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 내가 도살자다(2).
이연희.
그 이름 석 자가 같은 의미는 컸다.
세계 최고의 헌터.
최초의 S급, SS급, SSS급 헌터.
수많은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100만 헌터 중의 홀로 우뚝 솟은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수조의 재산을 게이트 발생 때문에 생긴 어려운 고아와 불우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고, 헌터 인기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었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게이트에 갇히고 나서도 지금까지 인기투표에서 1위를 놓치지 않았겠는가.
사람들은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맹세한 것이 있었다.
누구보다 강해져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힘을 갖는다.
그러면 누구도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더욱 강한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매일 사람을 죽이고 등급을 올려야 하는 그 처절하고, 끔찍한 기억이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게이트에 갇혀 있던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변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살아서 게이트 밖으로 나가 태준을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식구처럼 따듯한 팀원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의 작은 소망이자, 목표였다.
그 때문에 이 지독히 고독한 곳에서 2년이나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많은 헌터가 태준의 진심을 모르고, 자신과 태준의 팀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헌터들은 모두 카라차크라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못 믿고, 속였다 말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더는 참아줄 수가 없었다.
“누구든 덤벼!”
촤악!
여신의 채찍이 휘둘리자, 불꽃이 번쩍이고 헌터들이 움찔했다.
SSS급 헌터의 위력이었으니, 다들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나설 것인가?
“최민지, 비겁하게 뒤에서만 공격하지 말고, 자신 있으면 먼저 나서.”
연희의 채찍이 겨눠지자, 최민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채찍이 빠를까? 내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빠를까?
지금 이 순간 연희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저 염화의 채찍이 얼마나 빠를지, 또 얼마나 길게 늘어날지 그녀 역시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쿠쿠쿠쿠쿠쿵!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뭐지?”
“지진인가?”
점점 격렬해지는 진동.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굉음.
그건.
“괴수다!”
뒤쪽에 있던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분지 위쪽에서 거대한 괴수들이 쏟아져 내렸고, 저 하늘 끝에서도 괴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쿠웅!
“꿰에에에에!”
분지 아래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괴수가 제 몸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 헌터들을 향해 돌진했다.
무엇이 저리 저놈들을 성나게 했을까?
괴수들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고, 입가엔 분비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미쳐 폭주하는 것 같았다.
“괴수들이 온다! 대형을 갖춰라!
“괴수를 막아라!”
순식간에 쓰나미가 덮치듯이 괴수들이 파도처럼 베이스 캠프를 덮쳤다.
“막아라!”
“죽여라!”
인간과 괴수의 싸움이 벌어졌다.
괴수들은 상처 입고, 사지가 잘려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것들은 지금 오로지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게다가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눈에 봐도 헌터 숫자보다 괴수 숫자가 훨씬 많아 보였다.
게다가 대부분 S급과 SS급 괴수들이었기에 일격에 죽지 않는 놈들이 많았다.
“바잘겟트! 괴수를 죽여라!”
“쿠오오오오오!”
세 개의 머리에서 브레스가 뿜어졌다.
황금색의 브레스! 붉은 화염의 브레스! 그리고 암흑룡의 검은 브레스까지 연이어 괴수를 향해 뿜어졌다.
찌이이잉! 콰콰콰쾅! 화아아아아아!
세 개의 브레스가 닿는 곳마다 엄청난 열기의 화염이 피어올랐고, 시커먼 암흑물질이 괴수를 휘감았다.
괴수들은 브레스 한 번에 십여 마리가 녹아 내렸고, 살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괴수들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에서 몰려왔다.
김상국 쪽도, 국가 헌터원 쪽도, 도살자 길드원들 역시 괴수들이 몰려갔다.
“죽여도 죽여도 몰려드는군.”
“큭! 이거 너무 많이 몰려옵니다! 더는 힘듭니다.”
헥토르의 말뜻을 최민지가 알아들었다.
“제길, 후퇴해라!”
“모두 게이트 입구로 후퇴하라!”
최민지가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화이트 드래곤 기가테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 볼테우스와 함께 바잘겟트의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발잘겟트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순식간에 전장에서 이탈했다.
“길드장이 우릴 버렸어!”
“이, 이럴 수가!”
그 순간 드래곤 길드의 헌터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드래곤이야 다시 소환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늘을 나는 드래곤으로 남은 헌터들을 도울 생각은 안 하고, 바잘켓트만 데리고, 달아났다.
그것도 부길드 마스터인 헥토르와 가장 먼저 몸을 돌렸으니, 허무하고 허탈한 느낌이 맴돌았다.
그들은 순간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요!”
이연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채찍을 휘둘렀다.
“화염 채찍!”
쫘아악!
파파파파팟!
여신의 채찍에 닿은 일대에 화염이 치솟으며 괴수들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괴수들은 뜨거운 화염에 녹아버렸다.
이연희의 채찍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괴수들을 휘감았고, 거대한 놈들의 몸뚱이가 그대로 동강 났다.
그녀가 괴수들과 싸우고 있는 도살자 길드원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나를 따라와요!”
이곳은 연희의 집이었다.
누구보다 이곳 길을 잘 알고 있었고, 어디로 피할지도 알고 있었다.
윤상희가 외쳤다.
“모두 이연희 헌터를 따라간다!”
다른 헌터들은 모두 숲으로 달아나는데, 이연이는 오히려 괴수가 떨어지고 있는 분지쪽으로 달렸다.
“어서 서둘려!”
촤악! 촤아아아악!
채찍을 휘두르자, 앞을 막고 있던 괴수들의 머리통이 터져버렸다.
그녀의 채찍엔 마치 눈이 달린 것 같았다.
“저기에요 저기 틈으로 들어가요!”
겨우 두세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틈이었다.
그곳을 향해 헌터들이 들어가고 밖에는 태준의 팀원들이, 도살자 길드원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아이스 블라스트!”
파파파파파팟!
냉기와 얼음으로 다가오는 괴수들의 다리를 묶었다.
그러자 연희가 채찍을 휘둘러 괴수들을 한번에 터트렸다.
두 사람의 호흡이 상당히 잘 맞았다.
“이제 다 들어갔어!”
윤상희가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이수호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하늘에서 괴수와 싸우는 벨록스를 귀환시켰다.
이제 한동안 소환하지 못할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연희와 한별도 틈으로 들어갔다.
“이쪽이다!”
큰 무리의 헌터들이 도살자 길드원들이 들어간 틈으로 몰려왔다.
“이쪽으로 들어가라!”
이철용이었다.
그가 연희가 도살자 길드원들을 피신시키는 모습을 보고, 국가 헌터원 헌터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도살자 길드원들은 연희를 따라 분지의 틈으로 계속 들어갔고, 곧 땅속으로 이어진 동굴로 들어갔다.
그 길은 SSS급 괴수가 있던 동굴로 향하는 또 다른 통로였다.
아래로 내려온 팀원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엄청난 숫자였어.”
“게다가 괴수들이 모두 미친 것 같았다니까.”
괴수들은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가기 위해 몰려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미를 죽인 인간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정기용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그 보스가 있는 동굴로 돌아가야 할까?”
리더인 윤상희가 대답했다.
“아니, 우린 게이트로 이동한다.”
“하지만 태준 대장은?”
“말볼이 있잖아. 우릴 금방 따라올걸.”
“아하!”
“연희씨도 함께 가요. 태준 대장은 금방 따라올 거에요.”
솔직히 연희는 태준이 향했던 동굴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 있는 태준의 팀원들과 길드원들이었다.
모두 한꺼번에 반대편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위험했고, 그들의 적은 지금 괴수만이 아니었다.
국가 헌터원과 헌터 협회의 최민지와 김상국 패거리들도 이들을 노릴 것이기에 일단 최대한 빠르게 게이트로 먼저 이동시켜야 했다. 그들은 분명 게이트 부근에서 이들과 태준을 기다릴 것이다.
“좋아요. 일단 게이트로 가요.”
연희가 앞장서 길드원들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잠시 후에 국가 헌터원의 헌터들이 동굴로 들어왔다.
“여기서 잠시 쉰다.”
헌터들은 쉬고 있었고, 국가 헌터원의 수뇌부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모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최규환이 먼저 물었다.
“이렇게 끝낼 거야?”
그러자, 노병원과 박하림, 강민경도 대장의 의중을 듣고 싶어, 이철용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게이트를 나갈 거냐고?”
그러고 보니, 그들 모두는 태준과 같은 6학년 3반 동창들이었다.
이철용은 잠시 고민했다.
“게이트 보상으로 뜬 카라차크라 반지, 그거 신급 아이템이었어.”
“그래, 이제 이연희와 나태준만이 신급 아이템을 하나씩 가진 거지.”
“무슨 기능이 있을까?”
“그거야 그놈 말고는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상당할 거야.”
“맞아. 레전더리도 아니고 신급이야. 이연희는 그 게이트 반지로 여기서도 혼자 살아 남을 수 있었잖아. 게다가 SSS급 헌터로 등급도 올랐고.”
신급 아이템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이철용과 지휘부 헌터들의 눈빛을 반짝였다.
“내가, 아니 우리가 다른 헌터 협회를 치고 나가려면 그 반지가 꼭 필요할 거야.”
“그럼?”
“우린 이곳에서 나태준을 기다린다.”
지휘부 헌터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지금이 기회였다.
그가 연희와 도살자 길드 공략팀과 합쳐진다면, 국가 헌터원 헌터들이 전부 공격해도, 태준의 반지를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태준이 홀로 떨어진 지금이 신급 반지를 빼앗기에 적격이었다.
“저 헌터들은 어떻게 해? 모두 참여할 순 없잖아.”
국가 헌터원 헌터 300여 명이 게이트를 나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헌터가 상했고, 엄청난 괴수 무리와 싸운 직후였기에 다들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국가 헌터원의 정예였지만, 이곳에서 태준을 매복하고 공격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국가 헌터원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었고, 이연희와 도살자 길드원들이 복수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다.
특히 게이트 밖에서 이연희의 말 한마디 파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일단 인원은 최소한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최규환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믿을 만한 SS급 헌터 몇 명만 남기고 모두 게이트 입구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누가 인솔해 가지?”
“내가 갈게.”
최규환이 나섰다.
하지만 이철용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태준이를 잘 아니까 남아야지.”
SS급 정령 술사 최규환은 남았다.
이철용이 다른 사람을 쳐다봤다.
“박하림.”
“나?”
박하림 국가 헌터원 단장이 지목됐다.
“그래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어.”
“알았어. 게이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박하림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누군가는 저 헌터들을 이끌고 나가야 했다.
그들은 국가 헌터원의 힘이나 마찬가지였고, 게이트 밖에 나가서 헌터 협회와 싸워야 할 귀중한 무기들이었다.
잠시 후.
20여 명의 헌터가 남아서 뒤를 지키기로 했고, 나머진 모두 게이트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곳에 남은 헌터들은 모두 이철용의 최측근들로 국가 헌터원의 중추였다.
“우리 힘으로 놈을 잡을 수 있을까?”
최규환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태준이가 SSS급 괴수를 죽였잖아.”
“난 또. 무슨 걱정이야. 여기에 SSS급 헌터가 하나, SS급 헌터가 스물이 넘어. 나태준이 아무리 도경수를 죽였다고 해도 이 인원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해.”
“그렇겠지.”
나태준을 잘 아는 최규환은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느낌이었다.
태준은 불가능한 임무를 척척 해냈고,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게이트를 서슴없이 공략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언제나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의 엄청난 생존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규환은 지금 이순간 누구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숨어서 기습해야 하는 건 어때?”
반달 모양의 검기를 날리는 노병원이 물었다.
“아니, 어차피 그 사냥개가 있기 때문에 기습은 불가능해. 그냥 퇴로나 잘 막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게 나아.”
“알았어.”
“그럼 내 발록도 소환해 놓고 있을까?”
“그래, 모두 단단히 준비해. 그래야 피해 없이 놈을 잡지. 그리고 그 사냥개 놈은 먼저 죽여. 그래야 달아나지 못하지.”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경이 거대한 발록을 소환했고, SS급 네크로맨서 서강희가 켈베로스 세 마리를 소환했다. 마지막으로 이설록이 중무장한 오우거를 여섯 마리나 소환해 동굴을 막으며 옆으로 늘어섰다.
이설록(SS)은 과거 용산에 게이트가 뜰 때, 서울역에서 태준과 함께 괴수를 막은 적이 있었다.
그땐 동료였지만, 지금은 적이 되었다.
게다가 총검술을 하는 전사 계열의 강민수(SS) 서기관과 전격 마법사 이광옥(SS), 강철 주먹을 가진 강태산(SS)도 이곳에 있었다.
모두 태준과 게이트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였지만, 지금은 그를 겁박해 신급 아이템을 강탈할 생각이었다.
***
“크르르르르!”
지옥의 파수꾼 켈베로스가 입에서 화염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며 으르렁거렸다.
“왔나 보군!”
곧 어둠 속에서 커다란 사자 같은 괴수를 타고 온 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철용이 앞으로 나섰다.
“어서 와! 나태준. 기다리고 있었다.”
태준은 동굴에 일렬로 쭉 펼쳐져 있는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소름 끼치도록 공허했다.
그 순간 이철용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지? 이게 그 나태준이 맞나?’
뭔가 격이 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