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의 지배자-10화 (10/148)

감독의 컷 소리가 끝나고 나는 현주를 보았다. 그녀는 거듭된 NG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녀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수상히 여긴 남자 스텝이 앞을 막아섰다. 뭐 그렇겠지, 술취한 놈이 슬금슬금 주연 여배우에게 다가가고 있으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주가 나를 발견했는지 밝게 웃으며 왔다.“여기는 왠 일이예요?”“아, 현주 씨, 아는 분이셨어요?”“네에~”“힘든가 보군요.”“네, 자꾸 NG가 나요. 하도 해서 이제는 기운이 다 빠졌어요.”“흠. 몇 번 NG가 났는데요?”나는 상큼하고 발랄한 그녀가 침울해 있는 것이 불쌍하게 보여 물어봤다. 그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벌써 11번째에요.”“아, 그런데 찰리 채프린이 <시티 라이트>라는 영화에서 장님소녀인 버지니아 셰릴이 부랑자를 부자로 알고 꽃을 파는 장면에서 무려 342번의 재촬영을 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3/12 쪽

내 말에 그녀가 ‘정말요?’하고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NG를 낼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실이라는 표시를 했다.“그냥 어디서 본 내용인데 유독 많이 했죠. 그 외에도 마릴린 먼로는 ‘버번 위스키 어디 있어요?’라는 단순한 대사를 59번이나 실수를 했었죠. 마음이 불편하면 NG가 나는 법이니 편안하게 하세요. 상대방의 실수도 과정이라 가볍게 생각하고요.”“완전 용기가 생긴다.”현주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을 외친다. 실수는 어디서든 계속된다. 영화에서 NG는 다시하면 되지만 우리의 삶은 대부분 반복불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여 어지간하면 NG가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영화의 대본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 내 삶에 NG가 났다면 당연히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NG니까 말이다. 감독이 ‘컷, 다시!’를 외치면 나는 20년 후의 그 호텔 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우리의 인생은 NG가 없다. 그래서 인생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잠시 재미없다고 만화책을 스킵하여 읽듯이 우리의 인생에서 시간을 건너 뛸 수 없다.현주는 두 번의 NG 끝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그녀가 모니터를  보며 ‘와우!’ 하고 환호했다. 감독도 마음에 드는 지 웃었다.그녀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4/12 쪽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일명 퍽치기를 당한 것이다.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는데 머리 뒤에서 피가 흘러내렸다.하아, 이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지갑도 휴대폰마저 빼앗긴 채였다. 옷마저 빼앗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는데 아마도 시간이 이른 때라 퍽치기를 하는 놈들이 서둘러 떠난 것 같았다. 시계도 빼앗겼으며 반지는 그대로 있었는데 빼앗으려다가 빠지지 않아서 그대로 두고 간 듯했다. 마르트라 오셀로는 내가 각성을 했기에 그 누구도 내 의지에 반하여 빼앗을 수는 없는 반지다.머리에서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어떻게 집에 가야할 지 막막했다. 할 수 없이 근처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접수하고 집으로 전화했다. 그리고 콜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나오셔서 택시비를 지불하였다.나의 모습에 아버지는 허어, 하고 탄식만 했다. 옷도 찢어졌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다가 굳어져서 떡이 되었다. 나는 비로소 마법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물론 지금도 배우기 위해 자크 에반튼이 남겨준 마법책을 보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열의는 없었다. 마법을 배워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열의가 사그라졌었다. 내 인생 자체보다 더한 마법은 없다고 비웃으며 등한히 여겼었다.병원에 가자는 어머니의 성화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상처부위가 약간 따끔거렸지만 5/12 쪽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피가 났으니 뇌출혈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 낮고. 어느 새 내 머리는 벽돌을 맞고도 끄덕하지 않을 정도로, 물론 피를 조금 흘리긴 했지만 튼튼해진 것이다.샤워를 하고 나서 카드회사에 분실신고를 했다. 막상 일을 당하고 나니 갑갑했다. 그다지 취하지도 않았는데 퍽치기를 당했다. 이는 그만큼 일을 벌인 놈이 악질이라는 말이다. 화가 아주 많이 난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다른 것도 아니고 뒤통수를 날리다니. 아내에게 20년 만에 뒤통수를 맞아 인생이 개떡이 되었던 나에게 이제는 물리적인 돌로 뒤통수를 맞다니, 너무 한 것 아닌가.화가 무척이나 났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당한 것은 맞는데 누가 했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술이 취하긴 했지만 알딸딸한 정도였고 서현주 씨 하고 이야기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도 멀쩡했는데 퍽치기를 당했다. 대한민국의 치안이 어쩌구 할 것도 없이 범행을 벌인 인간이 개차반이라서 발생한 사건이지 박봉에 근무하는 경찰의 탓은 솔직히, 아니었다. 뭐 별 수 있겠나. 자력구제 해야지. 웹서핑을 통하여 스파이캠을 구입했다. 스파이캠은 영화에서 나오는 시계나 볼펜 등으로 위장해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저렴한 것에 놀랐다. 먼저 안경캠코더DS의 9100s를 샀다. 사진촬영도 되며 동영상 촬영도 되는 이 안경의 해상도는 1280의 HD이며 용량6/12 쪽

은 16GB다. 사는 김에 UBS형태의 캠코더는 해상도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항상 들고 다닐 수 있는 Mini U8을 구입했다. 두 개 다 합쳐 100만원이 조금 넘었다. 내가 범죄에 노출되고 나니 믿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는데 구차하게 사람들의 증언을 부탁하는 것보다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형사사건의 변호사 의뢰비용이 최소 500만원인 것을 고려하면 이정도야 보험에 든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 이렇게 해서 월급쟁이의 돈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준비를 해놓으니 마음이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카드를 분실해서 누나의 카드로 긁었다. 아직도 에르메스 버킨백의 효력이 남아 있어서 쉽게 카드를 빌릴 수 있었다. 이래서 친남매지간에도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서로 아쉬울 때 말하기 좋다.내가 드래곤의 하트를 먹어 힘이 세지고 등산으로 체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뒤에서 치면 방법이 없다. 회사에 출근하니 내 자리에 또 그 의문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하아, 이건 또 어디서 구한 것이지. 스타벅스 자체가 출근하는 직장인을 노린 면도 있어 7:30부터 영업을 시작한다지만 내 출근 시간에 맞춰 이렇게 하기는 쉽지가 않다. 동그라미 로고 안에 왕관을 쓴 녹색의 ‘세이렌’이 아침마다 찾아오면, 나는 정말 그녀의 감미롭고 아름다운 향기에 내 영혼이 녹아내릴까? 알다시피 세이렌은 바다의 요정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영혼을 빼앗아 죽였다고 전해진다. 여자들7/12 쪽

은 이 달콤하고 자극적인 커피가 그녀들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스타벅스사의 술수라는 것을 알까? 뭐 나도 좋아하니 확실히 하워드 슐츠는 전세계를 통해 당콤한 커피향으로 사람들의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은 맞다.이 여자는 왜 이렇게 고전적이지,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주 씨를 흘깃 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소리를 내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어 그냥 마셨다. 젠장, 그녀는 나의 약점 하나는 완벽하게 알고 있군. 내가 이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야.나는 아직도 47년을 살아온 경험 많은 정신으로도 그녀가 나에게 이러는 것이 연기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아, 물론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녀가 이렇게 어리숙한 고전적인 방법을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발랑 까진 여자들이 도로 위를 질주하는 시대에 이건 마차가 지나가는 격이니 놀라는 것이다. 하여튼 지금은 그녀에게 관심을 둘 여지가 없다. 볼 때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에 가끔 내 눈을 현혹시키기는 하지만 내게는 쌓인 일들이 너무 많았다. 대체적으로 외국계 회사의 일이 국내대기업보다는 업무량이 훨씬 적은 편이다. 물론 회사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시스템이 잘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사실 회사생활 1년 차라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일이 체계적이긴 하였다. 여기도 8/12 쪽

서류양식이라는 것이 있지만 폰트나 서체까지 지정해주지는 않는다. 이들은 읽을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에는 관대한 편이다. 글이 읽으면 되었지 여기에 더 뭐가 필요한가라고 말하던 슐츠 어더만 이사의 말이 생각난다.점심시간에 미수 씨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작은 소리로 커피 고마웠어요, 속삭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초리가 마치 커플을 보는 눈동자들이다. 뭐 사람들도 눈은 달렸으니. 그녀가 아침마다 내 책상에 커피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본 사람이 있을 터였다.‘이 여자랑 사귈까?’미주 씨는 몸매도 예쁘지만 웃는 얼굴도 보기 좋다. 얼굴의 주근깨만 아니라면 꽤 미인일 텐데, 왜 그녀는 이것을 처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형수술이 보편화 된 이 시대에 주근깨 정도 빼는 거야 일도 아닌데.“식사 후 커피는 제가 살게요.”내 말에 미주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한다. 뭐 그렇게 얻어먹었으니 한번쯤은 사줘야 하겠지. 스타벅스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이긴 하지만 두 블록이나 떨어져 있다. 사실 스타벅스도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만 와~ 했었지, 이제는 후발업체와 그다지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다. 스타벅스가 뜬 것은 순전히 커피를 로스팅하는 기술 9/12 쪽

때문인데 요즘에는 그런 기술력 차이가 거의 없어진 것이다. 즉 나는 그냥 로스팅이 제대로 된 커피면 아무거나 좋다는 것이다.미주 씨에게 커피를 사주고 그것을 마시는데 서로 할 말이 별로 없어 멀뚱멀뚱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흠, 뭐 내가 한 유머를 하기는 하는데 그녀는 재미가 없는 타입인 것 같았다. 잘 웃고 친절하기는 한데 왠지 그녀의 얼굴에는 얇은 장막이라도 쳐진 느낌이다.일과를 마치고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미영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뭔가를 벌일 모양이다. 하지만 난 ‘노 땡큐’다. 대리만족을 할 생각이면 다른 분을 알아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오늘은 술을 사주세요.”“흠, 전 얻어먹는 것이 아니면 여자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쳇, 밥도 안 사준다, 술도 안 사준다, 너무 하시네요.”“하하, 전 예약을 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제 털려서 카드 한 장도 없습니다.”“네에?”“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다가 퍽치기에게 당했습니다.“어머나!”10/12 쪽

아름답고 귀여운 그 표정에도 난 안 속아요, 웃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좋아요, 제가 살게요. 나 같은 미인이 찾아와서 술까지 사야 하다니.”“미인인 것은 맞지만 미인이라고 술을 사줄 수야 없죠.”“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술을 사주시는데요?”“전 여자에게는 술을 안 사줍니다.”“뭐에욧!”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졌는지 놀라 입을 가리는 그녀를 보며 이렇게 귀여웠던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망가질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뭐 나도 그녀에게 목적이 있으니 가까운 곳으로 우리는 술을 마시러 갔다.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특히 술자리가 시끄러운 곳은 질색이었다, 결국 갈 수 있는 곳이 제법 비싼 바였다. 적당히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도 조용하고.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말씀하세요. 무슨 음모를 꾸미고 계시는지.”“음모요? 하긴 음모 맞네요. 목적은 당신을 유혹하는 거예요.”“헐~”“풉.”“정리도 못하시면서 문어발처럼 발을 뻗으면 곤란해져요. 난 치정사건의 주인공이 11/12 쪽

되고 싶지는 않아요.”“아, 맞다. 이제 당신 말처럼 좀 단순하게 살까 해요.”“그런데 사건도 정리 안 하시고 왜 나에게 자꾸 오시는 거예요?”“흠,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당신에게는 좋은 향기가 나요.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져요.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래요.”“그럴 리가 있나요?”“모르겠어요. 기분이 나빴다가도, 그리고 기운이 없다가도 당신 옆에 있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 조금 이용하기로 한 거예요.”“.......”12/1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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