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8화
* * *
천명회의 길드 하우스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총 45명의 길드원이 입구에 나타난 한 남자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적막. 침 삼키는 소리조차 죽었다.
전원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질 때.
남자가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드 마스터가 기거하는 방의 문을 열어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한동안 적막은 깨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제집이지, 제집이야.”
“길마도 꿈쩍 못한다던데. 정체가 뭐야?”
“누구는 뼈 빠지게 레이드 뛰어도 말단 길원, 누구는 낙하산…… 더러운 대한민국.”
조금씩 불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정식 레이드는 꿈도 못 꾸고, 실적을 쌓아 올라가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길드원들.
“선배님, 정말 저 남자가 그리 실력이 좋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신입 길드원 하나가 무기를 갈고 있던 근육질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이번에 1층을 공략한 12명의 공대원이었고, 천명회의 원로 중 한 명이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오크를 때려잡은 게 저 사람이라고. 그가 아니었으면 우린 전멸했을 거다.”
“믿기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생긴 건 희멀겋게 생겨 가지구…….”
근육질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장담하는데, 여기 있는 놈 중에 오크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저 사람은 그걸 해냈단 말이다. 나타난 다섯 마리 중에 무려 두 마리를 혼자 맡았지.”
“선배님도 오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그런 허섭스레기, 주인공 경험치 셔틀 오크가 아니다. 코볼트나 고블린 따위는 상대도 안 돼. 열 번 싸우면 여덟 번은 내가 질 거야.”
듣던 이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근육질 남자는 길드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강자.
그런 이가 열 번 중 겨우 두 번 이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크가 그만큼 강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번 1층 공략은 모든 길드원이 참가하고 싶어 했다. 말단부터 상위 길드원 모두가 은근히 기대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자리에 여태껏 한 번도 공격대에 참가한 적이 없던 남자가 끼었다. 화합은커녕 매번 혼자 다녔으며 길드 회의에조차 참가하지 않던 이가 이때다, 하고 나타났으니 그들로서도 신경이 긁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자는 길드 내에서도 유명했다. 길드 마스터가 부가티 베이론을 선물할 만큼 신임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안하무인의 끝을 달리는 말투는 듣다 보면 왜인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위엄이 있었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강렬한 기세가 담겨 있어 남자를 보면 거인(巨人)을 앞에 둔 듯 숨이 막히지만 배가 아픈 건 아픈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작 말단 단원들은 본 적이 없었다. 이번 레이드에 참가한 11인만이 남자의 실력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뛰어나다.’, ‘강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오크도 본 적 없으니 어떻게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불만은 당연했다.
“실력은 둘째 쳐요. 길드 내에서 개인 공격대를 만들고 있다면서요? 매니저도 두고, 화장실 청소하던 여자 신입도 데려갔던데…… 공격대라기보단 그냥 꽃밭을 만들려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길드는 필요에 따라 최적의 인원을 차출해 공격대를 짜는 게 의례적인 일이다. 한데, 남자는 길드 내부에 고정 멤버를 두고 독자적인 공격대를 만드는 중이었다.
단순히 공격대만 만들면 소란이 일지도 않는다.
이게 무슨 삼권 분립도 아닐진대 길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격대라니.
그곳에 속하면 길드원이되 길드원이 아니게 된다. 그들은 길드 마스터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으며 오로지 공격대장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것이다.
멤버도 잡음이 많았다.
외부에서 데려온 이지혜 매니저, 그리고 통과 의례 중이었던 신입 여자애를 데려가 버렸다. 길드 신입은 한 달간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하며 떨어지는 과일을 낚아채듯이 공격대에 편입시켰다.
남자의 그런 행동은 길드의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이를 두고 공격대가 아니라 꽃밭을 만드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란이 일게 된 원인은 결정적으로…… 둘 다 미인이었던 탓이다.
근육질의 남자는 무기 손질을 멈춘 채 짧게 혀를 찼다.
“길마께서 승인하신 거잖아. 한낱 길드원인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니야.”
“길마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어서 그러죠.”
“길드로서는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는 확실히 실력이 있어. 레어 등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니까, 투자할 가치가 있을 테지. 나는 길마께서 멀리 내다본 결과라고 믿는다.”
“선배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군요. 에효!”
말단 길드원이 한숨을 내쉬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게 생각해. 던전 1층을 공략함으로써 우리 길드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넘버원이 됐다. 그 특혜를 너희들이 받을 거야. 듣기로는 던전이 나타나고 8개월가량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규격 외가 사라졌다 하니 너희들이 날뛸 기회는 많다고. 병아리 새끼들도 아니고 뭐 그리 조급해해?”
규격 외.
던전 1층에 존재하는 극소수의 괴물.
그들이 사라졌다는 정보가 곳곳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신뢰성은 99.9%. 믿어도 좋은 소식이었다.
“정말 저희에게 기회가 올까요?”
모든 길드원이 길드 2층의 탐색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쉽게 오리란 생각은 들지 않은 것이다.
이번 공격대에 참가한 인원은 전부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았다. 2층에서 발견한 각종 보물과 최초로 1층을 격파했다는 로열티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근육질의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12인 공격대 세 개를 짜서 2층을 탐사할 작정이다. 원래는 일주일 뒤에 공지할 예정이었는데 내 권한으로 이 정도 이야기는 해 줘도 괜찮겠지.”
“헉! 정말입니까?”
12인 공격대 세 개면 36명이 동원되는 작전이다.
이야기를 아는 이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달덩이처럼 커졌다.
그러자 근육질 남자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드원 전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실력을 키워. 이건 너희 전부에게 하는 말이야. 인생은 실전이다. 한 번 잘못되면 바로 끝장이라고. 살아서 공적을 쌓으려면 지금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
“아…….”
“그런 의미에서 10일간 던전에 머무르며 특훈을 할 생각인데, 참가할 사람 있나?”
번쩍!
마치 번개처럼 길드원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요!”
“꼭 하고 싶습니다, 특훈!”
이에 근육질 남자는 눈을 빛냈다.
“지옥행 급행열차야. 함부로 타지 마라. 차라리 죽는 게 좋다고 생각할 만큼 굴릴 거니까. 그런데도 갈 거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지옥 훈련. 하지만 그는 진짜 지옥을 보여 줄 작정이었다.
“갈 사람만 따라와라.”
근육질 남자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는 이번 공격대에 참가한 12인 중 한 명이었고, 랜달프 브뤼시엘이라는 이가 싸우는 모습을 가장 옆에서 지켜봤다.
앞으로는 그런 강자만이 살아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미적지근하게 움직이면 도태된다.
던전은 2층, 3층,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내 실력에 안주하고 있었어. 고작 몇 개월이나 지났다고…….’
강자의 표본이 없기에 나태해져 있었다.
하지만 같은 길드 내에 따라가고 싶은 강자가 생겼다.
벽이 되어 주는 이가 나타났다.
그는 그 벽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후후!’
근육질의 남자 김태환.
그는 한번 마음먹으면 지옥 불에도 웃으며 뛰어드는 남자였다.
* * *
“바깥이 꽤 소란스럽군.”
밀폐된 방에서 김용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갑작스럽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내가 말했다.
새롭게 창설될 공격대의 기획안을 읽던 김용우가 털털하게 웃었다.
“여러 가지로 시끄러울 시기 아닙니까. 랜달프 님 덕분에 1층도 완벽하게 공략했으니 축제를 벌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간은 시간이 안 나서 못했습니다만…….”
“축제라.”
마계에는 축제가 없다. 전쟁터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눠 받을 때 그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함께 즐긴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축제는 매우 떠들썩한 편이었다.
“관심 있으십니까? 사실 조만간 홀 하나를 빌려서 크게 열 생각이긴 했습니다. 꽤 재미가 있을 겁니다.”
김용우는 짠돌이지만 반드시 써야 할 때는 쓰는 편이었다. 안 그러면 길드 마스터 자리를 해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보다 기획안에 문제가 없는지나 확인해라.”
대충 슥 한 번 훑더니 김용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일 처리는 똑바로 하는 게 좋다.”
“흠…… 딱히 기획안 자체도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독립된 공격대, 대원 선출 권한, 던전 공략에만 중점을 둔 운영, 이미 전에 다 나눴던 이야기니까요.”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내가 만들 공격대에 관한 이야기는 길드 내에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길드 내의 이슈 메이커가 나였으니 퍼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김용우는 기획안의 한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데 공격대 이름이 ‘데빌 헌터’, ……어쩐지 흑염룡이 날뛸 거 같은 이름이군요.”
데빌 헌터, 줄여서 D.H가 공격대의 이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던전과 마족을 깡그리 밀어 버리는 게 목표인 만큼 이름에 목적의식을 담은 것이다.
“바꿀 생각 없다.”
“물론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도장 찍어 드리면 됩니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태도를 바꾼 김용우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우는 즉시 기획안에 통과 도장을 찍었다.
데빌 헌터 공격대가 발족하는 순간이었다.
“공격대원은 언제 다 채우실 생각이십니까? 한 명은 매니저고, 한 명은 신입. 매우 힘든 길을 걷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지 말고 인증된 실력자를 영입하는 편이 도움이 되지 않을는지?”
지금 당장은 실력자일지 몰라도 미래를 내다보면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나는 지상 최강의 공격대를 만들 작정이었고, 그에 적합한 인물을 이제 겨우 한 명 찾았을 따름이다.
“내 방식으론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최강의 공격대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길드 마스터의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닐 거다.”
확실히 강한 길드원이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김용우는 기획안을 내게 넘겼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랜달프 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주인님께서 하신다면 따르는 게 제 일이지요.”
“한번 구해 준 것치곤 광적이군.”
정말로 의외였다. 나는 던전 안을 방황하는 김용우를 한 번 도와줬을 뿐이었다. 무럭무럭 커서 포인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자 김용우가 씩 웃었다.
“공부도, 사회 경험도 일천한 제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기회를 잡는 겁니다. 주인님 덕분에 던전 1층도 공략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제 선택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김용우.
그는 자신이 코끼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개미임을 깨닫고 몸을 낮췄다.
대신 코끼리의 가장 옆에 서기를 자처했다.
그것이 그가 사는 비결이었다. 이런 눈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5대 길드 중 한 곳의 수장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기획안을 되받으며 고저 없이 말했다.
“나를 섬기는 척 내 뒤를 찌르지만 않는다면 나는 너를 도와줄 것이다. 언제든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마.”
“어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김용우가 격하게 양손을 흔들었다.
“농담인지 아닌지는 너 자신이 알겠지.”
딱히 그가 배신할 거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해 충고했다.
적당히 겁을 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렸다.
기획안에 무사히 도장이 찍혔으니 이제 공격대원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축제에는 참가하실 겁니까?”
방문을 열기 전, 김용우가 물었다.
“때를 봐서 결정하겠다.”
“그럼 일정이 정해지는 즉시 공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군.”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의 충정을 의심치 말아 달라는 듯 김용우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방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웬만하면 참가해야겠어.’
인간들의 축제에 그다지 흥미는 없지만 참가하지 않는다면 길드 내에서 불협화음이 커질 건 자명하다.
신경 쓰지 않는다곤 해도,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 필요는 있었다. 어찌 됐든 천명회의 길드원이라는 건 다르지 않으니 최소한의 활동 정도는 해 줘야 했다.
나는 늦게 깨닫는 경우는 있어도 융통성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조금씩 기틀이 갖춰져 가고 있다.’
독자적인 세력의 공격대 창설!
대원은 전부 모으지 못했지만 가장 급한 일을 해결한 셈이다.
이번에 새롭게 들인, 전생에서 ‘번개의 여왕’으로 유명했던 여인을 떠올리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