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129화 (129/149)

# 129

129. SS등급 게이트 공략(8).

- 태준아! 빨리 나와봐! 내 말 들리니?

연희가 나를 급하게 찾는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멍한 머리를 깨우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은 괴수를 죽이기 위해 이놈의 몸속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카라차크라와 생각이 동화되자, 그 순간 그 목적을 망각하고 놈과 한 몸이 될 뻔했다.

‘젠장, 죽여버리겠어!’

놈의 안타까운 마음이야 알겠지만, 자신에게는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로 얽힌 혈육은 아니지만,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가족이자,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싸우는 것이다.

- 치지직! 태준아 내 말 들려?

연희에게 계속 무전이 들려왔다.

그랬기에 살짝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연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니 첫 데이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카라차크라를 죽여야 해.

나른해진 몸을 움직였다.

한 걸음을 움직이는데, 그 시간이 천 리를 가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힘겹게 서슬 퍼런 백정의 칼을 들었다.

이제 놈을 죽일 것이다.

- 치칙! 한별씨와 윤상희씨가 당했어. 그리고 방금 수진이도 죽었어.

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한별이와 수진이, 그리고 상희 누나까지...

그 순간 나를 바라보며 걱정해주던 한별이와 수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집에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기태와 주혁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 괴수를 죽이면 안 돼... 정기용씨도 팔이 잘렸고, 헌터들이 절반이나 죽었어.

연희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에게 계획을 말해줬기에 내가 괴수 몸속에 있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놈을 죽이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엔 자신의 몸 근처에 절대 접근시키지 않을 것이기에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 아! 아무래도 나도 도와야 할 것 같아.

연희도 게이트를 나가 괴수를 공격했다.

그녀 역시 괴수가 시간을 돌리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을 살릴 수 있음으로...

나 역시 망설임은 없었다.

칼을 들고, 눈앞에 괴수의 신경을 그었다.

촤악!

‘섭취(攝取)!’

손바닥 크기로 저민 카라차크라의 신경 고기를 입에 가득 넣고 씹어 먹었다.

신경이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놈의 신경과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괴수의 몸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놈의 복잡하고 공허한 생각이 몰려들었다.

‘또 나를 물 들이려는 것인가!’

좋지 않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과감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놈의 신체를 향해 백정의 칼을 겨눴다.

“도대관(導大窾)!”

파파파파팟!

열두 개의 구멍이 괴수의 몸뚱이를 뚫었다.

구멍 사이로 시커먼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구멍들 사이로 칼을 휘둘렀다.

“할야(割也)!”

괴수 도살자의 칼이 눈앞에 살과 핏줄, 힘줄과 신경들까지 거침없이 베고, 뚫고, 갈랐다. 그래도 놈의 중추 신경은 건들지 않았다.

그제야 놈이 몸속에 이상함을 느꼈다.

이제 카라차크라가 자신의 몸속에 있는 나를 알아챘다.

그 순간 헌터와 싸우고 있던 괴수의 수십만 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눈앞이 캄캄해지며, 사방이 어두워졌다.

***

“아, 좋다.”

연희가 커피 믹스를 탄 커피를 마신다.

‘어, 뭐지?’

윤상희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흔든다.

“연희씨, 괜찮아? 벌써 석 잔째 마시는 거잖아?”

“이 맛이 너무 그리웠어요.”

시간이 되돌려졌다.

그것도 괴수를 잡기 전날 저녁 식사 시간 직후였다.

‘상당히 뒤로 돌렸구나!’

괴수가 무리했다.

태준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많이 되돌리는 것은 카라차크라도 너무 많은 시간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어서 좋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렇게 시간을 이틀이나 되돌리진 않았다.

놈이 이렇게나 시간을 멀리 돌린 것은 나름대로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 공격의 패턴, 방법, 특이점까지 처음 경험해 보는 위기였고,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뻔한 첫 번째 위기였기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을 태준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오빤, 커피 안 마셔?”

멍한 내 모습에 한별이가 물었다.

“어?”

“잔에 커피가 그대로 있네.”

“아, 이제 마시려고.”

“이긍! 연희 언니 얼굴 좀 그만 봐.”

한별이가 태준을 놀렸다.

태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상희가 옆에서 지원사격을 했다.

“그 좋아하는 커피까지 마시지 않는 거 보면, 연희씨가 좋긴 좋은가 봐.”

“예? 그, 그게 아니라...”

“팔불출 같아!”

“훗!”

내가 당황하는 모습에 연희가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옆에서 나를 놀리고 있는 한별이를 보았다.

그때 내가 괴수의 신경을 파괴했더라면, 옆에 있는 한별이는 죽었겠지...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 다행이야. 살아 있어서.”

“어?”

최한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시선은 윤상희를 향했다.

그녀 역시 연희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죽었다면 기태와 주혁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자신은 평생 그 애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팀원들의 죽음은 내 책임이었으니까.

그리고 모닥불 옆에서 정기용은 혼자 앉아서 청홍검을 닦고 있었다. 그의 잘렸던 팔도 멀쩡해졌다.

그 시각 수호와 수진이는 웅덩이에서 몇몇 길드원들과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모두 평화로운 일상이다.

만약 괴수와의 전투에서 자신이 팀원들의 죽음을 직접 봤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다시 괴수와 싸우러 가야 했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 누구라도 죽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연희를 바라보았다.

게이트에 남아 있어도 될 것인데. 팀원들이 위험에 처하자 직접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괴수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고, 죽을 것이다.

‘고마워, 너 때문에 그때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새삼 연희가 고마웠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괴수와 동화되어 영원히 한 몸이 됐을 것이고, 괴수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괴수는 시간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과 팀원들, 그리고 헌터들은 공략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도 멸망했겠지...

연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뛴다.

그 순간 용기를 냈다.

“연희야. 잠깐 산책갈까?”

“어?”

갑자기 주변에 고요해졌다.

내 말에 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대장 용감한데.”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팀원들이 태준을 놀렸다.

그럼에도 태준은 연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희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그, 그래.”

많은 헌터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태준은 연희와 산책하러 나갔다.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야. 뭐, 기억나는 거 없어?”

“응?”

“우리 다시 과거로 돌아왔어.”

“그럼 그게 진짜였구나!”

연희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 안에서 괴수와 헌터들이 싸우는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기억이 전혀 없었기에 자신이 잠깐 졸았거나 상상인 줄 알았다.

전에는 이번처럼 이틀이나 긴 시간을 돌린 적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란 이처럼 기억을 어지럽게도 하는 법이다.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혼자 알고 있다는 거 생각보다 좋진 않았다.

연희가 물었다.

“두 번인가? 우리가 싸웠던 것이?”

“맞아.”

그녀는 게이트에서 뛰쳐나가는 그 순간부터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연희가 혼란한 기억을 대충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괴수에게 치명상까지 몰고 갔었나 봐. 마지막에 상당히 위기였는데.”

“그래.”

태준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괴수를 죽일 수 있었다고 말하면 믿을까?

그리고 팀원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괴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면 뭐라고 할까?

이미 지난 일이었기에 혼자만 알고 있을 생각이었다.

“연희야, 내일 헌터들한테 괴수를 다시 공략하자고 말해.”

“그래야지. 가만히 있다고 해결책이 생기는건 아니니까.”

그리고 전에 말했던 것처럼 김상국이 연희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하고, 그녀가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시 해줬다.

이 이야기는 기억에 전혀 없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과 게이트의 기억,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개념이었기에 솔직히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괴수를 손쉽게 죽일 뻔한 이번 같은 기회는 다시 잡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태양이 지고, 달이 차례로 떠오르고 있었다.

“달도 세 개네...”

“아름답지?”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밝은 모습이었다.

“여기, 참 아름다운 곳이야. 괴수만 없다면 이곳에 눌러살고 싶을 정도야.”

연희의 말처럼 태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연희와 함께라면 이곳도 자신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태준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야, 우리 그냥 이곳에서 눌러살까?”

“뭐?”

연희가 살짝 놀란 표정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둘이 여기 게이트에 사는 거야.”

연희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힘들었구나. 우리 좀 더 걸을까?”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냥 손을 꼭 잡고 말없이 걸었다.

왠지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모두 죽을 거야.

너 혼자, 팀원들을 버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여기 있는 헌터들의 가족은 어떻게 할 거야?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텐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연희는 무언으로 내게 말을 한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베이스 캠프에 다다랐다.

“괜찮아?”

“그래 덕분에 좀 진정됐어.”

“태준이 네가 나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어?”

“한별씨가 모두 이야기해줬어.”

“한별이가?”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준비하면서 내 이야기를 했던가.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 이제 나도 있으니까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게이트에 나가면 우리 못했던 데이트도 해야지.”

“그래. 근사한 곳에 가서 밥먹자.”

참 소박한 꿈이다.

두 사람이 캠프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윤상희가 웃으며 물었다.

“오호! 둘 사이가 급 진전됐네.”

“뭐요?”

“네?”

윤상희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직도 꼭 잡은 두 손이 보였다.

연희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러더니 자신의 집으로 올라갔다.

“태준씨 숙맥인 줄 알았는데, 선수였어. 한국, 아니지 지구 최고 미녀를 다 꼬시다니.”

“예? 그게... 아닌데.”

살기인가?

그 순간 주변에 헌터들이 모두 자신을 노려봤다.

심지어 도살자 길드원들까지...

그녀는 헌터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오빠, 오늘 밤에 조심해! 칼침 맞을지 모르니까.”

한별이가 옆으로 지나가면서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꿈처럼 짧은 저녁이 지나고 깊은 밤이 왔다.

“나 주변 순찰 좀 돌고 올게.”

“응?”

불침번인 수진이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몸에 열이 나서 가만히 못 있겠어?”

“뭐?”

“연희 언니와 잘 되고 있다고 들었어.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공간에서 있으니 잠이 안 오겠지. 흐흐.”

“이 쪼그만 게.”

“내 키가 173야. 2센티나 더 컸다고. 아무튼, 너무 멀리 가진 말고.”

“알았다.”

몸을 돌렸다가 다시 돌려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거야. 고마워.”

“응? 왜 그래? 생뚱맞게?”

늘 아다다스 삼색 체육복을 입고, 반항기 많았던 고딩.

일 년 꿇었다며, 성인이라고 했다가 자기가 불리하면 고등학생이라고 우기던 그녀가 이제는 어엿한 SS등급에 팀에 없어선 안 될 헌터가 됐다.

모두 꼭 살려서 데려갈 것이다.

“이따가 보자.”

말볼의 등에 타고선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

이른 아침.

아침을 준비하는 헌터들을 빼놓고선 다들 잠을 자고 있었다.

“태준씨 못 봤어요?”

연희가 아침부터 태준을 찾았다.

마지막 불침번인 윤상희가 말했다.

“눈뜨자마자, 태준이부터 찾아요?”

“그게 아니라, 베이스 캠프에 없어서요.”

“수진이가 그러는데 밤에 잠이 안 온다며 주변 순찰을 간다고 했어요. 말볼하고 같이 갔으니까 금방 오겠죠.”

윤상희의 말에도 연희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카라차크라(SSS등급)를 죽였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이 게이트는 300시간 후에 소멸합니다. 남은 시간 - 299: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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