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4화
능력치는 보잘것없다. 검을 들자 크레이지 하운드가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크롸앙!”
전방위를 차단당했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달려든 크레이지 하운드를 발로 강하게 차 냈다.
덕분에 한쪽 방향에 구멍이 생겼고, 나는 그 방향으로 등을 맞댄 후 가볍게 검을 그었다.
모든 방위가 막혔다고 공격이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들어올 순 없다.
아주 짧은 틈.
그 틈만 발견할 수 있다면 다수의 상대를 제압하는 건 간단하다.
깨갱! 깨개갱!
죽은 크레이지 하운드는 해체되며 대기로 흩어졌다.
마나로 환원된 것이다.
애당초 이곳의 마나로 소환된 존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거 같던 크레이지 하운드의 숫자가 빠르게 줄었다.
100마리가량을 없애자 틈은 더욱 커졌고, 그 사이로 무분별하게 검을 놀렸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거 같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팔목을 뻗을 때마다 적어도 한 마리 이상의 크레이지 하운드가 스러졌다.
300마리를 모두 없애는데 10분 정도가 걸렸다.
[Victory. 모든 마수를 퇴치했습니다!]
쿠쿵!
상태창이 뜸과 동시에 닫혀 있던 석벽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숫자가 총 다섯 개.
다섯 갈래의 길 중 하나를 택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규칙을 정해 두고 움직이는 편이 낫겠군.’
일단 가장 우측에 있는 길을 선택했다. 앞으로도 갈림길이 나오면 막힐 때까지 우측으로 이동할 것이다.
행동 수칙을 정한 즉시 철검을 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있잖아요. 이히가 생각해 봤는데…….”
얼마쯤 걸었을까.
갑작스레 나타난 이히가 내 왼쪽 어깨 위에 앉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실체가 없는 요정이다. 던전 코어가 나와 연결된 상태여서 언제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었다.
왜 진즉에 안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유니크 스킬을 조합한 걸 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감탄했다.
이 작은 것은 생각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다!
“아, 귀 간지러. 누가 이히를 욕하나 봐요.”
이히가 귀를 팠다. 후, 하고 귀지를 불어 낸 이히가 재잘거렸다.
“어쨌든요. 유니크 스킬은 정말 얻기 힘들거든요. 완전 비싸고. 저 같은 건 평생 가도 못 구할 거예요. 그런데 그걸 마스터는 슥! 삭! 뿅! 하고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히는!”
무언가를 다짐하듯이 이히가 주먹을 꽉 쥐었다.
“……?”
“생각하는 걸 포기했어요. 이히~”
그러곤 바보 같이 웃으며 주먹을 풀었다.
이히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민하는 시간만큼 아까운 게 없더라고요. 이런 걸 보고 현명하다 하는 거겠죠?”
내가 아는 현명이란 단어의 뜻과 이히가 아는 현명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았다.
“대단하군.”
나는 영혼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걸 칭찬으로 들었는지 이히가 날개를 사정없이 펄럭였다.
“이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이히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보 같이 웃더니 쪽! 하고 뺨에 입술을 비볐다.
요정은 영체지만 던전 코어와 연결된 나는 만질 수 있다. 덕분에 느낌이 아예 없진 않았다.
“…….”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손을 들어 어깨를 털어 냈다. 귀찮은 모기를 쫓아내는 것처럼. 곧이어 손등에 부딪힌 이히가 꺅, 소리를 지르고 속절없이 날아갔다.
이히의 행동이 내심 기쁘긴 했지만 버릇은 초장에 잡아야 했다.
“힝, 너무해.”
잠시 후 돌아온 이히는 투덜대며 내 옷깃을 잡았다.
나는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히는 방금 전에 나타났고, 그사이 다섯 개의 분기점을 돌파했다. 아직 갈 길이 구만리지만 슬슬 몸을 쉬어 줄 필요가 있었다.
‘하나만 더 돌고 쉬자.’
시간은 한정적이다.
8개월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마냥 몸을 혹사시키는 건 좋지 않다.
여기서 죽어도 소멸되는 건 같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더 걷자 분기점이 나왔다.
거대한 방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지정된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하십시오. 남은 시간- 72:00]
[집중하지 않으면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방의 중앙에 네모난 모양으로 파인 장소가 있었다.
3일간 꿈쩍도 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에 잠시 고민하다가 발을 옮겼다. 어차피 쉬려 했는데 3일이나 가만히 있게 해 준다니 반가운 일이었다.
왜 명상 따위를 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집중은 자신 있는 분야였다.
나는 가볍게 땅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후회했다.
23일!
명상의 방에서 보낸 시간이다.
무려 23일이란 시간을 주구장창 명상만 하면서 보냈다.
빠드득.
이가 갈린다.
살짝 움직이거나 조금이라도 정신이 풀어지면 어김없이 시간은 초기화가 됐다. 귀신같이 내 정신 상태를 알아보는, 무서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가 그렇게 잡념이 많을 줄 몰랐다.
집중과는 전혀 다른 분야다. 집중은커녕 마음을 비워야 한다. 메시지창에 띄워진 문구는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23일이 걸렸다.
운이 나빴으면 8개월 내내 명상만 하고 있을 뻔했다.
‘수련의 방에 관한 소식이 괜히 10년 뒤에나 들린 게 아니군.’
하기야…… 수련의 방은 던전 마스터라면 전부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에 관련된 소식이 10년 뒤에 귀에 닿았다.
그만큼 깨기 까다롭다는 것일 테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조금 더 긴장해야겠어.’
너무 쉽게 생각했다. 끈을 바짝 조일 필요가 있었다.
몇 차례 목을 꺾었다.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 분기점에서 뭐가 튀어나와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 * *
[검을 100,000번 휘두르십시오.]
[물구나무로 방을 50바퀴 도십시오.]
[도망 다니는 ‘광증 돋은 토끼’ 10마리를 잡으십시오.]
[상태 이상 ‘저주’에 걸립니다.]
혹시 내가 운이 없는 걸까?
분기점의 미션을 80개째 받았을 때 불현듯 든 생각이다.
90개를 넘어 100개에 달했을 땐 반쯤 수련의 방과 내가 인연이 없다고 여겼다.
쓰게 웃으며 꾸준히 미로를 탐험했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110, 120…… 149!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면 진즉 포기했을 거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149개의 방을 돌 수 있었고, 150개째의 방에 들어선 그 순간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방을 막은 석벽은 하나뿐이었다.
끝인가?
[보스, 수호자 아르칼을 퇴치하십시오!]
끝이다!
눈을 번뜩인다.
아르칼은 2미터 크기의 갑옷형 마수였다.
나는 전력을 다해 아르칼을 부쉈다. 능력치는 쓸 만했지만 149개의 방을 돌며 강해진 나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마침내 아르칼을 쓰러트리자 배경이 바뀌었다.
어느새 나는 던전 코어 앞에 서 있었다. 동시에 몇 개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수련의 방 마지막 보스, 아르칼을 격퇴했습니다!]
[최초로 수련의 방을 클리어했습니다. 칭호 ‘불굴의 전사’가 주어집니다.]
[최초로 수련의 방에 존재하는 모든 분기점을 돌파했습니다. 300,000PT가 지급됩니다.]
대략 8개월간 고생한 성과가 비로소 나타났다.
입을 굳게 다물고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어 마음을 가라앉힌 후 두말할 것 없이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랜달프 성: 브뤼시엘
직업: 마계 백작(던전 마스터)
칭호:
* 불굴의 전사(Exceptional Unique, 모든 능력치+2)
능력치:
힘 76(+2) 지능 48(+2)
민첩 72(+2) 체력 80(+2) 마력 62(+2)
잠재력(338+10/500)
특이 사항: 없음
스킬: 스킬 조합(R), 심안(U)
[전후 비교]
힘 64 지 42 민 59 체 72 마 50 잠재력(287+0/500)
힘 78 지 50 민 74 체 82 마 64 잠재력(338+10/500)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무엇보다 칭호에서 눈이 떠나질 않았다.
불굴의 전사.
익셉셔널 유니크라니!
모든 스킬이나 칭호, 아이템의 등급은 노멀, 레어, 유니크, 에픽, 레전드 순으로 값어치가 정해진다.
그중 익셉셔널은 아주 뛰어나지만 그다음 등급보다 약간 못 미칠 때 붙곤 했다.
에픽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유니크로서는 뛰어난.
그것이 익셉셔널 유니크 등급이다.
참고로 에픽 이상 등급의 무언가를 누군가가 얻었다는 소식은 거의 들어 본 적 없다. 최후의 최후까지 말이다.
허나, 불굴의 전사는 에픽과도 견줄 만했다.
무려 모든 능력치를 올려 주는 칭호다. 특히 내게 있어선 한 가지에 특화된 것보다 훨씬 나았다. 부족한 능력치를 보강할 수 있으니까.
능력치 총합 348. 이 정도면 72명의 마족 중 선두 주자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앞쪽에 위치해 있으리라 확신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 댔던가?’
인간들이 자주 입에 담던 속담이다. 그 말 대로였다. 거기다 300,000PT까지 얻었으니 8개월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제…….’
목적은 달성했다.
초보자 보호 기간도 거의 끝나간다.
포인트도 충분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을 강화할 시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