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화
* * *
눈물, 콧물, 머리칼을 휘날리며 여인 세 명이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반쯤 탈진한 듯 흐물거리는 몸을 지탱하는 게 고작이었다.
자리에 멈춰 선 그녀 중 한 명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명은 거친 숨을 내몰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한계까지 짜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더 달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대화할 여력조차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아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 어떻게 됐을까요?”
침묵을 깬 건 이지혜였다.
마법사가 으레 그렇듯 지능 능력치가 높은 그녀만이 그나마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두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어 봤자 비관적인 대답밖에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수환과 부대장 김인필에 대해서는 특히.
그 두 명은 매정하게 자신들을 버렸다.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 분 계신가요?”
당연히 손을 드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들 모두 던전 경험이 많지 않았다. 매번 공격대의 후미를 맡았기에 던전의 지형을 외우겠다고 생각한 사람 역시 없었다.
이지혜가 절박한 얼굴로 남은 사람들을 면밀히 쳐다봤다. 내게 이르러선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 나는 던전을 처음 들어오는 초보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나는 던전의 지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손을 들지 않았다.
박은택으로 인해 내 생각과 다른 전개가 이어졌다. 이 상황이 어떠한 파국을 맞이할지 지켜보고 싶었다.
“없군요.”
이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등불은 모두 버려서 내가 들고 있는 게 유일했다.
이것도 앞으로 몇 시간 후면 꺼질 것이다.
“작전을, 작전을 짜도록 하죠.”
“작전은 무슨 작전! 우린 다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여인 한 명이 히스테릭을 부렸다.
이지혜는 이를 다물었다. 곧 속사포처럼 히스테릭을 부린 여인이 이지혜를 몰아붙였다.
“네가 그때 5분만 더 기다려 보자는 말만 안 했으면, 그랬으면 우린 지금쯤 던전을 빠져나갔을 거야. 이게 다 네 탓이라고!”
“그래서요?”
“뭐?”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혜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아니면 절 죽이기라도 하실 건가요?”
“뻔뻔한 년!”
“죽이긴 싫고, 죽기도 싫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해 보죠.”
나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이지혜의 모습에 고개를 주억였다.
내 기억상 그녀의 잠재력은 별로였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잠재력이나 능력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걸까? 혹시나 싶어서 심안을 발동했다.
이름: 이지혜
직업: 용사(물의 마법사)
칭호: 없음
능력치:
힘 22 지능 41
민첩 18 체력 26 마력 35
잠재력(142/277)
특이 사항:
스킬: 워터 스피어(N)
역시나 잘못 본 건 아닌 듯싶었다.
그럼 지금의 모습은 천성이란 말인가?
다소 무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냉정하고 결단력이 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있을 땐 몰랐으나 자리가 주어지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매니저로 제격이다.
공격대엔 포함되지 않고 공격대를 외부에서 지원하며 관리하는 사람…….
내 눈이 번뜩였다.
‘괜찮군.’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여기서 괜히 내가 나서면 조개 안에 든 것이 진짜 진주인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그녀를 조금 더 눈여겨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봐요. 등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나는 말없이 등불을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내려놓은 뒤 돌멩이 하나를 들어 바닥을 긁었다. 돌멩이가 바닥을 긁으며 하얀 선을 만들어 냈고, 선은 구불거리며 길을 표시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진 못했다. 길을 외우며 달릴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않았던 탓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느 지점에서 막히기 일쑤였다.
“제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 더 기억하시는 분?”
나머지 여인 두 명은 어느새 이지혜에게 압도당해 있었다.
이지혜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바닥을 주시했다.
“뭐, 이 길을 사용할 생각은 없으니까 됐어요. 가 봤자 인육 맛을 본 마수들밖에 없을 거고.”
“사,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누가요?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셋? 아니면 마수를 막아 준 박은택 씨?”
“박은택 씨가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단순한 희망 사항이다. 그녀들 모두 박은택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만에 하나, 살아 있다손 쳐도 우리는 돌아갈 길을 몰라요. 가다가 마수를 만날 수도 있어요. 적어도 저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이지혜는 단호했다.
말을 나누던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바닥에 그건 왜 그린 거예요?”
“지도죠. 우린 이곳을 기점으로 움직이며 근처의 지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하다못해 종이와 펜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걸 챙긴 분은 없는 것 같으니 바닥에 그릴 수밖에요.”
한바탕 속셈을 내뱉은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던전 입구 근처의 지형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어요. 비슷한 지형이 나오기만 하면…….”
“더 깊숙하게 들어갈 경우는 어쩔 셈이지?”
잠자코 지켜보던 내가 한마디 내뱉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는 것과는 반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이지혜는 차분히 설명했다.
“식육 박쥐라는 마수가 있어요.”
“가끔 날아다니는 그거 말인가.”
던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식육 박쥐다. 주로 시체를 먹거나 고블린, 코볼트를 사냥한다. 인간을 습격하는 건 정말 굶주렸을 때다. 아니면 그들의 영역을 침범했거나.
“예. 어느 정도 큰 식육 박쥐의 새끼는 아침에 자고, 저녁에는 던전 입구에 몰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습성이 있었나?”
“입구 쪽에 벌레가 많거든요. 벌레를 잡으면서 사냥을 배우죠.”
“……그렇군.”
던전은 갑자기 생겨난 장소다. 처음 그곳엔 오로지 몇 종류의 마수밖에 없었다.
벌레들은 당연히 던전 바깥에서 유입되어 왔다. 던전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입구 쪽에 벌레들이 많은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거기다가 일반적인 마수는 던전 마스터의 허락 없이 던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입구 쪽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지혜가 알아낸 정보는 아니겠지만 대단한 관찰력이다. 고작 8개월로 식육 박쥐의 습성을 인간들은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나야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숫자가 너무 불어나서 에일 스네이크를 풀어놨지만 그게 전부다.
“지금부터 식육 박쥐를 찾아서 따라가면 되는 건가?”
“이 주변에 위험이 없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예요. 그다음 식육 박쥐의 군락지를 찾아야 하고요. 입구를 향해 가는 건지, 벌레를 먹고 돌아오는 건지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무작정 따라갈 순 없죠.”
안전 지향이다.
확실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험을 하는 건 좋지 않다.
이지혜는 고개를 돌려, 남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움직이죠.”
“나, 난…… 못 가요.”
한 명이 기권을 선언했다.
맨 처음 발악하듯 논쟁을 벌인 여인은 이지혜를 더욱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너는 슬프지도 않니?”
“슬퍼요.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잖아요?”
“사갈 같은 년.”
이지혜는 휙! 고개를 돌렸다.
“랜달프 씨?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겠어요.”
“그러지.”
어깨를 으쓱한 내가 움직이자 남은 두 여인이 살짝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한 명뿐인 남성은 의지의 대상이 된다.
“저, 저도 갈게요.”
결국 항복 선언을 했던 여인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지막으로 남은 여인도 이를 바드득 갈며 일어났다. 자존심이 상하고, 힘도 들지만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다.
거기다가 등불은 하나뿐이었다. 홀로 어두운 장소에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모두 준비된 것을 확인한 이지혜가 말했다.
“그럼, 출발하죠.”
* * *
주변은 안전했다.
넷은 처음 장소로 돌아와 대책을 세웠다.
가장 먼저 실행한 건, 주변의 공간이 좁은 걸 활용하여 마수가 들어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함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누른 지대에 바닥을 파고 화살을 박아 둔 뒤 주변에 기생하는 풀들로 대충 덮어 둔 게 전부지만 함정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들은 그제야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약간의 간식과 식수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마수와는 부딪치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의 지리가 완전히 생소하다는 점이다.
식육 박쥐의 군락지를 찾는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그 군락지에서 나오는 새끼를 따라가 던전을 탈출하는 게 그나마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첫날은 실패. 둘째 날은 먹을 게 떨어졌다.
손목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확인했으니 둘째 날이 맞을 것이다.
물은 물의 마법사인 이지혜가 주변의 수증기를 모아 목은 축일 정도가 됐다.
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급격하게 피로가 몰린다. 무엇보다 허기가 졌다.
식량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먹을 수 있겠군요.”
근처를 서성이던 에일 스네이크의 목을 워터 스피어로 뚫어 버리고 이지혜가 한 말이다.
두 여인은 경악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마수를 먹을 생각을 하다니?
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마수였다. 사람을 습격하는 마수!
이지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은 풀잎과 나뭇가지 몇 개를 모아 마법으로 안에 든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뒤, 근처에 돌아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내게 넘겼다.
“힘 좀 써 주세요.”
불을 피워 달라는 뜻이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찰을 일으켜 불을 피웠다. 힘과 속도가 겸비되자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연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뱀 가죽을 벗기고 불 위에 올렸다.
곧 노릇한 냄새가 났다.
마저 고기가 익자 이지혜는 거리낌 없이 한입 베어 물었다.
‘냉정한 계산력, 생존력, 행동력,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점.’
나는 그 모습을 보곤 흡족히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군.’
이 정도면 합격이다.
‘이제 하나 남았다.’
던전을 빠져나가기 위한 조건.
나는 그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고블린 세 마리가 쳐들어왔다.
겨우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무사하진 못했다.
한 명이 물렸다.
처음부터 이지혜와 대립한 여인과 다르게 겁이 많던 여인이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시름시름 앓았다.
옆구리를 물렸는데, 상처 사이로 균이 침입한 것 같았다.
열이 팔팔 끓고 사경을 헤맸다.
가끔 정신을 차리면 사과부터 했다.
“곤란하네요.”
이지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육 박쥐의 군락지를 찾지 못한 상황. 더 지체하면 생존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
“왜? 또 버리고 가게?”
남은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박은택의 경우를 말하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이지혜 혼자 버리고 간 게 아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공범자다. 그가 죽을지 뻔히 알면서 등을 돌린.
남에게 떠넘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따름이다.
이지혜는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열병인 거 같은데…… 상황을 보죠. 식량은 저와 랜달프 씨가 조달하도록 할게요.”
역할이 배정됐다.
나와 이지혜는 자생하는 버섯, 풀 따위를 모아 죽을 끓였다.
하지만 펄펄 끓는 열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도 체력을 잃어 갔다.
며칠이 더 지나자 움직이는 사람은 나와 이지혜뿐이었다.
* * *
이지혜는 손톱을 깨물었다.
두 여인은 이제 완벽한 짐짝이 되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병이 전염된 것일 수도 있고, 몸이 쇠약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번만큼은 이지혜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가 제아무리 냉정한 성격이라지만 죄악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이 두 명마저 버린다면 일생을 죄악감에 떨며 살게 될 것이다.
방법을 구해야 하지만 늪에 빠진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락지를, 최대한 빨리 찾아서 사람을 데려오면. 아니야, 그러면 늦어. 열이 많아서 물 없인 하루도 못 버텨. 돌봐 줄 사람. 아니, 아니야. 마수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난제다. 깨지지 않던 그녀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순간.
“차, 찾았다. 드디어 찾았어!”
이지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김수환!
생존을 위해 도망간 사람이다.
그런 이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지혜는 믿기지 않아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다, 다행입니다. 모두 살아계셨군요.”
“같이 간 두 사람은 어디 있어요?”
“공대장 윤혁수, 부대장 김인필은 죽었습니다. 저만 겨우 살아남았어요.”
김수환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넘쳤다.
표정이 어딘가 딱딱하긴 했지만 힘겨운 사투를 벌여서라고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지척에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우리는 어떻게 찾았죠?”
“우연입니다. 저도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겨우 찾았습니다. 아아, 정말 신께 감사드립니다.”
이지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김수환이 이런 캐릭터던가?
강한 자존감과 허세를 적절히 버무려 놓은 게 김수환이었다. 물론 몇 날 며칠 홀로 돌아다니면 그야 신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냉철한 판단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이성이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김수환이 다가왔다.
“그런데 두 분이 쓰러져 계시군요. 설마?”
“죽진 않았어요. 열병에 걸렸을 뿐이에요.”
“아아, 아직 죽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휴우!”
아직? 뉘앙스가 묘했다.
“이 빌어먹을 던전은 너무 넓어요. 도저히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죠.”
한 발자국…….
“코볼트, 고블린, 박쥐 떼! 잘 버티셨습니다. 이제 힘을 합쳐서 해결해 나갑시다.”
“잠깐. 수환 씨, 멈춰요.”
“왜 그러십니까?”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저한테 해 준 말이 있잖아요. 던전에서 나가면 꼭 드라이브 시켜 주겠다고. 병원에 있는 여동생도 소개시켜 준다고요.”
김수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예, 그러기로 했죠.”
“약속 지키실 건가요?”
“하하,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워터 스피어.”
이지혜의 주변으로 물의 창이 생겨났다. 김수환은 이에 당황하고 말았다.
“……왜?”
“드라이브 약속을 한 건 맞지만 수환 씨는 여동생이 없지 않나요? 남동생이라면 모를까.”
“아아! 제가 정신이 오락가락했나 봅니다. 그간 던전에서 못 볼 꼴을 너무 봐서요.”
이지혜가 경계 가득한 눈초리로 물러섰다.
던전에 들기 전, 김수환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김수환은 이지혜에게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동생을 소개시켜 준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친동생의 성별을 보통 까먹던가?
그냥 넘어가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이지혜는 결단을 내렸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한 발자국만 더 오면 공격하겠어요.”
“쯧. 눈치가 빠른 년이군.”
김수환의 태세가 급변했다.
검을 들어 이지혜의 목을 노렸다.
워터 스피어가 정확히 복부에 들어갔지만 김수환은 멈춰 서지 않았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이.
말투, 분위기, 모든 게 이상했다.
김수환이되 김수환이 아닌 느낌.
이상함을 느꼈을 때 공격을 해야 했건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다.
김수환의 검을, 피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목이 상상됐다.
이지혜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합격이다.”
나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그것이 왔다.
이지혜의 재치도 빛을 발했다.
드디어, 마지막 조건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