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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0화 (10/242)

던전 사냥꾼 10화

* * *

태양이 중천에 걸린 점심 무렵.

나는 한가로이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잘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그 뒤를 따르며 진땀을 빼는 여인들의 모습은 나로서도 이색적인 것이었다.

‘평화롭군.’

착용한 선글라스의 테를 한 번 쓸었다.

던전이 생기고, 마수의 존재가 밝혀졌음에도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 이상 이 평화는 제법 오래 이어질 것이다. 전생의 나는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죽였기에 그들의 평화 역시 짧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던전 근처는 황무지가 됐다. 폐허가 된 도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용사가 되기로 하였으니 달라져야 한다. 전생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내게 검을 겨누지 않는다면 나도 그들을 적대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당장은.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아.’

한 번 죽어서 그런가?

여유롭다.

내 스스로가 생각기에도 아량이 넓어진 것 같았다.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가만히 그들을 구경하는 일 따위, 전생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강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나보다 월등하게 강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개의치 않는다. 강자의 여유다.

무엇보다 용사가 되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진짜 용사가 되기 위한 일환이었다.

나는 현시대의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행동 양식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선 관심도 없었고, 그럴 틈도 없었다.

악에 받친 인간이 얼마나 끈질긴지는 수도 없이 겪어 봤으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아직 인간들은 평화롭다. 특히 이곳 대한민국은 특수했다. 항상 북한이란 위협을 달고 있어서인지 던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제는 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둬야 한다. 그들을 분석하고 파악해 완벽히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시간과 공을 들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김용우 덕분에 편해졌지.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어.’

문득 던전을 빠져나오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던전을 빠져나오자마자 몇 쌍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왔었다.

그들은 김용우가 고용한 심부름꾼이었다.

외형과 인상착의가 대충 그려진 종이 한 장만 믿고 주구장창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 기간이 2주일이다. 끈기만은 칭찬해 줄만 했다.

덕분에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길드 하우스에서 다시 만난 김용우는 자처하여 내 부하가 됐다. 그는 나를 신격화하고 있었다. 알아서 기어와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췄다.

한 번 구해 준 게 다인 나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당시의 일이 충격적이었단 말이겠지만.

손해 볼 것도 없었기에 겸허히 받아들였다.

김용우는 용사들 사이에서 제법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목표를 생각하면 수족으로 사용해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를 앞세우고 내가 뒤에 서면 완벽한 포지션이다. 당장 주목을 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신분증도 생겼고…… 나도 이제 이곳의 국민인가?’

지갑을 꺼내 신분들을 확인한 나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김용우는 내 신분도 만들어 줬다.

이름과 성은 그대로고 대신 귀국 자녀라는 설정이 추가됐다.

9살 때 한국을 떠나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걸로 되어 있었다. 김용우가 ‘미국 하면 역시 하버드죠.’라며 순식간에 정해 버린 것이다.

중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는데, 확실히 단순한 감은 있었다.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행동만 자유로우면 족했다.

“옆에 자리 있어요?”

아까부터 나를 힐끗 쳐다보던 여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대답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잠깐 천명회에 들렸을 때부터 따라붙은 꼬리였다.

‘귀찮은 여자가 붙었군.’

내심 혀를 찼다.

언뜻 스쳐 지나가듯 본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내가 알던 때와 모습은 조금 많이 달랐지만 ‘단비’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분명하다. 그래도 확신을 가하기 위해 시선을 돌려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아린

직업: 용사(궁수)

칭호: 없음

능력치:

힘 25 지능 34

민첩 47 체력 23 마력 30

잠재력(169/401)

특이 사항: ‘단비’ 길드 마스터

스킬: 조준(N), 빠른 연사(N)

‘역시.’

틀림없는 것 같다.

살짝 치켜진 눈매와 뚜렷한 이목구비, 뾰족한 콧날, 얇고 뚜렷한 입술은 확실히 눈에 띄는 미인이라 할 만하다.

허나 전생에서 그녀는 얼굴 반쪽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누구보다 끔찍한 몰골로 나를 추격하던 게 이 여인이다.

왜 그런 몰골로 나를 쫓았는지 짐작은 갔다.

여인이 화상을 입은 것은 반쯤 내가 원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던전이 끝장나기 직전의 일이다.

던전 코어가 위협받자 하는 수 없이 남은 포인트를 탈탈 털어서 최상위 화염 마수를 고용했는데, 여인은 그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듯싶었다.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길드는 나를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겼다. 계속해서 벌어진 추격전 끝에 몇 번이나 나를 벼랑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결국 승리자는 나였지만 나도 피해가 막심했다. 회복하는 데 1년은 족히 걸렸다.

‘인연은 돌고 돈다, 이건가.’

얼마 전에 찾아온 남자에 이어 이번에는 단비 길드의 마스터다.

쫓아낼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 봐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이런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전생이라면 모르되…… 모든 일이 초기화된 지금, 그때의 일을 왈가왈부하는 건 괜한 심력 낭비다. 굳이 손을 쓴다면 상대의 의도를 알게 된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살짝 내리깔자 여인의 눈동자가 보인다. 마치 눈싸움 하듯이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용무지?”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내가 말을 먼저 꺼내길 기다린 것 같았다.

아린은 어깨에 멘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집었다. 그러더니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연락해요.”

“……?”

무심한 반응에도 아린의 눈초리는 아름다운 곡선을 유지했다.

그녀는 일어나며 은근슬쩍 내 어깨를 쓸었다.

“전화, 기다릴게요.”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혼자 남은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맛살을 구겼다.

‘저 인간 여자…… 뭐 하자는 거지?’

의도를 알기 어렵다. 끈질기게 따라붙었으면서 대뜸 명함 한 장만 주고 떠나가다니? 이보다 비효율적일 수가 없다.

거기에 어깨는 왜 건드린단 말인가. 적대적인 기세가 느껴졌다면 대처했을 것이나 딱히 그렇지도 않아서 의문만 생겼다.

‘유혹인가?’

나는 여자를 잘 모른다. 남성으로서 각성하기 전에 전쟁터에 있었다. 300년간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미녀는 특히 조심할 몇 가지 것 중 하나다. 미녀의 품에 이끌려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 이들을 숱하게 봤다.

네 명의 대공을 비롯한 휘하의 귀족들은 그런 수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마계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살육을 좋아하는 마족도 있고, 남자의 정을 갈취하려는 서큐버스도 있고, 전쟁터에서 낙오된 이를 터는 스캐빈저들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여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강해지면서 느끼는 희열이 성교의 쾌감보다 더욱 크다고 여겼다.

물론 필요에 의해 몸을 나눈 경험은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성욕은 있었다.

정신 이상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육체를 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교감 없이 이뤄졌다.

그쪽으론 눈치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상대를 잘못 찾아왔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

당연히 아린이 명함을 준 이유도 따로 연락하여 묻고 싶을 만큼 궁금하진 않았다.

명함을 바닥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있다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올 거다. 딱히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나도 신경 끄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녀의 잠재력은 인간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내가 여태껏 본 이들 중에서는 최고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직접 키워서 싹을 개화시킬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생에서 본 그녀의 성격으로 확신하건대, 쉽게 나를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길드 마스터라는 위치도 있어서 더욱 제약이 많았다.

내게 필요한 건 나만을 따르는 나만의 공격대였다. 진정한 소수정예. 앞으로 나서면 수많은 이가 자동으로 뒤따르는 그런 파티를 원했다.

‘이제 인간의 레이드라는 걸 경험해 봐야겠다.’

아린에 관한 일을 뇌의 구석으로 치운 뒤, 주차장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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