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7화
저녁이 되기 전.
푸르스름한 황혼이 우리를 반겼다.
‘나쁘지 않군.’
석양을 등지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첫 경험치곤 상당히 버라이어티하지 않은가.
결국 입구를 나온 건 나와 세 여인뿐이었다. 그중 두 명은 기절하여 이지혜와 나에게 업혀서 이동했다.
윤혁수는…….
그는 배에 검이 꽂힌 채 꾸역꾸역 걸었다.
체력 능력치가 높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구를 바로 앞에 두고 고꾸라졌다.
그대로 잠자듯 눈을 감았다.
‘대강 정리가 된 건가.’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 두 여인은 미스릴 길드가 운영하는 숍에 양도했다. 약간의 사례금을 쥐여 주자 모든 처리를 도맡아 주었다.
숍 내부에는 환자를 위한 장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응급 처치를 끝낸 후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었다.
“너는 이제 어쩔 셈이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이지혜에게 물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죠.”
“계속 공격대에 참가하겠다는 소리인가?”
그녀는 코어가 든 가죽 주머니를 흔들었다.
“몸 파는 거 빼곤, 스물다섯 처녀한테 이만한 고수입 직장은 없거든요.”
어쩐지 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평소 돈이 궁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던전의 탐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했다.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아무 생각 없이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그야 가입하면 안전하게 벌 수 있으니 좋겠죠. 하지만 5대 길드는 심사 요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듣보잡 길드에 들어갈 순 없잖아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유명한 길드.
스타터이자 강력한 각성자를 필두로 안정적인 레이드를 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근래에는 여러 방면의 사업을 뚫고 있어서, 가입 자체만으로도 큰 메리트가 있었다.
이지혜는 다섯 개의 길드에 모두 응모를 해 본 듯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모두 떨어졌을 것이다.
염세적인 태도가 그를 방증했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받아라.”
“웬 명함이죠?”
“내 이름을 대고 정식 입단을 요청해. 받아 줄 거다.”
이지혜는 명함을 받아서 한가운데 적힌 글귀를 가만히 읽어 보았다.
“천명회…….”
“불만인가?”
천명회는 분명히 5대 길드 중 한 곳이지만 가장 빡빡하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이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보다,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와는 무슨 관계죠?”
“알 필요 없다.”
“랜달프 씨, 솔직히 말해 봐요. 초보자 맞아요?”
“알아서 생각해라.”
입 아프게 해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지를 주는 것으로 이지혜가 알아서 상상하기를 바랐다. 그 상상의 끝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이지혜는 생각에 잠겼다.
윤혁수와 김인필을 단박에 박살 내는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저히 초보자의 움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그 일련의 동작들.
“혹시, 박은택 씨도…….”
이지혜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수들에게 몸을 던진 박은택.
그로 인해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윤혁수와 김인필을 손쉽게 제압할 실력이라면 그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자력으로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지혜는 뒷말을 삼켰다.
섣부른 추측은 삼가야 한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시간을 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는 쉽게 대할 수가 없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이지혜는 머릿속을 비웠다.
‘훌륭해.’
나는 그런 이지혜를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굳이 말을 삼킨 걸 보아 감도 좋고, 판단력도 발군이다.
잠재력이 낮은 게 흠이지만 나는 그녀를 공격대원보다 매니저로 낙점하고 있었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군요. 어쨌든…… 알았어요. 연락해 볼게요.”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지혜가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건 기회였다. 5대 길드 중 한 곳에 들어갈 수 있다면 앞길이 탄탄대로다. 거짓이라면 그래도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런데 그 일기장은 어쩔 작정인가요?”
나는 품속에서 김인필이 남긴 일기장을 꺼냈다.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일기장에선 마나의 향이 풍겼다.
심안을 발동시켜 상세한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 사령술사의 책(U)
설명- 광기로 점철된 악마의 책. 지능이 낮을 경우 지니고 있으면 광기에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있었던 사냥 일지를 적으면 시스템의 판단에 따라 마력이 소폭 상승한다.
특수 직업 ‘사령술사’를 계승할 수 있다.
‘이건…….’
던전 안에서 슬쩍 봤지만 역시 놀랍다.
유니크 등급이라니?
즉, 유일무이한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아직 용사들은 레어 등급 스킬이나 아이템조차 거의 구경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김인필과 함께 각성한 이 일기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왜 이런 아이템이 인간에게, 그것도 김인필에게 떨어졌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특수 직업을 계승하고, 뿐만 아니라 일지를 적는 것만으로도 능력치가 오른다. 상승 폭이야 미미하겠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유니크 아이템 뺨을 후려갈길 수준이었다.
‘김인필 따위가 가지고 있기엔 아까운 물건이군.’
힘이 없는 자가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죄가 된다. 김인필에겐 너무나도 아까운 물건이었다.
전생에서 사령술사가 보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보물을 지킬 수 없었던 김인필은 죽었고, 책은 사장됐을 터였다.
심안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고작 일기장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리 없으니 ‘잡템’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일기장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웬만하면 불태워 버리세요. 그 물건, 저주받았을 게 분명해요.”
이지혜가 몸서리를 쳤다. 일기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던전 안에서 겪은 일련의 일은 그녀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을 터다. 볼살이 빠지고 눈이 퀭한 건 영양을 보충하면 회복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타격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이지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가 볼게요, 정체불명의 초보자 씨. 명함이 진짜면 천명회에서 볼 수 있겠죠?”
“그럴 거다.”
“아,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자고…… 병원에도 가 봐야겠네요. 고생하세요.”
“힘들면 태워다 줄 수도 있다만.”
“됐어요. 그다지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집도 아니고. 택시 타고 가는 게 편해요.”
힘없이 웃어 보인 이지혜가 털레털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음번에 보는 건 천명회 길드 하우스에서일 것이다.
나는 잠시 등을 돌려 던전 방향에 시선을 줬다.
‘그러고 보니 이히를 못 만났군.’
내가 던전에 들어온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방증일 터였다.
이히는 던전 코어의 정령.
던전에 관한 대소사를 해결하며 삭막하기 그지없는 던전 안에 생명을 틔우는 일을 한다.
각 층의 특성에 맞춰 풀이나 꽃 따위를 옮기거나 호수를 만드는 것도 이히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한창 바쁠 때긴 하지.’
지금은 한창 던전의 기틀을 세우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틀림없었다. 내가 적당히 포인트를 사용할 권한을 넘겼으니 2층에서 4층까지 새롭게 조성된 층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었다.
‘2층부터는 레어 등급의 무구도 얻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놨으니…….’
이 일 역시 이히에게 일임했다. 용사의 탐험 정신을 일깨울 수 있게 아주 교묘한 장소에다가 숨겨 놓기를 당부하였다.
지금쯤 착착 진행돼 가고 있으리라 믿었다.
‘나도 돌아가야겠군.’
양복이 많이 해져 있었다. 나조차도 던전에서의 생활이 이리 길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목을 몇 차례 꺾은 후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한민국이 시끄러워졌다.
던전이 나타나고 9개월.
최초로 던전의 1층을 돌파하여 2층에 다다른 길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천명회.
스타터인 길드 마스터 김용우가 만든 길드의, 그 이름 세 글자가 지금 각종 영상 매체와 인쇄 매체에 도배되다시피 나오고 있었다.
공영 방송 채널 QBS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김용우의 단독 인터뷰를 따냈다. 유명 아나운서가 나와서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그 시간은 고작 10분가량이었지만 대한민국에 폭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터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명회와 그곳의 길드 마스터인 김용우 씨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짧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천명회 길드 마스터 자리를 맡고 있는 김용우입니다. 천명회는 아시다시피 소수의 각성자가 모인 모임이고요. 나이는 스물여덟, 독신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그러면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던전과 각성자는 올해 가장 뜨거운 감자! 이에 대해 김용우 씨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던전은 분명히 위험한 곳입니다. 필리핀과 중국은 몬스터 웨이브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죠. 하지만 각성자가 존재하는 한 마수들은 함부로 날뛸 수 없을 겁니다. 실제로 상태창을 보면 우리 직업 앞에 용사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데, 던전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며 던전의 꼭대기에 존재하는 마왕을 없애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마왕이라니요? 뿔 두 개 달린 그런 악마를 말하는 건가요?
“하하, 다들 상상만 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진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고, 지저 세계의 인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상상이 안 가네요. 자, 다음 질문입니다. 최근 각성자가 연예계에 모습을 보이는 등 인기가 하늘 높게 치솟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좋은 현상입니다. 각성자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변화를 겪었지만 힘만 조금 세졌다 뿐이지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습니다. 차별하지 않고 봐줬으면 좋겠네요.”
―잘 알았습니다. 드디어 본론입니다. 12인으로 1층 공략에 성공했다는데요?
“그 12인은 우리 길드 최고의 정예들이고, 사실 1층의 공략 자체는 어려운 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길 찾는 게 더 어렵더군요. 2층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대단합니다. 던전 안의 마수들은 저도 영상으로 봐서 얼마나 무서운지 조금은 알거든요. 끔찍하게 생긴 것으로도 모자라서 잔인하기까지 한 마수들을 쉽사리 사냥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혹시 1층과 2층의 다른 점이 있나요?
“일단 오크가 출현합니다. 크기는 제 몸집의 1.5배 약간 못 미치고, 돼지 코가 특징이죠. 근육이 두껍고 가죽이 질겨서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그 외에는, 곳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500미터 거리를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마법 스크롤, 크기의 10배에 달하는 물건이 들어가는 가죽 주머니, 코어를 갈아서 만든 것보다 10배 이상 효과가 뛰어난 진짜 포션, 레어 등급의 검…… 2층에는 그 모든 게 있습니다.”
―와! 설명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네요! 2층은 보물 창고란 말인가요?
“그리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죠. 농담이 아니라 오크는 정말 무섭습니다. 다시 마주치기가 겁날 정도로요. 저 혼자 만난다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칠 겁니다.”
―정말 그렇다면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마수 같습니다. 천명회 길드의 길드 마스터 김용우 씨,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 부탁드릴게요.
“어느 날 갑자기 각성자가 되었대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기회는 여러분 모두에게 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는 인류를 수호하며 인류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것입니다. 던전은 아주 위험한 장소이지만 인류가 한 발 더 디딜 수 있는 지식의 총체라고 보기에 저는 오늘도, 내일도, 제 한 목숨 다하기 전까지 던전에 발을 들일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가 세계로 퍼졌다. 단지 그것만으로 3억 뷰를 달성했고, 외국의 뉴스매체들은 연이어 인터뷰에 자막을 입혀 방영하기도 했다.
던전에서 보물을 발견한 건 대한민국이 최초였으니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대한민국에 각성자에 대한 인식이 더욱 또렷이 박혔다. 스포츠 업계를 제외한 대부분이 매우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용사, 인류의 수호자.
두 단어가 주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들이 구한 코어를 이용해 몇몇 불치병 환자가 회복된 사례를 보여 주며 각성자는 선한 이미지를 얻는 것에 성공했다.
거기다가 실제 코어를 활용한 기기들이 하나둘 나오는 추세였고, 그 값어치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며 각성자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 각성자들이 대한민국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보물이 출토된 대한민국의 던전은 그들로서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한국!
그 중심에는 천명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랜달프 브뤼시엘이란 이름의 한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