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 게이트 클리어 조건(1).
신, 또는 공허라 불린 존재.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위대한 존재.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불멸의 존재.
어쩌면 우주의 탄생과 함께 생긴 공허의 유산인 그것.
그것의 일부분으로 만든 생명체!!
하얀 우윳빛 덩어리를 잘게 잘라 손에 올려본다.
SSS등급 괴수이자, 괴수들의 모체.
이는 카라차크라의 신경 고기였다.
‘이걸 다시 먹어야 한다니...’
잠시 망설여졌다.
다시는 먹지 않으려 생각했었다.
그 끝없는 공허를 교감하기에, 지옥의 나락에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다시는 먹지 않으려 했다.
왜 이 괴수 고기를 챙겼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에 넣은 그 순간이 후회됐다.
하지만 그때 그 선택 때문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겼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저 게이트를 넘어가기 위해선 카라차크라의 능력이 필요했다.
애초에 카라차크라의 능력을 뽑아서 티베리안인들이 차원을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지금에 와서야 차원과 차원의 기운과 알 수 없는 것들이 섞이면서 누구도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정말 가능하겠어?”
연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차크라의 고기를 먹으면, 차원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태준의 표정이 좋지 않다.
연희가 그것을 읽었다.
“우리는 괜찮아.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걱정하지 말고, 최강해를 잡아. 그리고 게이트 반지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오면 되지.”
힘들게 다시 만났는데, 이별이라니...
태준은 망설였다.
이제 최강해는 자신의 함대를 잃었다.
더는 이곳 차원에 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고, 그 혼자서는 지구를 점령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여기서 다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태준씨, 부탁해.”
간절한 어머니의 눈빛이 보였다.
두 아들을 지구에 둔 윤상희의 눈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을 향한 길드원들의 눈빛.
그들도 가족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저쪽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는 다르므로...
“알았어. 내가 꼭 게이트 반지를 가지고 돌아올게.”
태준이 카라차크라의 신경 고기를 씹어먹었다.
아무런 맛도 향도 없다.
그저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무력감과 공허함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는다.
이게 부작용인가.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다.
저 심연의 깊고 깊은 바닥으로 떨어지는가?
아니면 저 끝도 없는 무저갱(無低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가.
나른하고, 기운이 없다.
깊은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이다.
내가 왜 이곳에 있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자고 싶고, 쉬고 싶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정신이 몽롱하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태준아, 힘내.”
이건 연희 목소리?
연희가 내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연희 언니, 태준 오빠는 좀 어때?”
한별이의 목소리도 들린다.
“똑같아.”
두 사람이 갑자기 침묵한다.
왜들 그러지?
내가 괴수 고기를 먹고 잠깐 잠들었었나?
눈을 떠야 해.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더 자다가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힘을 내. 태준아.”
연희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턱!
“헉! 태준아!”
“태, 태준 오빠?”
그리고 힘겹게 눈을 떴다.
두 사람이 날 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태준아, 괜찮아?”
갑자기 문이 열리며 수진이와 정기용도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나 보지?”
팀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희가 입을 열었다.
“넌 벌써 열흘이나 잠들어 있었어.”
“뭐? 열흘이나?”
“그것도 이곳 차원의 시간으로 그렇고, 지구 시간으로 하면 더 될 거야.”
뭔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자다 일어났더니 열흘이 통째로 사라졌다.
“여긴?”
통나무 지붕이 있었고, 자신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게이트 부근 바닷가야. 다들 이곳에 기거하고 있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열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몸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시원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길드원들이 저마다 통나무를 들고 집을 만들고 있었고, 몇몇은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벌써 바닷가 주변에 수십 개의 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가 보였다.
“그래도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았네.”
안도의 한숨이 지어졌다.
괴수 고기를 먹고 그저 나른한 기분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카라차크라의 고기를 먹고, 놈의 정신과 동화됐던 것이 분명했다.
왠지 그 괴수가 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지금도 우주, 저 차원 어딘가에 존재하는 카라차크라의 본질과 접촉한 것일까?
자신의 작디작은 뇌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그 존재를 느낄 뿐.
“태준씨, 정말 깨어났네! 이젠 괜찮은 거야?”
다가오는 윤상희가 보였다.
그녀는 내가 쓰러져 자는 순간 길드원들을 잘 다독여 이곳에 임시로 기거할 마을을 만들었다.
“미안해요. 너무 오래 잠들어서.”
“그런 말 하지마. 우리가 남이야? 깨어났으니 다행이야.”
***
정신을 차리고, 기름진 멧돼지 고기와 생선을 한껏 먹었다.
그리고 길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게이트로 향했다.
“너무 늦었다. 이제 최강해를 쫓아가 볼게.”
태준이 서둘러 몸을 돌리려 하자, 연희가 태준의 손을 꼭 잡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희의 눈빛이 글썽거렸다.
“조심해야 해.”
열흘이나 잠들어 있던 태준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더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내 실력 알지? 나 나태준이야.”
그렇게 웃으며 연희의 손을 잡고, 게이트 앞에 섰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해, 대장!”
“오빠, 잘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 게.”
연희와 팀원들,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마주하고, 자신을 둘러싼 도살자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돌아올게. 모두 기다리고 있어.”
태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연희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게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태준의 몸이 서서히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자, 연희가 눈물을 흘렸다.
***
어둠이 사라지고, 눈을 떴다.
이곳은 이제 익숙해진 공간, 티베리안 차원이었다.
자신은 정말 게이트를 넘나들 수 있었다.
이건 카라차크라의 신경과 놈의 생존 세포에 자신이 완벽히 동화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최강해의 모습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열흘이상 지났으니 다른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게이트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일까?
‘다시 들어가 볼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은 최강해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을 죽여 게이트 반지를 가져와 저쪽 세상에서 길드원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놈에게 위협적인 장소였으니, 다른 차원으로 간 것이 분명했는데 주변에 다른 게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지구의 헌터들과 괴수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강해는 티베리안 행성의 괴수를 다 처리하기 전까진 지구에 게이트를 계속 생성할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구로 돌아간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자신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 게이트 반지를 가진 기태라도 있다면 모를까.
‘내가 게이트를 찾을 수 있을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카라차크라와 동화가 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방금도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게이트를 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 카라차크라의 공허한 느낌을 떠올렸다.
그러자.
“허!”
이건 누구? 아니 무엇의 시선이지?
거대하고 높은 시선을 가진 다른 생명체에 눈으로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SS급 괴수 브라키페르마?’
거대한 다리와 거대한 몸체, 그리고 수많은 새끼 브라키페르마가 눈에 보였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 괴수의 눈을 통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수많은 괴수의 시선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 느끼고 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다 게이트를 떠올렸다.
“찾았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검은색 거대한 게이트가 보였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게이트의 미세한 파장을!
“아! 저쪽이군.”
태준은 혹시 몰라 이곳 게이트의 위치를 눈에 담기 위해 주변 지리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또 다른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빠르게 몸을 달리기 시작했다.
***
티베리안은 워낙 거대한 행성이었기에 태준의 빠른 발로도 일주일이나 걸려 가장 가까운 게이트 앞에 섰다.
눈앞에 거대한 게이트가 이글거린다.
그런데 2개다?
지름 1킬로미터의 거대한 게이트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지구로 가는 게이트가 아닌데.”
둘 다 S등급 게이트는 분명했지만, 이 하나는 지구로 향하는 그 게이트의 파장이 아니었다.
태준은 두 개의 게이트를 보자, 기태처럼 게이트의 파장이 서로 다르다는 걸 느끼고 구분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게이트 파장을 읽을 수 있구나!’
이건 분명 카라차크라의 능력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이트 주변에 수많은 괴수의 시체와 뼈들이 널려있었고, 우주선의 부서진 잔해와 티베리안인들의 시체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상황만 봐서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두 게이트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른 게이트도 있을까?”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수많은 괴수의 시선으로 다른 게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티베리안 행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작은 행성들에 있는 모든 게이트를 살폈다.
S급 게이트는 티베리안 행성 하나였고, 다른 행성엔 수백 개의 작은 게이트가 있었다.
“다른 건 모두 지구로 향하는 게이트군.”
전부 지구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눈앞에 이것 하나만은 다른 차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괴수의 눈으로 이곳 차원을 엿보다가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은 괴수 고기를 먹은 지 보름이 훨씬 지났음에도 카라차크라의 신경 고기의 효과가 계속 남아 있었다.
아니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카라차크라의 고기를 먹으면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괴수들을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 듯 이행하기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잘못하면 카라차크라의 고기를 먹고 영원히 공허에 빠져, 다시 깨어나지 못하거나 나태준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잡념을 버리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지구로 돌아가야겠다.”
게이트 앞에서 잠시 갈등했다.
결정은 빨랐다.
백정의 칼을 들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눈앞이 환해지자, 폭격에 맞은 것 같은 서울 시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게이트 클리어 조건이 떴다.
[지구(S등급) -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
지구의 인간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강력합니다.
특히 지구의 헌터들은 괴수를 이용해 티베리안 차원을 침략하고, 다른 차원들까지 집어삼키려 합니다. 그들이 티베리안 차원을 점령하면 평화는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게이트 클리어 조건 : A등급 헌터(300), S등급 헌터(30), SS등급 헌터(3)를 죽이시오.]
[현재 카운터 : A등급 헌터 - 71/300, S등급 헌터 - 19/30, SS등급 헌터 - 1/3.]
[보상 : ?]
‘이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