
너무 엄청난 말이었다.
그 말이 그냥 헌터도 아니고, 헌터 협회에서 3번째로 강한 세력의 수장에게 나온 말이었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정말, 이길 자신은 있는 건가?”
“그 둘과 그 측근들은 모두 이번 게이트에서 죽을 겁니다.”
우건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가 도경수를 죽였다는 말은 이미 들었네.”
“뭐? 정말이야?”
우건우는 정보도 다른 사람들보다 빨랐다. 그랬기에 귀족들의 수장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민지는 도경수와 달라.”
“든든한 조력자가 있습니다.”
“이철용을 말하는 거군. 그놈을 너무 믿지 말게. 결정적으로 뒤통수 칠 놈이야.”
“이철용이 아닙니다.”
“그럼 누굴 말하는 거지? 김득구? 신화 길드의 이지은이나 최민지의 부하 헥토르가 배신할 리도 없고.”
상위 헌터들의 이름이 전부 나왔다.
“모두 다 아닙니다.”
“거, 너무 뜸을 들이는군.”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반드시 비밀로 해주야 합니다.”
“알았네.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하지.”
“우리도 약속하지.”
우건우와 귀족들이 다들 약속했다.
나태준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연희 헌터입니다.”
“뭐?”
“지금 우리와 장난하는 건가?”
“아닙니다. 이연희 헌터는 살아있습니다. 그것도 저 게이트 안에서요.”
태준은 연희의 마지막 상황과 그녀가 얻은 신급 아이템인 게이트 반지로 위기를 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하 헌터 시장의 최강해 성주가 가지고 있는 같은 종류의 반지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게이트 생성에 대한 비밀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미친것들이 이연희 헌터를 공격하다니...”
귀족들도 이연희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우건우가 말했다.
“그럼 이연희 헌터가 살아있을 수도 있겠군.”
“아니 분명 살아있을 겁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다들 아실 겁니다.”
이연희의 강함이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번도 부동의 1위 자리를 놓쳐본 적 없는 그녀였다.
수십 명이 공략하던 A급 게이트를 혼자서도 클리어하는 실력자였고, SS등급으로 오른 것도 그녀가 최초였다.
“연희만 찾아낼 수 있다면, 최민지는 연희 혼자서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연희를 찾을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우건우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네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움직인다는 거짓말을 하지 말게.”
우건우의 질문에 귀족들 역시 그 점이 가장 궁금했다.
“헌터 협회의 회장 자리를 원하는 건가? 우리가 헌터 협회를 장악하고 이사가 되면, 자네를 추대해 달라고?”
태준이 살짝 웃었다.
“전 연희만 무사하면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 유일한 목적은 연희를 구하는 겁니다.”
“뭐?”
“설마,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녀는 제가 헌터가 된 이유이자, 여태껏 살수 있게 해준 유일한 희망입니다.”
“후. 사랑이란 말이지...”
우건우의 주름진 입가가 실룩거렸다.
“이연희는 보통 여자가 아니잖은가.”
황노인이 끼어들었다.
“나태준, 이 사람의 말은 내가 보증하지. 게이트병의 약을 구해온 것도 이 청년이야. 다들 장사꾼의 눈을 믿으라고.”
말볼초를 구해와 게이트병에 걸린 어려운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국가 헌터원이 한 일이 아니고 나태준이 한 일이라고 하자, 귀족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은 모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자신의 할 말은 이미 끝냈다.
이제 저들이 결정을 내리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다들 그 자리에 남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황노인이 따라 나왔다.
“그동안 자네의 모든 행동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니, 참...”
“어떻게 잘 설득해 주십시오.”
“뭐, 이미 다들 설득당한 것 같네.”
황노인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우리 사업 이야기 말인데...”
“그건 나중에 하시죠.”
귀족들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 후 그들은 국가 헌터원이 아닌, 나태준에게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렇게 헌터 협회와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는 맞췄다.
이제 남은 것은 연희를 구하는 일만 남았다.
***
태준이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말볼이 달려왔다.
“이 녀석. 뭘 먹은 거야.”
말볼의 입가에 검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최한별이 대답했다.
“초콜렛. 아주 미친 듯이 먹던데.”
초콜렛 묻은 입으로 연신 태준의 입을 핥았다.
“윽, 김서라와 이수경씨는?”
“새로운 길드원들 때문에 정신없어.”
“왜?”
“계약해야지, 보직도 정해야 하고, 등급별, 계열별로 정리도 해야지, 하세신 길드 건물의 처분과 사무실 오픈까지 할 일이 태산이야.”
길드의 일은 그 두 사람이 전담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호와 수진이도 안 보이네.”
“새로운 드래곤 소환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래. 둘이 같이 나갔어.”
“뭐? 둘이? 괜찮을까?”
“둘 다 성인이야. 알아서 하겠지.”
윤상희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팬트하우스의 풍경은 여느 가정집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정기용씨는?”
“피 뽑고, 계룡산에 기도하러 들어갔어.”
“언제 온다는 말은 없고?”
“뭐 알아서 나오겠지.”
최한별이 피가 담긴 팩들을 책상에 올려놨다.
“그런데 피는 왜 뽑으라고 했어?”
“SS급 게이트에 들어가잖아.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야지. 앞으로도 틈틈이 피를 뽑으라고 해.”
전에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한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태준은 팀원들의 피가 담긴 팩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
태준이 간만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창수가 골방에서 포정의 칼을 들고 나왔다.
“태준아, 알아낸 것 같아.”
“응?”
“이 칼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말이야.”
태준의 무기 이야기에 팀원들이 우르르 거실로 뛰쳐나왔다.
“어떻게 푸는데?”
“일단 이 칼의 봉인은 현재 99% 풀린 상태야. 나머지 1%는 SSS급 괴수의 피를 묻히면 봉인이 풀려.”
“어?”
“모든 등급의 괴수 피를 묻히면 봉인이 풀리게 되어 있는 거지.”
이야기를 들은 팀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SSS급 괴수는 SS급 게이트에 보스로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럼 다음 게이트에서 SSS급 괴수를 죽이기 전에는 봉인은 풀 수 없다는 말이었다.
- 긴급 뉴스를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주도에 거대한 드래곤이 출현했습니다.
TV 화면에 거대한 붉은 드래곤 한 마리가 말 목장에서 말들을 통째로 삼키는 모습이 포착됐다.
“허! 엄청 큰데!”
“저건 누구의 드래곤이지?”
드래곤을 부릴 수 있는 소환술사는 손가락에 뽑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어? 저거 수호 아니야?”
드론으로 찍은 화면에 드래곤 뒤에서 한 사내가 발로 드래곤을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수호가 소환에 성공했구나!”
“저게 그럼 벨록스인가?”
수호가 뒤를 따라다니면서 뭐라고 소리치는 사이에도 벨록스는 느릿느릿 걸어 다니면서 겁에 질린 말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저거 길들이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