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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1화 (21/242)

던전 사냥꾼 21화

그로부터 10일.

유은혜의 자조적인 성정은 완전하게 바뀌었다.

자신감이 붙었고, 매사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신체 능력치도 제법 상승하여 조금씩 전사의 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도와주면 혼자서도 던전을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오랜만에 던전의 최상층으로 돌아왔다.

‘유은혜가 쓸 만한 스킬북을 찾아봐야겠어. 일단 몸에 흐르는 저 전류를 어떻게든 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전생에서 나는 독불장군이었다. 혼자 모든 걸 독식하며 강해지려고 발악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는 인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유은혜는 내 계획의 중요한 말 중 하나였다. 베풀어서 본전 이상을 찾을 수 있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본 이히는 변함이 없었다. 던전 코어 위에 앉아 맹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왔다는 걸 깨닫고는 크게 날개를 펄럭였다.

“아, 마스터! 왜 이제야 오셨어요?”

“무슨 일 있나?”

“2층이 뚫렸어요. 이대로 놔두면 3층, 4층도 뚫리겠는데요?”

“벌써?”

앞으로 최소한 반년은 더 있어야 4층이 뚫리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뚫렸다고? 내가 의아함에 묻자 이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떼거리로 몰려왔거든요. 여기 나라 사람들 같지는 않아요. 깜둥이도 있고 하양이도 있어요. 이히가 3층에 정원을 만들고 있었는데 녀석들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이히가 뿔이 난 듯 던전 코어를 발로 툭툭 찼다.

3층에 정원을 왜 만들고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말인 즉 외국인들이 던전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72개의 던전이 존재했고 한국엔 내 던전이 유일했다.

왜 굳이 한국의 던전을 찾아왔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보물을 노리고 왔구나.’

유일하게 보물이 출토된 던전.

세계적으로 가십거리가 되었으니 탐욕이 들 만하다.

“몇 명이나 몰려왔지?”

이히가 양손을 들어 크게 원을 그렸다.

“이~따 만큼 많이요!”

“정확하게.”

“다 따로 들어와서 정확하게는 모르는데요. 100명씩 들어온 그룹도 있고…… 아, 중국인도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냐구요? 이래 봬도 이히는 지구의 언어를 세 개나 습득하고 있답니다. 중국어도 그중 하나예요.”

“몇 명.”

내 말이 점점 짧아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히가 울먹거렸다.

“힝! 중국인은 이히가 봤을 때 500명은 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인간들도 합치면 천 명쯤? 그중 200명가량은 2층에서 죽었어요.”

“3층의 현재 상황은 어떻지?”

“아직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우두머리들이 경계하는 기색이에요.”

“3층에 있는 마수의 현황을 불러 봐.”

“고블린 우두머리가 다섯 마리, 코볼트 우두머리가 네 마리, 각자가 200 정도의 세력을 두고 있고요. 오크가 200마리까지 번식했어요.”

3층부터는 고블린과 코볼트 우두머리가 존재한다. 그들은 전술을 구사할 줄 아는 지능이 있었다. 무작정 부딪치면 패배한다 생각하고 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뚫리겠군.”

“아무래도요.”

이히가 동의했다.

숫자가 많아도 태생의 한계는 존재했다. 대량으로 맞부딪치면 가망이 없었다.

오크들은 소수로 밀집하여 생활하는데, 오크 로드의 존재 없인 쉬이 뭉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크 로드는 12만 포인트나 하는 상급 마수였다.

한데, 오크 로드를 3층에 놔뒀다간 성장해야 하는 각성자들이 올라오는 족족 죽어 나갈 것이 자명했다. 코볼트와 고블린도 씨가 마를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다른 층으로 옮기면 되지 않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오크 로드를 쓸 곳이 없다. 12만 포인트를 가만히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놔둔다고 포인트가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던전 코어 가디언으로서는 20%쯤 부족하고, 플로어 마스터로 쓰자니 딱히 쓸 만한 층이 없다.

1층부터 4층까진 각성자들의 레벨 업을 위한 장소. 그런 곳에 오크 로드를 놔둘 수도 없는 데다 5층부터는 텅텅 비어 있으니 소환해 봤자 계륵 같은 존재가 될 공산이 컸다.

‘오크 로드를 소환하는 건 보류해야겠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고블린과 코볼트 우두머리들을 만나 봐야겠다. 놈들이라면 지능이 있으니 말이 통하겠지. 이히, 지금 포인트가 얼마나 남았지?”

“56만 정도 있어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정확히는 562,433포인트예요.”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32만 포인트가량이 남아 있었다.

두 달 조금 안 되게 나가 있을 뿐이었는데, 그사이 22만 포인트가 오른 것이다.

보통 한 달 동안 5,000포인트 정도를 벌면 준수한 편이었다.

약한 각성자 한 명을 처리해서 벌어들이는 포인트는 200 안팎.

지금 수준에서 최정예라 불리는 이들을 처리해 봤자 600이 조금 넘을까?

8인, 12인으로 공대를 짜서 던전으로 들어오기에 생각보다 사망률이 적었다.

나로서도 그게 좋다고 판단했고, 적당히 큰 다음에 잡아먹으면 최소 몇 배를 더 벌 수 있으니 굳이 강한 마수를 1층에 풀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데 내가 없는 사이 못해도 600명 이상의 각성자가 던전에서 죽어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 그간 던전을 구성하는데 들어간 포인트까지 합산하면 그보다 더 많을 게 분명했다.

“허. 어지간히 쳐들어왔나 보군.”

기가 찼다.

인간의 단합력이란 역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히가 쪼로롱 날아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뭉쳐서 올라온 인간들 말고도 슬금슬금 기어 온 외국 각성자가 많았나 봐요. 소수로 들어와서 그런지 대부분 1층에서 몰살당했어요. 이히가 생각해도 쌤통이에요.”

“당장 3층에 올라온 각성자는 800명 정도라는 건가.”

“그러지 말고 마스터가 손을 보시는 게 어때요? 지금 마스터의 능력이면 그깟 인간들은 개미처럼 밟아 버릴 수 있잖아요.”

“확실히……. 하지만 됐다.”

전생의 나였다면 그들을 괘씸히 여겨 홀로 달려가 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전생에서 던전을 잃고 마수를 부릴 수 없게 된 나는, 다른 마족들이 마수를 부리며 세상을 집어삼키는 걸 손가락 빨며 구경만 했다.

대규모의 마수가 마족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혼자 전장을 수없이 전전했어도 마수를 부려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 경험은 없었다.

‘괜찮겠지.’

전쟁이다, 전쟁.

내 던전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진다.

하물며 외국 각성자들이다. 내 던전에 들어올 리 없는 이들이 손수 찾아왔다.

이걸 직접 나서서 쓸어버리라고?

아까운 짓이다. 그야 어렵진 않겠지만 직접 지휘하며 맞서는 재미를 없애는 짓이었다.

마계에서도 백작의 직위를 얻긴 했으나 이름뿐이었다. 나를 따르는 마족도, 마수도 없었다.

‘각 층에 보물을 배치한 게 전화위복이 되었어. 인간들은 확실히 보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긴 하니까. 목숨 걸고 얻으려는 경향이 있지.’

인간은 탐욕이 강한 동물이다.

그 탐욕이 도를 넘어서 목숨도 쉽게 건다.

‘그나저나 과연 중국이군. 물량도 남달라.’

시간이 지날수록 각성자의 숫자는 늘어난다. 지금이야 만 명 중 한 명 정도의 각성률을 보이고 있지만 비율은 점차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 명 중 한 명이라도, 중국은 인구가 많다. 지금도 10만 명 이상의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을 텐데 500명은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숫자였다.

“마스터. 포인트도 많겠다, 골렘을 풀어놓는 건 어때요? 네이쳐 골렘이라면 적으로 인지한 상대만 공격하니까 3층의 생태에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거예요. 식물들이 빨리 자라는 효과도 있어서 주변 경관도 좋아지고요. 이히가 만든 정원에 배치하면 아주 멋있는 광경이 연출될 거예요. 이히히~”

사심을 담아 이히가 의견을 냈다.

네이쳐 골렘은 오크 로드와 같은 상급 마수다. 그러나 상급 마수 중에서도 좋은 편에 속했다. 오크 로드보다 5만 포인트 더 비싼 17만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것만 빼면 생태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니 사용하기 좋은 패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네이쳐 골렘을 소환하면 전쟁이 너무 싱거워진다. 혼자서 다 쓸어버릴 게 자명한 균형 파괴자.

지금으로선 필요 없는 존재다.

‘졸지에 플로어 마스터의 역할을 맡게 생겼어.’

각 층에 존재하는 마수들을 통솔하는 플로어 마스터.

던전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존재를 들이지 않았다.

굳이 낮은 층에 플로어 마스터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때 플로어 마스터가 있었다면 알아서 마수들을 규합할 것이었다. 3층으로 몰려온 각성자들을 맞이해 전쟁을 구상했겠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면 다른 플로어 마스터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내게 직접 요청을 넣는, 그런 역할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오크가 200, 고블린과 코볼트가 1,800, 도합 2천 마리. 그에 비해 각성자는 800. 숫자는 우리가 우세해.”

“그게, 3층에 올라온 각성자들의 수준이 상당한 거 같아요. 특히 중국인 중에 제법 강한 스킬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두 명이나 있어요. 레어 등급의 스킬 같은데, 마스터가 나서지 않으시면 힘든 싸움이 될 걸요?”

오크 한 마리가 각성자 둘을 맡을 수 있다.

문제는 고블린과 코볼트다. 현 상태에서 수준급의 각성자 하나를 상대하려면 족히 다섯 마리는 필요하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겨우 박빙. 하물며 레어 등급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둘이나 있다.

‘내가 바라는 바다.’

조금씩 가슴이 뛰는 게 느껴졌다. 내가 나서거나 상급의 마수를 소환하면 싱거운 싸움이 되겠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전력이 내 손 위에서 놀아나는 그 기분을 나도 한 번쯤은 맛보고 싶었다.

내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졸들. 상상만으로도 희열이 생긴다.

전생의 나는 빠르게 던전을 잃었고, 하여 그런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포인트를 모으는 족족 나 자신만의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 곧 한계에 부딪혀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늦었다.

사실 대규모 마수를 부려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다른 마족들의 던전을 경험한 뒤였다.

“우선 코볼트와 고블린 우두머리들을 만나 보도록 하지.”

내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 * *

던전 3층.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1,800마리에 달하는 고블린과 코볼트가 사이좋게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아홉 마리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튀어나와 내 앞에 섰다.

“던전 마스터! 내 졸개들, 모두 여기 왔다. 코볼트 따위보다 강한 고블린들이다.”

“던전 마스터! 나도 왔다. 고블린을 코딱지처럼 여기는 강한 코볼트들이다.”

“던전 마스터! 내가 제일 많다. 내가 부리는 코볼트들, 제일 튼튼하고 세다.”

개성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홉 마리의 우두머리들.

누가 더 강하느냐로 묘한 경쟁이 붙었다.

2시간 전, 나는 모든 마력을 개방하여 내가 던전 마스터임을 그들에게 알리고, 집결할 것을 명했다.

던전 마스터의 권한은 절대적.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고블린과 코볼트지만 내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반갑다.”

짧게 말하자 앞다투어 아홉 마리의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나도 반갑다.”

“내가 더 반갑다.”

“내가 제일 반갑다.”

우두머리라고 해도 태생적으로 머리가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고블린과 코볼트에게 뭘 바라겠나.

아홉 마리가 일제히 나를 환영하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골이 울리는군.’

나는 잠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녀석들을 데리고 전쟁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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