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130화 (130/149)

# 130

130. 내가 도살자다(1).

끝없는 전쟁.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고, 또 계속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너를 죽여야 하고,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기기기긱! 고오오오오!”

놈의 고통스러운 울음을 울리며, 시간을 되돌린다.

어느새 나는 동굴 입구.

인벤토리를 열고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말볼을 타고 다시 달린다.

놈에게 다가가자, 수십만 개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도살자의 시선(視線)!’

[도살자의 시선(視線) - 눈을 마주치는 순간 처참하게 자신의 몸이 찢기는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는 죽음의 공포감에 물든다.

놈도 살아있는 생명, 도살자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다.

눈을 멀게 했으니, 전과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사방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지옥의 화염이 뿜어지고, 얼음 화살이 날아온다.

화르르르! 파파파파팟!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에 작렬할지 이미 알고 있다.

놈의 마법 공격을 피해 접근했다.

그때였다.

‘이번엔 창이냐?’

접근한 방향으로 수많은 촉수는 이미 나를 죽일 준비가 갖춰져 있다.

해일이 밀려오듯이 엄청난 숫자의 창이 태산처럼 밀려온다.

빠르게 달리며 촉수들을 피해낸다.

그러다 이내 촉수에 막힌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나는 시간을 돌린다.

카라차크라가 준비한 촉수 반대편으로 달리자, 해일 같은 촉수가 허공과 바닥을 찌른다.

놈이 급하게 다른 촉수를 뻗는다.

말볼이 유인을 하며, 나는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내려 놈에게 전진한다.

괴수의 몸에 접근한 그 순간 칼을 휘두른다.

“동도심미(動刀甚微)!”

[동도심미(動刀甚微) - 칼의 움직임이 매우 세미하여 원하는 곳을 긋는다. 상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한동안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감히 도살자의 눈을 마주 볼 수 없는 놈이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최대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 칼을 빠르게 휘두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흘러내린다.

이제야 놈이 고통을 느끼며 또다시 수백 개의 촉수를 찔러온다.

이 촉수는 할야(割也)와 절야(折也), 비대각과 도대관, 심지어 유인유여와 동도심미 등의 백정 스킬에 잘리지 않는 완벽히 대비된 촉수이다.

하지만.

“유인유여(游刃有余)!”

[유인유여(游刃有余) - 칼 놀림이 경지에 달하여 자유롭게 이동하며 전혀 막힘이 없다. 어떤 피부든 칼에 닿기만 하면 결에 따라 벨 수 있다.]

놈의 촉수는 힘없이 잘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원래 잘리지 않아야 할 터인데!

하지만 SSS급 괴수의 피를 머금어 마지막 봉인이 풀린 “포정의 칼”은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다.

백정의 칼을 들고 놈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도륙(屠戮)! 난도(亂刀)!”

[도륙(屠戮) - 무엇이든 자르고, 벤다. 앞을 막아내는 것이 죽을 때까지 격노(激怒)한 칼질이 이어진다. 난도(亂刀) 스킬과 병행하면 위력이 배로 커진다.]

칼이 쉴새 없이 휘둘리며 놈의 몸뚱어리에 동굴같은 구멍을 만든다.

“비대각(批大卻)! 도대관(導大窾)!”

뒤에서 놈의 촉수가 밀려오지만, 백정의 칼에 모두 잘린다.

괴수는 나를 막을 방법이 없자, 괴성을 지르며 또다시 시간을 돌린다.

***

또다시 말볼을 타고 앞을 달린다.

지겹다.

놈이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접근하기 전에 죽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짧아진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간이 조금씩이지만, 짧아지고 있었다.

괴수와 동화됐기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라차크라의 중추신경 고기를 먹은 나는 괴수와 같은 능력을 쓸 수 있다.

한마디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괴수의 중추신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위기에 빠지거나 놈이 완벽히 대비하는 순간, 나는 괴수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린다.

그랬기에 지금 수백, 수천 번의 전투를 반복하고 있다.

싸우면 싸울수록 정신이 공허하다.

‘내가 왜 싸우고 있지?’

수천 번의 전투가 계속 반복된다.

말볼은 그때마다 새로운 정신으로 싸울 수 있지만, 나는 그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놈과 싸우고 있다.

이건 내 정신이 버틸 수 있는지와 카라차크라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때까지의 전투나 다름없었다.

벌써 몇 번째 전투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수천 번이 지났는지, 수만 번이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그저 끝없는 전투에 몸을 내던진다.

“크릉!”

“어?”

내가 멈칫하자, 말볼이 나를 일깨운다.

이 지겹고 지겨운 싸움.

연희나 팀원들이 함께 싸웠다면 오히려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상황을 내가 컨트롤 할 수도 없었고, 팀원이 죽을 때마다,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할 테니까.

“말볼, 가자!”

몽롱해진 정신을 일깨운다.

백정의 칼을 들었다.

나는 싸워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이 순간 말볼과 또다시 전장을 향해 달린다.

영원히 이어질 지도 모르는 전장을...

“으아아아아! 죽어!”

[도살자의 포효(咆哮)가 발동됩니다.]

[도살자의 시선(視線)이 발동됩니다.]

놈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주변 공기가 말해주고 있다.

놈의 중추신경이 끝없는 공허에 빠졌다.

생존을 위해 그 처절한 순간을 버틴 카라차크라였지만, 지금 이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온몸이 굳는다.

두려워한다!

저 괴수 도살자의 눈빛, 괴수 도살자의 정신, 괴수 도살자의 칼을 두려워함이다.

놈의 촉수가 느리게 뻗어진다.

말볼이 뛰어넘고 놈의 몸뚱어리 앞에 섰다.

“이제 끝이로구나!”

의지가 꺾인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 없다.

백정의 칼을 휘둘러 놈의 몸을 뚫었다.

그리고 위로 솟아올랐다.

사정없이 괴수의 몸속을 휘젖고, 순식간에 놈의 중추신경 앞에 다다랐다.

차가운 칼을 놈의 신경에 댔다.

칼을 그으려는데,

그 순간 망설여졌다.

놈이 정신으로 내가 말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 자신은 그저 생존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생명이 살고 싶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너를 살려줄 순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하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연희도, 동료들도, 헌터들도, 사람들도 그들 역시 살고 싶은 생명이 아니던가.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를 죽인다.

“내가 너를 기억하마.”

백정의 칼을 쥐었다.

“도살(屠殺)!”

촤악!

놈의 신경이 반으로 갈라졌다.

백색의 광원이 사방으로 퍼지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뿜어졌다.

[카라차크라(SSS등급)를 죽였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이 게이트는 300시간 후에 소멸합니다. 남은 시간 - 299:59:59]

그 순간 땅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터억!

말볼이 떨어지는 나를 물더니 등에 태웠다.

“응?”

괴수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카라차크라, 그 괴수의 피와 살이 검은 액체가 되어 동굴 밖으로 흘러갔다.

“내가 정말 죽인 건가? 놈이 죽었나?”

마치 꿈같았다.

벽에 붙어 있는 말볼이 앞을 달리더니 순식간에 반대편 절벽 동굴로 넘어갔다.

툭툭!

“고맙다!”

그 끝없는 공허한 싸움에서 늘 옆에 있던 말볼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말볼은 저 카라차크라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어쩌면 어미였을 지도 모르는데, 이놈은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반대편 동굴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절벽 아래로 흘러내렸다.

놈이 죽은 것이다.

‘봉인은?’

백정의 칼을 바라보았다.

[포정의 칼(신급) - 어떤 것도 벨 수 있다.]

다행히 봉인은 풀려 있었다.

그런데 설명이 너무 간단했다.

어떤 것도 벨 수 있다고?

지금까지도 포정 스승님이 주신 이 칼은 어떤 괴수든 잘 베어왔다. 그러니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격이 오른 느낌이랄까.

그냥 쥐기만 해도 힘이 넘쳐 흘렀다.

“상태창!”

최종 보스인 SSS등급 괴수를 죽였으니, 보상을 확인할 차례였다.

[키라차크라의 반지(신급) - 하루에 한 번 시간을 거슬러 돌아갈 수 있다. 최대 시간 5분. 각인됨.]

설명이 매우 간단했지만, 태준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카라차크라가 꼭 자신에게 남긴 유산 같은 것이었다.

시간의 유산.

5분의 제안 시간이 있었고,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 활용도는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체력 수치가 SSS급 괴수를 잡자, 갑자기 1,993이 되었다.

느낌에 2,000이 넘으면 헌터 등급이 또 오를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자!”

모두를 살렸고, 모두를 다시 볼 수 있었기에 돌아가는 태준은 더는 공허하지 않았다.

***

“이게 무슨 일이야?”

잔뜩 날이 선 최민지가 자신의 세 마리 드래곤을 모두 소환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베이스 캠프에 모인 헌터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거나 소환수를 소환했고, 공략팀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연희! 이게 무슨 일이지?”

최민지와 김상국이 헌터 협회 이사들과 소속 헌터들을 모두 이끌고 찾아왔다.

“글쎄, 나도 지금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연희 역시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김상국이 주변을 둘러봤다.

“나태준은? 나태준은 어디 있지?”

“그, 그게.”

당황한 연희의 모습을 보자, 최민지와 김상국이 동시에 소리쳤다.

“다들 나태준을 찾아봐!”

“나태준을 찾아!”

곧 국가 헌터원의 이철용도 잔뜩 무장한 헌터들을 데리고 연희에게 다가왔다.

“게이트가 클리어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김상국이 말했다.

“나태준이 없어. 그리고 그 사냥개도 안 보이고.”

“뭐?”

최규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태준이가 혼자 SSS급 괴수를 죽인 건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이연희가 우리를 속이고?”

이철용이 이연희를 노려보았다.

“그 카라차크라 괴수가 시간을 뒤로 보낸다는 말, 그거 다 거짓말이야?”

그 물음에 최민지도 이연희를 노려봤다.

“이제 보니 이연희, 네가 우리를 속인 거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괴수가 과거로 시간을 돌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괴수의 모습을 본 헌터도 아무도 없었다.

“네가 속인 것은 없어. 아무래도 태준이 우리를 위해 혼자서 괴수를 상대하러 간 것 같아.”

“뭐? 시간을 되돌리는 괴수를 태준이 어떻게 혼자 상대할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태준이가 오면 설명해 줄 거야.”

“허!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군. 그럼 가만둘 수 없지.”

최민지가 손짓했다.

그러자 세 마리 드래곤이 그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쿠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벨록스가 소환되더니 이연희 옆으로 섰다.

그리고.

“도살자 길드원은 이연희 헌터를 보호하라!”

윤상희가 소리쳤다.

게이트에서 길드장인 태준이 부재중일 때는 윤상희가 공략팀의 리더를 맡았다.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사리분별에 밝고 팀원들을 가족같이 생각하고, 동생들도 그녀를 잘 따르기에 태준이 그녀에게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연희 헌터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는 이익이 뭐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러서지, 아니면 우리 도살자 길드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윤상희가 파괴의 날을 들어 앞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그러자, 최한별과 팀원들도 앞으로 나섰다.

“이것들이 이제 보니 한통속이 되어 우리를 속인 거군. 도살자 길드를 포위해라!”

헌터 협회 헌터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이연희와 도살자 길드원들을 포위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이철용이 양 진영을 보더니 눈을 굴리더니 소리쳤다.

“국가 헌터원 헌터들도 모두 도살자 길드를 포위해라!”

헌터 협회와 국가 헌터원 헌터들까지 1,500명이나 되는 헌터들이 200명의 도살자 길드원들을 포위했다.

“뭐야? 너도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연희의 물음에 이철용이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태준이 올 때까지 너희는 아무 데도 못 가.”

“건방진 것들! 어딜 우리를 속이려고.”

최민지가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소환수들이 앞뒤로 막고 있었고, 헌터들이 겹겹이 포위했다.

지금 상황은 도살자 길드원들에게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갈라졌던 두 개의 영혼이여...”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맑고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하나였던 내 몸에 강림하소서.”

파아아앙!

츄슈슈슈슈!

날개 달린 푸른 여신의 커다란 형상이 가운데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연희가 채찍을 들었다.

“헉! 저건?”

“염화의 채찍이다!”

헌터들이 그녀의 채찍을 알아보았다.

이연희의 트레이트 마크인 레전더리급 채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녀의 샤먼인 여신의 형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들고 있던 창이 채찍으로 변했다.

“누구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나서라! 나도 더는 참지 않아!”

그녀의 몸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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