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살자-132화 (132/149)

# 132

132. 내가 도살자다(3).

그것은 이철용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태준의 눈에서 일렁이는 공허한 무언가가 헌터들의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정령을 다루기 때문에 유난히 육감이 좋은 최규환의 머리는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고, 좋지 않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최민지나, 김상국일 줄 알았더니 너희였군.”

커다란 붉은 사자처럼 생긴 말볼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SSS등급 헌터답게 이철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을 등 뒤로 보냈다.

중력장을 쓸 때면 항상 손을 뻗었기에 나태준에게 지금은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왜 이곳에서 너를 기다렸는지 알겠지?”

“이것 때문이겠지?”

태준이 왼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가락에는 못 보던 반투명한 보라색 반지가 있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헌터 협회와 우리는 서로 원수지간이야. 그리고 그 헌터 협회는 연희를 공격하고 게이트에서 죽게 내버려 뒀지.”

“그런데?”

“솔직히 말하지, 우린 아직 최민지와 김상국과 전면전을 벌이기엔 부족해, 헌터 숫자도 적고 말이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반지를 우리에게 넘겨주는 건 어때? 그럼 네 복수를 도와주지.”

“내 대답이 어떨 것 같아?”

태준이 이철용을 오히려 떠봤다.

그러자 이철용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을 잘 모르나 본데, 태준이 네 대답은 중요치 않아. 그 반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다면 거절하지.”

“뭐?”

태준이 말을 하고 피식 웃었다.

“기어이 독배를 마시겠다? 후회할 텐데. 너의 도살자 길드원들을 생각해야지. 네가 없어지면 헌터 협회에 흡수될 거야.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자, 마지막으로 묻지 그 카라차크라의 반지를 넘겨 줄 텐가?”

“말이 많군. 뭐가 그리 두려운 거야?”

이철용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에 이미 헌터들은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퇴로를 막고, 공격하기 좋은 포인트를 선점했다.

“가져가고 싶다면 어서 가져가라고.”

태준이 손바닥을 펼치며 헌터들을 도발했다.

그 순간.

“게헤나의 불꽃!”

지옥의 저 밑바닥, 여덟 번째 지옥의 뜨거운 용암의 강에서 소환된 꺼지지 않는 불꽃이 소환되어 태준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이 불꽃이면 나태준을 단번에 녹일 수 있을 것이다.

화염 마법사 서상민은 이철용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쿵! 쿵!

발록이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뒤를 막아섰다.

한 손에 불의 검을 다른 손엔 불의 채찍을 들었다.

이철용은 마지막까지 뜸을 들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아진 것이다.

“가라!”

게헤나의 불꽃이 태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화악! 화르르르르!

동굴을 밝히는 거대한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나태준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불길을 피해 튀어나오면 공격할 생각을 하던 전사 계열의 헌터들이 조금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그냥 자살한 거야?”

“벌써 끝이라니, 생각보다 싱겁군.”

“설마, 신급 아이템이 불에 타진 않겠지?”

그들은 불에 탄 아이템을 걱정했다.

그런데.

“긴장해! 끝이 아니야!”

이철용이 소리쳤다.

불길 가운데 붉은 드래곤의 형상이 뿜어졌다.

말볼의 샤먼이 불에 반응해 튀어나왔다.

그리고.

말볼이 발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위에 태준이 없다?

“나태준을 찾아!”

서걱!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위로 솟구쳤을 뿐이었다.

“으...으아악!”

서상민의 비명이 동굴을 울렸다.

화염 마법사의 두 팔이 사라졌다.

잘린 양팔에서 피가 뿜어지고, 마법사는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쓰러졌다.

앞쪽에 있던 헌터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태준이 뒤로 갔는지 그들은 전혀 보지 못했다.

“여, 여기다!”

파지지지직!

마법사 이광옥이 달려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전격을 날렸다.

“죽어!”

동굴이 환해지며, 엄청난 백광이 번쩍였다.

SS급 괴수도 일격에 터트려버리는 번개였다.

촤악!

“헛!”

허리가 따끔거렸다.

그는 칼이 번쩍 꺼리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검은 그림자는 태준이 지나온 잔상일 뿐.

태준은 어느새 그의 뒤에 있었다.

“켈베로스! 가서 놈을 죽여!”

지옥의 켈베로스 세 마리가 달려갔다.

놈들의 목표는 태준이었다.

“크아아앙!”

“쿠아악!”

켈베로스들이 앞에서 달려오고, 옆에선 마력 소총이 뿜어졌다.

투타타타탕!

강민수가 지원사격을 한 것이다.

총알을 피하면서 켈베로스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태준은 그냥 앞으로 내달렸다.

켈베로스를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태준을 앞으로 보낸 강민수는 웃고 있었다.

아무리 태준이라도 머리 셋 달린 저 지옥의 파수꾼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도살자의 시선(視線)!”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켈베로스들이 순간 얼음이 된 듯 달리기를 멈췄다.

태준의 눈을 본 순간 자기 몸이 끔찍하게 찢기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절야(折也)!”

괴수를 자르던 백정의 칼이 소환수를 스쳤다.

파파팟!

정확히 소환수의 다리 하나만을 잘랐다.

그들은 이제 기동력을 잃었다.

그리고 태준은 켈베로스를 소환한 네크로맨서에게 달렸다.

“도, 도와줘!”

네크로맨서 앞으로 긴 도를 든 헌터가 길을 막으며 태준을 향해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오던 태준을 향해 수직으로 그어졌다.

일도양단(一刀兩斷)!

지난 십여 년간 자신을 지켜준 일격필살의 기술.

카앙!

내려치는 칼날을 백정의 칼이 스치며 지나갔다.

촤악!

“컥! 빠...르다!”

헌터는 그대로 쓰러졌다.

자신의 도를 옆으로 흘리며 태준이 칼을 그은 것이다.

태준의 칼은 이미 자신의 몸과 하나였고, 그 움직임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저리 가!”

쩌억!

켈베로스를 소환한 네크로맨서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두 손과 동시에 머리가 떨어졌다.

그가 사라지자 켈베로스들도 사라졌다.

“크릉!”

그 시간 말볼은 용맹하게 발록에게 달려들었고, 발록은 건방진 괴수에게 불의 검과 불의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볼은 빨랐다.

검을 피하고, 채찍을 뛰어넘어 발록의 팔목을 물었다.

화룡 헬라카스의 샤먼의 힘까지 더해지자, 팔목이 그대로 잘렸다.

“끄아아아!”

발록이 괴성을 질렀고, 뒤로 넘어간 말볼을 쫓았다.

촤악!

거대한 불의 검이 휘둘리자, 말볼을 앞에서 덮치려던 오우거 한 마리가 그대로 몸뚱어리가 잘렸다.

말볼은 주인을 닮아 영리하게 싸우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나태준을 잡아!”

이철용 역시 소리치면서 중력장을 쏘기 위해 태준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태준은 그때마다 교묘하게 다른 헌터들과 뒤섞여 있어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약은 새끼!’

태준의 움직임은 너무 민첩했다.

SS급 헌터의 공격을 어떻게 저렇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으악!”

도끼를 든 헌터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분명 도끼와 칼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는데 헌터가 죽은 것이다.

태준의 움직임은 수많은 경험이 녹아든 본능이었다.

SSS급 괴수인 카라차크라와 수천, 수만 번의 전투 경험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는 의식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몸이 반응하고 피하는 것이다.

“실피드! 놈을 죽여!”

SS급 정령사가 최상위 바람의 정령을 공격시켰다.

실피드는 양손에 바람의 칼날을 들고 태준을 뒤에서 공격했다.

촤링! 촤링!

바람의 칼날이 태준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하지만 태준은 바람의 칼날을 막지 않고, 몸을 숙여 피하며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다람쥐 같은 놈! 잡아!”

타탕! 투타타타탕!

강민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태준을 보며 소총을 쏘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자신의 장기인 총검술을 쓸 생각이었다.

“괴물 같은 새끼! 죽어!”

쉐엑!

소총 앞에 박혀있는 레전더리급 황금 단도가 태준의 심장을 향해 찔러졌다.

하지만 그 대상은 이미 사라지고, 허공을 찔렀다.

그리고 그 순간 강민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휭! 휘잉!

툭! 투툭!

강민수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강민수는 마지막 순간에 바람의 칼날을 휘두르는 실피드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미친!”

헌터들이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다.

차례로 동료들이 쓰러졌다.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태준을 공격하려 하면 어느새 다른 동료와 붙어 있어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너무 민첩했다.

“제길, 죽어!”

참지 못하고, 노병원이 검을 휘둘렀다.

파악! 파악!

검기가 달리는 태준을 향해 쏘아졌다.

쾅! 콰앙!

“커헉!”

태준은 몸을 틀어 검기를 피했고, 검기는 동료의 가슴에 맞았다.

“이런 젠장!”

“내가 잡겠다. 쇼크 웨이브!”

태준이 서 있는 땅을 향해 강철 주먹 강태산이 주먹을 내리쳤다.

그러자 지진처럼 땅이 갈라지고 위로 솟아오르면서 태준을 덮쳤다.

그 순간 검기 역시 태준을 향해 날아가고, 얼음 마법사의 얼음 화살도 한꺼번에 쏘아졌다.

콰앙! 파파파팍!

“쉬지 말고 계속 공격해!”

“아이스 토네이도!”

이철용의 고함에 노병원이 연이어 검기를 날렸고, 얼음 마법사는 극한의 얼음 토네이도를 날렸다.

그렇게 열심히 쏟아부었지만, 태준은 멀쩡한 모습으로 땅속에서 솟아올라 왔다.

“제길!”

태준이 강철 주먹 강태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죽어!”

SS급 괴수도 단번에 사지가 절단되는 검기가 옆에서 날아왔다.

캉! 카앙!

그런데 검기가 갑자기 굴절되더니 얼음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검기는 마법사의 가슴에 적중되고, 얼음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강철 주먹 연타!”

강태산의 가공할 주먹이 태준을 향해 뻗어졌다.

괴수도 순식간에 피떡이 될 위력을 가진 권풍이었다.

이십여 개의 권풍이 날아갔지만, 태준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했다.

주먹 하나만 더 옆으로 뻗었다면, 적중했을 것이다.

강태산이 다시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태준은 반대쪽으로 피했다.

너무나 신속하기에 태준이 옆으로 피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촤악!

태준이 자신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자 목이 따끔거렸다.

그것이 강태산의 마지막이었다.

“파쇄 중력장!”

이철용이 소리치면서 강태산을 죽이고, 다른 헌터에게 달려드는 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태준 앞으로 중력장이 생성됐다.

그런데.

촤악!

태준은 칼로 그 중력장을 반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주, 중력장을 잘라?”

중력장이 사라지자, 이철용은 믿을 수 없는 눈을 했다.

중력장은 공간을 찌그러뜨려 압축하여 대상을 공격한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력장이 태준의 칼질에 그냥 사라졌다.

'저 칼은 대체 뭐지?'

“으악!”

또 다른 헌터의 비명이 들렸다.

이철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악몽이었다.

하나둘 죽어가는 헌터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태준의 움직임은 이미 SS헌터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자신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SS헌터들을 완전히 유린하고, 처참하게 짓밟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빠르고, 어떻게 저렇게 피하고, 어떻게 저렇게 반격할 수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머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유령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나태준이 SSS급 괴수와 수천, 수만 번을 싸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SSS급 괴수는 여기 있는 어떤 헌터들보다 더 강했고, 더 많은 촉수를 이용해 태준을 죽음까지 몰아붙였다.

그런 태준이 겨우 SS급 헌터의 공격을 피하지 못할까?

“개새끼!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이철용이 양손에 서로 다른 중력장을 준비했다.

자신의 최고 비기를 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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