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8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는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고통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방금 전 일이 꿈과 같이 느껴질 정도다.
내 옆에선 이히가 불안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꿈으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이제 3일째예요. 이히는 마스터가 죽는 줄 알았어요. 훌쩍! 마스터 바보, 멍게, 해삼, 말미잘…….”
이히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주먹을 쥐고 내 옆구리를 때렸다.
그러나 이히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 내고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3급 이스터 에그. 나락 군주의 심장.’
보상 목록이 나타나다가 난데없이 나락 군주의 심장이 파고들었다. 나타난 걸로도 모자라 강제 이식을 당하고, 몸을 빼앗길 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락 군주의 영혼은 소멸되었다. 뒤에 남은 건 심장의 동조 현상과 몸서리쳐질 수준의 고통!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허나 지금은 몸이 가볍다. 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나는 여러 동작을 취하며 몸을 움직였다.
‘혹시?’
무언가가 바뀌었다면 상태창에 갱신이 됐을 것이다. 움직임을 멈춘 채 빠르게 상태창을 불러왔다.
이름: 랜달프 성: 브뤼시엘
직업: 마계 백작(던전 마스터)
칭호:
* 불굴의 전사(Ex U, 모든 능력치+2)
능력치:
힘 77(+2) 지능 63(+2)
민첩 73(+2) 체력 80(+2) 마력 82(+2)
잠재력(375+10/500)
특이 사항: 나락 군주의 심장을 이식했습니다. (온전한 힘을 개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킬: 스킬 조합(R), 심안(U)
[전후 비교]
힘 78 지 50 민 74 체 82 마 64 잠재력(338+10/500)
힘 79 지 65 민 75 체 82 마 84 잠재력(375+10/500)
“……미쳤군.”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다. 그 정도로 지금의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내 고질적인 문제였던 지능과 마력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지능이 15, 마력이 20……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상승할 여력이 남아 있었다.
지능이 높으면 뭐든지 배우는 속도가 빨라진다. 당연히 스킬의 숙련도도 빠르게 올릴 수 있다. 상태 이상을 거는 상황이나 스킬에 더욱 저항할 수 있게 된다.
마력은 스킬의 파괴력을 올려 준다. 아무리 좋은 스킬을 익혀도 마력이 낮으면 소용이 없다. 또한 지배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까?
나는 태생적으로 그 두 개의 능력치가 낮았다. 능력치는 고르게 올리는 것이 제일 좋지만 올리려고 해도 쉽게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락 군주의 심장으로 인해 고질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지능은 조금 더 올릴 필요가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군.’
육신을 뺏겼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지금은 온전히 심장을 받아들인 상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세상이라더니, 딱 들어맞는 상황이지 않은가.
헛웃음을 흘렸다.
‘초보자 기간 안에 몇 개의 업적을 클리어하는 것이 개방 조건이었던 모양인데…….’
느닷없이 업적에 따른 점수를 매긴 걸 보아 그것이 개방 조건인 듯싶다.
그리고 이스터 에그를 만든 마신도 나락 군주의 심장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경고가 두 번이나 튀어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리라고 확신하는 이유도 있었다.
‘나락 군주의 심장에 비하면 목록에 보인 것들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정말 3급의 보상이 맞는 걸까?’
무려 에픽급의 아타샤의 검, 마룡왕의 뿔, 아예 마수 군단 하나를 통째로 얻을 수도 있는 기회였지만 그런 것들과 비교해도 나락 군주의 심장은 격이 다르다.
3급의 보상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시스템상의 실수이거나 나락 군주가 무슨 수를 써서 시스템상의 허점을 만든 것이거나…….’
불현듯 드는 불안에 인상을 굳혔다.
‘설마 준 것을 도로 뺏어 가진 않겠지?’
이미 이식은 완료됐다. 다시 빼 간다면 나는 확실하게 죽는다.
나는 나락 군주의 영혼도 마신이 만든 시스템에 의하여 요격당했다고 생각했다. 부작용을 없애 줬다는 건, 그대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닐까?
‘하여간 기분은 좋군.’
다소 찝찝하긴 했으나 나는 강해졌고,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니만큼 기분이 좋았다.
“마스터?”
내가 웃자 이히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 *
사건이 일단락되고 3일이 더 지났다. 그간 나는 던전을 보강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씩 수정하고 있었다. 강해진 내 수준에 맞춰서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포인트 잔여: 324,579]
‘생각보다 포인트가 안 모여.’
포인트창을 확인하곤 눈썹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때는 240,722PT를 남겼었다. 거기에 검을 사는 데 들어간 2만을 빼고 10만을 더하면 20여 일간 순수하게 벌어들인 포인트는 3,857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은 인간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
이러니 더욱 업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당장 빠르게 포인트를 벌어들일 수 있는 일은 업적뿐이 없었다.
던전을 정형화하여 안전하게 용사를 키워 낼 필요가 있었다. 황금 알을 낳는 오리는 아직 새끼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보았던 인간의 잠재력도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
며칠 전 보았던 인간. 이름이 김용우였던가?
겁을 먹어 오줌을 지리는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잠재력은 나쁘지 않았다. 성장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심안을 통해서 본 당시의 상태창을 되새겨 보았다.
이름: 김용우
직업: 용사(전사)
칭호: 없음
능력치:
힘 38 지능 30
민첩 36 체력 34 마력 13
잠재력(150/322)
특이 사항: ‘천명회’ 길드 마스터.
스킬: 기본 검술(N)
이 정도 잠재력은 인간들 사이에서 적당히 강한 수치다. 한계치까지 성장한다면 어지간한 마수는 홀로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상에 없는 걸 보면 전생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인간은 아니다. 그럴 수준의 잠재력도 아니긴 했지만 특이 사항이 눈에 밟혔다.
‘천명회. 들어 본 것도 같은데.’
턱을 괴이고 곰곰이 고민했다. 내 기억력은 나쁘진 않아도 월등히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당연히 전생의 일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천명회란 이름이 귀에 익은 걸 보면 기억 저편 어딘가에서 들어 봤음이 분명하다.
“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던전이 있는 곳은 한국이란 나라의 영토 한중간이다. 정확히는 북한산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한산 꼭대기에 내 던전이 얹혀 있다고 보면 된다. 허공에 떠 있거나 하진 않았다.
면적 21㎢, 높이 4,733미터……였던가? 실제로는 그보다 배 이상 크지만 인간들의 육안으로는 딱 저만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천명회는 한국의 5대 길드 중 한 곳이었다. 나름 유명했지만 한국 한정이었고, 나는 던전을 잃은 뒤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기에 실제로 직접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어슴푸레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건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마법사 ‘번개의 여왕’은 인간 중 가장 강하다는 10강에 들진 않았지만 웬만한 마족과 마수는 그녀를 상대하는 것에 난감함을 표했다.
번개의 여왕은 소수의 적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특화됐다. 수천 발의 번개가 지상을 강타할 때면 전율이 일 정도였다.
게다가 강한 아군의 뒤에서 번개만 날려 댔다. 위험하다 싶으면 번개를 타고 도망갔다. 12공작 중 한 명이 그녀를 놓친 뒤 노발대발하던 걸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워낙 강렬한 용사이다 보니 그녀의 뒤에 있던 천명회의 기억은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길드 마스터가 바뀐 건가?’
김용우의 특이 사항에는 그가 길드 마스터라고 나와 있었다. 아마도 모종의 일을 겪고 길드 마스터가 교체되는 듯싶었다.
‘던전에서 얻을 건 이제 없을 것 같군.’
초보자 보호 기간이 끝났다. 던전의 일도 대충 마무리 단계다.
‘인간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됐다.’
던전 안에만 콕 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생과는 다르게, 마족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강해질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었다.
왜 그게 마족이 절대 할 수 없는 방식이냐…… 하면 네 명의 대공들 때문이다.
그들은 프라이드가 미친 듯이 높다. 자신의 힘에 막강한 믿음이 있다. 인간들 사이로 들어가 혼란일 일으키는 등의 일 따위,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만 년이나 암살 시도 한번 없이 우직하게 전쟁만 해 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암살 자체가 통하지 않는 위인들이긴 했지만.
나를 제외한 71명의 마족은 모두 네 명의 대공 중 한 명에게 속해 있었다. 그러니 대공을 거스르는 짓은 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작정하고 뒤흔들었다면 지구 따위 10년 안에 멸망했을 거다.
문제는 그러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사들이 강해지며 마족을 강하게 압박했다는 것이다. 마족은 네 갈래로 분열되어 있으나 인간은 똘똘 잘도 뭉쳤다. 그 결과 많은 마족이 소멸됐다.
그러나 나는 밑바닥부터 올라온 존재. 직접 백작을 죽여 그 자리를 꿰찼다. 말하자면 이레귤러다. 내겐 아무런 제약이 없다.
‘지금이 적기다.’
전생에선 빠르게 얼굴이 알려졌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나는 결코 던전 마스터로 인간들에게 얼굴을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용사가 된다.’
마족이 용사라?
웃기는 일이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용사로 활동하며 인지도를 쌓고 잠재력이 매우 높은 이들을 엄선하여 직접 키운다. 이후 다른 마족의 던전을 친다. 나는 그들을 앞에서, 뒤에서 조종하며 내 자신의 실력과 던전을 보강한다.
완벽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다.
한국이란 땅에선 우수한 용사가 많이 배출됐다. 비좁은 땅덩어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세계 레벨의 용사가 많았다. 그중 유명한 이들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계획을 어느 정도 머릿속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제 진짜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