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4화
나를 포함한 전사 한 명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전사는 김수환이다.
그 뒤에서 궁수와 마법사 이지혜가 공격을 준비했다.
날이 선 단도를 든 시프(Thief) 박은택은 근거리 딜러와 원거리 딜러 사이에서 틈을 보완하는 역할이었다.
던전 탐험이 처음인 박은택은 단도를 꾹 쥐고 마른 입술을 연신 핥았다.
사령술사 김인필은 제일 뒤쪽에서 숨을 죽였다. 마수의 시체가 없는 지금, 그가 할 것은 응원뿐이 없었다.
캬아악!
성체라 해 봐야 1미터 크기인 고블린이지만 녀석들이 휘두르는 손톱과 이빨은 위협적이다. 턱의 힘이 워낙 강해 물리면 살점이 대량으로 뜯긴다. 잘못 물리면 즉사다.
한 마리는 주운 걸로 보이는 검을 꼬나 쥐고 있었다.
곧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고블린 두 마리가 도착했다.
“워터 스피어!”
동시에 마법사 이지혜가 스펠을 외웠다. 물의 창이 완성된 즉시 그녀의 손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 뒤를 화살이 따랐다.
키힉!
한 마리가 고꾸라졌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배에서 피가 철철 흐름에도 자리에서 일어난 고블린이 더욱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방패를 든 가더 윤혁수와 김수환이 앞을 지켰다. 나도 적당히 검을 펼쳐 공격만 막아냈다.
‘시늉만 해야겠군. 내가 나서면 이곳에 참가한 의미가 없으니까.’
그사이 박은택이 단도를 돌려 고블린 하나의 공격을 막고, 그사이 다른 이들이 그 고블린을 처리했다.
남은 것은 이제 한 마리. 빠르게 둘러싸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첫 사냥은 성공적이군요. 어때요? 할 만하죠?”
윤혁수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어그로 진짜 잘 끄시네요. 꽤 많은 공격대에 참가했는데 단연 돋보이십니다.”
김수환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사냥할 동안 어그로가 거의 튀지 않았다. 그나마 잠깐 고개를 돌려도 금세 다시 윤혁수를 노렸다. 어그로의 귀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수준이다.
윤혁수는 고블린의 시체 옆에 서더니 검을 들어 배를 좍 갈랐다. 심장이 급속도로 줄어들며 작은 돌멩이처럼 모습을 바꾸었다.
코어다.
“크기가 괜찮군요. 이 정도면 150은 받겠는데.”
시작이 좋다. 나머지 한 마리의 고블린에게서 나온 코어도 평균치보다 컸다.
코어 두 개를 회수한 윤혁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곤 물었다.
“아, 맞다. 초보자분들은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박은택이 더듬으며 말했다.
몇 번 단도를 움직였지만 타격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괜찮은 성과긴 했다.
첫 사냥이니 충격이 있을 텐데 나름 의젓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내 던전을 내가 터는 게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이 정도 수준에서 어떤 식으로 사냥이 이뤄지는지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초보자는 꽤 애를 먹겠어. 공격대를 잘못 만나면 죽기 딱 좋겠군.’
잠재력이 매우 높은 초보자가 첫 던전 공략에서 죽는다면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던전의 난이도를 더 낮출 순 없으니…… 이 부분은 그냥 놔둬야겠지. 잠재력이 높아도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에 죽는다면 결국 별거 없는 인간이란 소리.’
지금도 충분히 낮다. 여기서 더 낮추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아니, 애당초 코볼트나 고블린보다 급이 낮은 마수는 찾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공격대에 참가하며 공격대원의 입장에서 던전을 살폈다. 약한 용사가 어떤 식으로 위기를 헤쳐 가는지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
게다가 막 전쟁터에 던져졌을 때 나를 보는 기분이라서 각별하다. 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 그런 게 느껴졌다.
“휘유! 굉장히 순조롭군요.”
몇 차례 마수를 물리친 뒤 윤혁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2시간이 지난 무렵이었고, 그간 모은 코어는 13개였다. 벌써 개인당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일행들 뒤에는 죽은 고블린 한 마리가 좀비마냥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사령술사 김인필이 조종하는 마수였다.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군.’
그 모습을 새삼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때 윤혁수가 짐을 풀며 말했다.
“잠깐 쉽시다.”
2시간의 강행군.
쉴 때가 됐다.
하지만 아무 장소에서나 쉴 수는 없다.
마수가 다가오면 알아차릴 수 있고 마수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 하지만 그런 장소는 찾기가 어렵다. 경험 많은 베테랑만이 몇 군데 그런 포인트를 두고 움직일 따름이다.
그리고 공격대엔 경험 많은 이가 둘 있었다. 공대장 윤혁수가 보아 둔 포인트다. 여기라면 안심하고 쉴 수 있다.
공격대원 전원이 주변 자리에 앉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깊이 들어온 거 아녜요?”
여성진 중 한 명이 불안한 음성으로 묻자 윤혁수가 고개를 저었다.
“많이 들어온 거 같죠? 사실 얼마 안 들어왔어요. 30분만 걸으면 나갈 수 있습니다.”
“진짜로요?”
“뺑뺑 돈 거죠, 그니까. 왜요? 무서워요?”
“그야…….”
여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요. 그보다 이거 보세요.”
그러나 곧 윤혁수의 가죽 주머니에서 풀어지는 코어를 보곤 눈을 빛냈다.
“13개! 후후. 크기를 보니 각자 200씩은 가져갈 수 있겠습니다.”
“공대장님은 더 안 받으시고요?”
코어를 팔면 공대장은 다른 사람보다 1.5배를 받는다.
공대장은 대부분 가더 출신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그로를 담당한다. 게다가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한다. 위험이 노출되고 하는 일이 많아서 다들 인정하는 부분이다.
“제가 더 받아도 그 정도란 말입니다.”
“세상에!”
여성진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들뜬 마음이 되었다. 2시간 사냥하고 200이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우리 이러지 말고 조금 더 들어갈까요? 처음치고는 호흡 괜찮네요. 한 다섯 마리까진 무리 없이 사냥할 거 같은데?”
윤혁수가 제안했다.
확실히 오늘 같은 날은 여기서 해산하기 아깝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 두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몇 시간 더 고생하면 한 달은 놀 수 있다. 그만큼 위험해지긴 하겠지만 모든 이가 돈에 흥분 상태였다.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좋아요.”
“가 봅시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찬성을 표했다.
나도 딱히 뺄 이유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걸 기점으로, 공격대는 10분가량을 더 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던전에 들어오고 4시간이 지났다.
그간 공격대는 상당한 숫자의 마수를 없앨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죠? 저도 이 이상은 들어가 본 적 없습니다.”
김수환이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너무 깊이 들어온 감이 있었다. 또한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돌아가는 길에 마수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이쯤에서 해산해야 옳았다.
윤혁수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몰아오겠습니다. 어때요?”
“뭐, 마지막이라면 괜찮습니다.”
“대기하고 계세요. 적당히 몰아오겠습니다.”
윤혁수는 호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방패를 든 채 자리를 떠났다.
공격대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윤혁수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윤혁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5분이 지났다.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
10분쯤 지나니 모두들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대장이 왜 안 돌아오죠?”
“무슨 일을 당할 게 아닐까요?”
그 불안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여성진이다.
김수환은 잠시 턱을 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10분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그 뒤에도 안 돌아오면 우리끼리 돌아가야 합니다.”
“지, 지금 공대장을 버리겠다는 겁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부대장 김인필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령술사인지라 언제나 뒤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앞에 나와 있었다.
“부대장님. 10분이 지났고, 10분 더 기다리는 건 정말 많이 기다리는 겁니다.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죠? 몰이꾼이 15분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그 자리를 피하라고요. 몰이꾼을 죽여서 흥분한 마수들이 덮쳐 올 수도 있습니다.”
흥분한 마수도 무섭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놈들이 문제다.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사람이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습니까!”
“다 죽자는 거 아니면 조용히 하십시오.”
김수환은 베테랑이다. 이런 경험도 몇 번 겪었다. 괜한 정에 휘둘리면 죽음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윤혁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10분이 더 지났다.
“갑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제발.”
김인필이 붙잡았지만 이미 여론은 김수환의 편이었다.
김수환은 매몰차게 거절하며 몸을 돌렸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10분, 아니 5분만 더…….”
“정말 이러실 겁니까?”
김인필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부탁입니다. 그 친구는 내 십년지기입니다. 녀석의 부모님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게 놈을 맡겼단 말입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눈 끝이 찡해지는 이야기다.
“5분만 더 기다려 보죠? 사연이 딱해요.”
“지혜 씨…… 후! 알겠습니다. 5분입니다. 그 뒤엔 미련 없이 가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김수환은 이미 공대장 취급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가장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대원들도 순순히 김수환의 의견을 따랐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인필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대원들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으로 하염없이 공대장 윤혁수가 떠나간 자리를 쳐다봤다.
사람인 이상 긴장한 상태를 종일 유지할 순 없다. 오랫동안 긴장하면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가 소모된다. 심신이 더욱 빠르게 지친다.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4시간을 강행군한 상태에서 다시 20분이 넘게 필요 이상의 긴장을 해 버렸다. 이제 검 한 번 휘두르고, 화살 한 대를 드는 것조차 힘이 들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5분이 지났을 때였다.
“옵니다.”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사람은 김수환이었다.
그는 등불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주시했다.
이내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미친!”
욕설과 함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다들 의아해했으나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끄륵!
키리릭!
공대장 윤혁수가 보인다.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마수 무리도 보인다.
“도망가!”
어디로?
이곳의 지리를 아는 사람은 윤혁수와 김수환뿐이다. 하지만 윤혁수는 쫓기고 있었고, 김수환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때에 김인필이 뒤도 안 돌아보고 윤혁수를 향해 달렸다.
마수들은 공격대를 발견하곤 반으로 찢어졌다.
어찌해야 하는가?
마수들이 달려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완전히 뿌리치는 건 불가능하다.
김수환은 잠시 뒤를 쳐다봤다.
여자 셋, 초보자 둘.
지금 상황에선 짐이다. 이들을 이끌고 지금의 추격을 뿌리친 다음,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비관적이다.
마수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이다.
반면 윤혁수와 김인필은 베테랑이다. 생존에 이골이 난 이들!
더 볼 것도 없다.
김수환은 다섯 명을 버렸다. 즉각 윤혁수와 김인필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자, 잠깐?!”
두 명의 초보자 중 한 명, 시프인 박은택이 놀라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여성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입매가 뒤틀린다. 약자가 도태되는 건 인간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마족과 다를 게 없다. 단 하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매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결말이 어떻게 진행될지 조금 흥미가 동했다.
이대로 포기할까?
연극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생존의 갈림길이다.
던전 마스터로서 지켜보는 것과 같은 무리에서 상황을 겪는 건 차원이 다른 느낌을 가져다줬다.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질 정도다.
“가세요.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초보자.
시프.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말을 걸었던, 순박해 보이는 청년.
박은택이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쥐었다.
나는 작게 감탄했다.
‘희생인가!’
다섯으로 나뉘어 도망치거나 싸우는 걸 생각했다. 그래야 1%의 가망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희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들은 오늘 처음 만났다.
만난 지 반나절조차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목숨을 걸어 지킨다고?
오지랖도 넓다.
그 무모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숭고한 희생? 그건 개죽음을 잘 포장한 단어에 불과하다.
즉, 이건 개죽음이다!
“가세요, 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조, 조심하세요.”
“흑!”
박은택의 외침에 세 여인이 몸을 돌렸다. 돌아온 길을 더듬어 뛰기 시작했다.
그녀들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남은 자는 죽으리란 것을.
나는 씨익 웃는 박은택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미련을 접었다.
내가 나서면 지금의 상황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침입자다. 내 집에 무단으로 들어온 무뢰배들이었다.
그나마 김용우는 가치가 있어서 살렸지만 박은택은 달랐다.
낮은 잠재력, 낮은 성장성, 무엇 하나 내게 도움 될 게 없다.
아등바등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려 했다면 모르겠다.
그 처절함에 마음이 동해 움직였을지.
그런데 그마저도 아니지 않은가.
저 짧은 단도로는 마수 한 마리도 힘겨울 게 분명했다.
오늘 던전에서 박은택이 마수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저 막는 것에 급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만용의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다.
콰득!
콰드득!
“끄으, 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