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화
“강해져라! 약하면 죽는 게 세상이다!”
누구더라?
지독한 전장.
죽기 직전 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온몸을 바르르 떨어 댔더랬다.
남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가 뱉었던 그 말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13살.
전쟁터에 던져진 이후 온갖 발악을 해 대며 살길을 찾았다.
적들은 내가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다. 기회만 생기면 목을 베려고 들었다.
그래서 더욱 필사적이었다.
내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건 나 자신뿐.
시체가 남긴 무구를 들고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사력을 다해 눈에 익혔다.
죽은 척하며 적을 베고 고립된 전장에서 살아남고자 아군의 살점을 씹으며 버텼다.
어린 마족 혼자 살아가기에 마계는 너무나도 불친절한 곳이었으니까.
마계는 항상 전쟁 중이었고, 나는 항상 전쟁터의 중심부에 있었다.
* * *
시간은 흐른다.
시야가 넓어지고 내 걸음도 빨라진다.
산 같이 커 보이던 이들이 내 눈높이에 맞춰졌을 때 즈음, 나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
웬만한 마족도 내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나를 피해 달아나는 경지에 도달했다.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나는 백작의 자리에 올랐다.
귀족.
피라미드 위쪽에 군림하는 절대자의 칭호.
별 감흥은 없었다.
마계는 강자존.
마계는 강자가 모든 권리를 행하는 곳이다.
강한 자가 그만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었다.
부족하다. 갈증이 난다.
마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12명의 공작과 4명의 대공.
그들이 진정한 내 목표였다.
그리고 만약 그들마저 쓰러트린다면…… 지금은 공석인 마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크게 한 번 웃어 보는 게 내 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마계에서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약자가 아닌 강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콧대가 높아지고 자신감이 무르익었을 무렵.
나는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계를 4등분 한 대공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강했다.
격의 차이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전투에서 패한 뒤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오지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네놈이 랜달프냐?”
황폐한 대지. 생명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장소.
이곳에 누군가가 찾아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털을 곤두세우고 나타난 남자를 적대시했다.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나는 마신 데스브링어다.”
“…….”
할 말을 잃었다.
어떤 마족도 마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마신의 이름이 데스브링어이긴 하였다.
“랜달프, 랜달프 브뤼시엘.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마왕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미친놈이군.”
결국 쓰게 한마디 내뱉었다. 자칭 마신이 이번에는 마왕을 논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기 할 말만 꺼냈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만든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더욱 많은 땅, 더욱 많은 인간을 몰살하라! 결과에 따라 너는 마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자임을 나타내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마왕!
나는 미친놈의 허언에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가.
게임이니, 플레이어니 이해는 안 가지만 단지 마왕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내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꿈을 잃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단련한 다음 다시 대공들에게 도전장을 내밀 작정이었다.
“물론 너에게도 거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남자가 냉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난 번거로운 게 싫으니 묻겠다. 자, 할 테냐? 마왕이 되고 싶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반대로 고개를 젓는다면 나는 이대로 사라지리라.”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남자의 눈을 나는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눈을 쳐다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전신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마수 레비아탄의 몸에 전신을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허언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만한 존재감은 네 명의 대공에게서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고개 한 번 끄덕인다고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냔 안이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 안이했다. 너무!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대한 동굴 안에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마왕이 될 수 없었다.
중간 과정이 뭉텅 잘려 나간 건 당연한 일이다. 패배한 역사를 구구절절 읊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최후의 전쟁이 끝난 뒤 지구는 멸망했고, 마왕은 결정됐다.
마계 대공 아리엘만 살아남았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 역시 살아 있긴 했으나 곧 죽을 운명이었다. 양팔과 양다리를 잃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혼자 모든 걸 재량하고 해결하려 들었다가 큰코다쳤다. 혼자선 한계가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벌레 같은 것. 생존 본능 하나는 마족 중 으뜸이로구나.”
대공 아리엘이 질색하며 말했다.
쓰게 웃었다.
살아남으면 기회가 생긴다.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리 마음먹었기에 나는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난 듯하다. 막강한 생존 본능도 내 죽음을 막진 못했다.
여기까진가?
결국 나는 마왕의 그릇이 아니었던 건가?
빌어먹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그리 생각하며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하얀빛이 나를 덮쳤다.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신위를 잃은 신들의 마지막 정수였다.
마족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행성, 지구.
그곳을 지키려는 신들의 마음이었다.
급격한 과학의 발달과 기적을 배척하는 인간에 의하여 신위를 잃었으나 신들은 아직도 그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게 아주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크게 호응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과 나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직후 나는 지구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시에 환한 빛이 내 몸에 완전하게 스며들었고.
[직업이 마계 백작(던전 마스터)으로 갱신됩니다.]
[백작의 품격! 200,000PT가 지급됩니다.]
[극악의 마나 농도! 힘이 아주 크게 제약을 받습니다.]
[초보자 보호 기간(240일)이 적용됩니다.]
[던전 1층에 고레벨 마수가 무작위로 등장합니다. 마수는 초보자 보호 기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주의하세요! 무작위로 소환된 마수는 던전 마스터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
나는 무사히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