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 드러나는 실체(2).
“내가 가진 이 게이트 반지와 함께 파괴할 겁니다.”
신급 아이템인 게이트 반지를 파괴한다는 말에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게이트 반지가 사라지면, 더는 티베리안 차원과 지구를 잇는 게이트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럼 다시는 괴수가 지구로 들어오지 못하겠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상국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만약 게이트가 영원히 닫히면, 우리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의 마지막 질문에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건 연희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괴수가 없다면 우리 능력은 필요 없겠지요.”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괴수가 더는 지구로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이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건 반대합니다! 좀 더 일을 알아보고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괴수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티베리안인들이 지구에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헌터가 없다면 최첨단 무기를 가진 그들은 어떻게 상대할 겁니다.”
“맞습니다. 게이트 반지를 파괴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새롭게 헌터 협회의 이사가 된 전 귀족들이나, SS급 게이트에서 살아남은 몇몇 신귀족들, 국가 헌터원의 헌터들, 각 길드의 수장들, 그리고 해외에서 온 많은 헌터 대표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뜻밖에 반응이었다.
“차라리 최강해를 죽인 헌터가 게이트 반지를 소유하고 게이트를 관리하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게이트에서 나온 마석으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요로워지고, 새로운 문명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과거로 회귀하라니요.”
“맞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봐야 지구의 자원만 고갈되고, 미세먼지나 몰려오겠지. 뭐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헌터들이 힘을 모아 티베리안 차원을 점령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헌터들이 여러가지 이유있는 말들을 내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하나였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을 내놓기 싫었다.
자신들의 힘이 사라지면 그들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헌터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최규환이 헌터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일단 게이트 반지 문제는 최강해 성주를 찾고 나서 다시 의논하도록 합시다.”
이연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데, 티베리안 차원을 점령한다는 말에 또 얼마나 많은 헌터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지 걱정이었다.
강단에서 내려온 연희를 향해 태준이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먼저 찾아서 처리하면 되니까. 일단 놈이 숨을 곳을 없애는 게 중요해.”
“고마워, 태준아.”
평화를 바라는 진심 어린 연희의 마음을 알기에 태준이 위로했다.
***
며칠 후.
[펜트하우스]
“그래 연구 좀 해봤어?”
신급 아이템을 대하는 창수와 성하씨는 정말 신줏단지 모시듯이 조심스러웠다.
“방법 있는데! 내가 찾을 수 있는데!”
목소리가 한껏 올라간 기태가 신급 반지를 아무렇게나 들어 올렸다.
“헉! 조심해 기태야!”
창수가 손을 떨었다.
잘못해 망가지면, 큰일이었다.
사실 태준에게는 이런 신급 아이템이 2개나 있었다.
군주의 인장과 카라차크라의 반지.
하지만 두 개 다 태준에게 각인되어 아무 정보도 보이지 않았고, 쓸 수도 없었다. 그러니 신급 아이템 중에서 유일하게 정보를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연희가 가진 게이트 반지뿐이었다.
신급 아이템을 살펴보라고 순순히 넘겨준 연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니까, 최강해를 찾을 수 있다고?”
기태가 나를 한번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연희에게 말을 해주었다.
“이 반지를 내가 끼고 있으면, 다른 곳에서 게이트를 생성하는 순간 그 파장을 읽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게이트를 생성할 수도 있고요.”
태준이 연희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최강해을 찾으려면 기태가 이 반지를 끼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난 괜찮아. 어차피 지금 그 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벌써 보름째 각국의 헌터들과 정부에서도 최강해를 찾고 있는데, 그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원래 있었던 지하 헌터 시장 역시 비밀리에 관리했기에 이렇게 사라지자,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다들 멀리 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 벗어나지 마. 그리고 언제든지 최강해를 잡으러 갈 수 있게 준비를 해줘.”
“오케이.”
“알았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기용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최강해가 게이트를 열어 도망칠 수도 있잖아.”
“그렇겠지. 그럼 계속 추격하려면 기태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기용의 말이 맞았다.
연희 역시 괴수가 몰려오는 순간 게이트를 열어서 피하지 않았는가.
태준이 곤란한 표정으로 윤상희를 바라보았다.
윤상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기태는 내가 계속 보호할 거야.”
“그래요. 그럼.”
기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게이트 수신기 꼭 챙겨가요. 저쪽 차원으로 넘어가도 그곳에 있는 게이트로 다시 이리 올 수도 있으니까요.”
“아! 기태는 역시 머리가 좋구나. 좋은 생각이야.”
태준이 기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게이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수신기를 맴버들에게 나눠줬다.
“거리가 너무 멀면 찾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 그건 다들 알고 있어.”
지구는 각종 통신 장비와 핸드폰 기지국이 있었고, 위성도 있었기에 이 수신기로 전 세계의 게이트를 위치를 전부 살필 수 있었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범위가 상당히 좁았다.
그리고 기태가 끼고 있는 진짜 게이트 반지는 겉모습을 살짝 개조했다. 다른 헌터들이 반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연희는 창수가 만들어준 가짜 게이트 반지를 차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최강해가 게이트를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김상국은 어떻게 할 거야?”
“또 물어본다.”
연희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최강해 문제부터 처리하고 천천히...”
“여전히 넌 속이 좋다. 나 같으면 진작.”
태준이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연희가 웃었다.
“치,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이곳이 게이트 안이라면 진작 손을 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게이트 밖에서 놈을 처리하는 건 꺼려졌다.
그렇게 되면 신화 길드의 헌터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들이 무서워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의 태준이라면 혼자서 그들 전부와 싸우더라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제 질렸다.
“김치찌개에 무도 들어가나?”
연희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아무리 요리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김치찌개에 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넣어봐.”
“그래. 일단 담자.”
오늘은 연희가 자신을 구하려 달려 와준 팀원들을 위해 음식을 한번 대접하겠다고 말했고, 서울역 앞에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는 중이었다.
“양파도 들어가니?”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오늘 아무래도 국적 불문의 김치찌개가 탄생할 것 같았다.
연희와 나란히 장을 보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평화로운 일상이자, 꿈같은 시간이었다.
슬쩍 물건을 고르는 연희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가슴이 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때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그 말뜻을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이 순간 알 것 같았다. 연희가 보고 싶어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참 이쁘다.
사람들이 연신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있어도 연희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옆에 누구야?”
“그 있잖아. 게이트병 치료제 발견한 헌터.”
“아, 나태준.”
“맞아, 이번에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소문이 있어.”
“에이 설마? 내가 알기론 헌터 등급이 이제 A급인가 그럴 텐데, 어떻게 SS급 게이트를... 말도 안 돼.”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물론 유명인이었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좀 있다.
그런데 A등급이라니...
“그런데, 둘이 사귀나 봐.”
“그러게 신혼부부 같다.”
마트에서 장을 함께 보는 신혼부부의 분위기라도 풍겼나?
사람들의 귓속말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돼지고기도 사고, 쌀도 사고 온갖 재료를 사서 나왔다.
“내가 들을게.”
“어?”
“이런 건 남자가 들어야지.”
연희가 들고 있는 짐까지 모두 내가 들었다.
연희라면 한 손가락으로 트럭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바람에 날아갈까 걱정되는 사람일 뿐이었다.
연희가 뒤에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태준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장을 보고 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한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왜 전화는 안 받아?”
“어? 전화했었어?”
스마트폰을 들어보니 부재중이 3통화나 와 있었다.
“어라 그러네. 진동이라...”
“헌터가 정신을 어디에다가 팔고 다니길래...”
최한별이 조금은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치를 발견했는데! 지금 가야 하는데!”
기태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뭐?”
“최강해가 게이트를 열었어. 그리고 앞으로 2시간 후에 전국에 F부터 S등급까지 게이트가 열릴 거야.”
“헌터 협회와 국가 헌터원에는 알렸어?”
대답은 이수경이 했다.
“네, 길드장님. 두 그룹에 게이트 위치를 나눠서 알렸고, S급 게이트에는 도살자 길드원들을 파견시켰습니다.”
“잘했어. 우리도 준비하자.”
최강해를 잡기 위해 다들 모였다.
기태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손을 들자, 펜트하우스 안에 작은 게이트가 발생했다.
“다들 잘 들어. 최강해를 발견했다고 해서 절대 혼자 달려들지 마! 놈은 최소 연희나 나보다 더 강할 거야. 그러니 모두 힘을 합쳐 싸워야 해.”
“오케이.”
“알았어, 대장!”
최강해의 진짜 실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수많은 레전더리 아이템이 있었고, 연희처럼 신급 아이템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실력이 절대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말볼! 가자!”
사자 같은 말볼이 먼저 튀어나갔고, 태준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게이트로 들어갈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졌다.
‘세 개의 태양?’
여긴 티베리안 차원이다.
최강해, 이놈이 이쪽으로 피했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기태도 언제든지 티베리안 차원으로 연결된 게이트를 만들 순 있었지만, 지구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이곳에서 최강해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다.
그랬기에 놈이 게이트 반지를 사용해 게이트를 열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어? 티베리안 차원이네.”
뒤따라 들어온 연희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래, 놈이 이곳에 있어.”
그리고 팀원들이 따라 들어왔다.
“기태야, 어디쯤 있니?”
“저 언덕 너머에요.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게이트를 만들었어요.”
“잘했다.”
“저, 그리고 제가 게이트를 만든 건 저들도 알아요.”
“그러겠지. 어서 가자!”
기태와 윤상희를 남기고 팀원들과 언덕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보자, 분지 안쪽으로 검은 게이트 하나가 보였고, 전에 SS급 게이트에서 봤던 커다란 우주선 한 척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티베리안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지하 토굴 같은 데서 우주선으로 분주하게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어? 티베리안인이 파충류였어?”
몇몇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몇몇은 리자드맨과 생김세가 비슷했다.
티베리안인들은 기본적으로 파충류인 리자드맨과 생김새가 비슷했지만, 비슷한 크기의 인간이나 다른 종족으로 변신이 가능했기에 지구에서도 인간처럼 살 수 있었다.
“저기다!”
지하 헌터 시장 2층에 있는 최강해의 성에서 봤던 집사였다.
그가 자신들을 발견했다.
“쏴라!”
피슝! 피슝!
쾅! 쾅!
분홍색 광선이 언덕에 맞자, 큰 폭발이 일어났고 단 두 방에 언덕이 사라졌다.
“흩어져!”
그들의 공격력은 무시무시했다.
태준의 팀원이 최상위 헌터들 아니었다면, 이미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들이 언덕 위를 집중적으로 사격했다.
쿠앙! 쿠아아앙!
티베리안인들이 연신 무기를 발사하며, 커다란 우주선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크아앙!”
갑자기 말볼이 혼자 앞으로 내달렸다.
“헛! 위험해!”
저들이 앞으로 달려간 말볼에게 집중사격했다.
그러자 태준과 팀원들 몸을 사리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말볼은 자신들의 팀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분홍색 광선이 태준에게 날아오자, 백정의 칼로 막았다.
그러자 광선은 반사되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태준의 칼은 광선까지 막을 수 있었다.
“받아라! 용의 격노!”
콰앙!
수진이의 화살에 맞은 파충류 티베리안인이 그대로 날아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들에게도 헌터들의 무기가 통했다.
그런데,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앞으로 달려간 말볼이 광선에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이었고, 단번에 티베리안인 셋을 물어 죽인 것이었다.
게다가 우주선 앞을 지키던 커다란 로봇이나 탱크같이 생긴 기기 역시 말볼의 발톱 앞에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헉! 말볼이 저렇게 강했던가?”
“그러게 엄청난데!”
말볼 앞에 티베리안인들이 꼭 사자 앞에 선 맨 나약한 인간처럼 보였다.
팀원들은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고, 태준은 그 모습을 보곤 바로 인벤토리에서 SS급 괴수인 데블로스의 고기와 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