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2화
‘해야지.’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다. 어차피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고, 여기서 승리하면 더욱 큰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층에 인간들이 몰려왔다. 다들 알고 있겠지?”
아홉 마리의 우두머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침입자로 인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다.”
“괘씸하다.”
“다 쓸어버릴 거다.”
적대심 하나는 탁월하다. 공통의 적이 생겼으니 따로 부대가 분열할 거 같지는 않았다.
“놈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내 던전에 보물을 탐하러 들어왔다. 던전 마스터로서 이 일을 묵과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바, 나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묵과가 뭐냐?”
“그것도 모르냐, 멍청한 고블린아. 먹을 거다.”
“아니다. 묵과는 내 친구 이름이다.”
어려운 단어는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제일 단순한 게 이히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오히려 이히가 똑똑해 보일 지경이다.
나는 탁월한 인내력을 보이며 말했다.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인간들을 이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생각이다.”
“좋다. 나도 인간들이 싫다!”
“우리 코볼트의 용맹함을 보여 주겠다!”
“크르륵! 인간은 싫지만 맛있다.”
아주 한마음이다.
그러나 동기가 조금 부족하다. 철천지원수처럼 여겼다면 간을 보는 게 아니라 진즉에 공격을 했을 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직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상이 필요하겠군.’
노예처럼 부리기만 해선 효율이 나빠진다.
채찍과 당근.
인간 한정이 아니라 모든 지성체에게 통하는 수법이었다.
“나는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우두머리에게 상을 줄 것이다. 혹시 바라는 게 따로 있나?”
그리고 이왕이면 바라는 것을 준다.
내 말이 끝난 즉시 가장 왼쪽에 선 고블린 우두머리가 답했다.
“암컷! 죄다 수컷뿐이다. 나는 내 씨를 뿌리고 싶다.”
“동의한다. 이러다간 수컷끼리 교미를 하게 생겼다.”
“나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녀석은 접어 두고, 나머지 우두머리들이 동의했다.
확실히 이곳에 모인 1,700여 마리의 고블린과 코볼트는 모두 수컷이었다.
오크는 따로 암컷을 다수 소환해 번식하도록 만들었지만 고블린과 코볼트는 보류 중이었다.
워낙 난잡하고 근친 교배도 허물없이 하는 놈들이라 번식률 면에서만큼은 오크보다 뛰어났다. 물론 난산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가 기형아도 많아서 새끼의 절반은 1년 차가 되기도 전에 죽는다.
용케 유지가 되는 종족이지만 몸집을 불리면 오크를 사냥하려 들 것이기에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애당초 고블린과 코볼트는 뿌리가 같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은근히 인정해. 그러나 다른 종족을 배척하는 이기심은 가장 우월하다. 특히 1층에 존재하는 식육 박쥐나 에일 스네이크와 달리 오크는 생존권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까.’
오크는 아직 숫자를 더 불려야 하는 상황이다. 적절한 균형은 던전의 생태를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번 전쟁으로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 거야. 나쁘지 않겠지.’
이대로 무한정 불어나기만 한다면 모를까, 전쟁으로 숫자가 대폭 줄어든 상태라면 상관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인간들을 많이 없앤 순서대로 다수의 암컷을 선물해 주지.”
“키엑! 열심히 하겠다!”
“고블린보다 많이 잡겠다!”
“내가 제일 많이 잡을 거다.”
이 녀석들에게 숫자를 속인다거나 할 정도의 두뇌는 없었다. 애당초 손가락과 발가락 이상 가는 숫자는 셀 수도 없을 터였다.
각성자를 죽이는 족족 머리를 모아 오면 계산을 해 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이히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핏물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의 숫자를 세고 있는 이히의 모습을 떠올리자 작은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토록 안 어울리는 모습이라니.
“그러면 지금부터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정면 승부는 무리다. 오크들이 합류하여 제대로 붙어도 승률은 기껏해야 4할 정도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따로 부대를 나눠서 효율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전생에서 겪어 본 전쟁들을 떠올리며 우두머리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 * *
던전 3층 입구 부근에 자리 잡은 각성자 800여 명.
그들은 각자 대여섯 명씩 나뉘어 모닥불을 피운 채 한데 모여 있었다.
2층을 돌파하며 다수의 동료를 잃어서인지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었다.
바로 중국계의 각성자들이다.
숫자의 우위를 내세워서 다른 국적의 각성자를 앞에 배치한 탓에 그들은 비교적 손실이 적었다.
“하오! 핸하오!”
“하하하!”
중국인 한 명이 오크 머리통을 창대에 꽂고 뱅뱅 돌리며 춤을 추자 주변에서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곡예사와 같은 몸놀림의 춤이었지만 그것을 좋게 바라보는 이들은 대다수가 중국계 각성자들이었다.
나머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아주 축제가 따로 없군.”
모닥불 앞에 앉아 잔뜩 인상을 찌푸린 다니엘이 쓰게 뱉었다.
미국인인 다니엘은 본인을 포함한 다섯 명과 함께 던전에 왔는데, 그중 한 명이 2층에서 죽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리더, 그러지 말고 따로 행동하는 게 어때? 보물을 찾아도 죄다 독식할 기세잖아. 우리 차례는 오지도 않을 거라구.”
거대한 할버드를 손질하던, 닭벼슬 같은 형태의 붉은 머리칼을 소유한 남자가 말했다. 거친 삶을 살아왔는지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3층에 무슨 마수가 있을지 아무도 몰라. 그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크보다 더 성가신 놈들이 존재한다면 그 자리에서 우린 사망이야.”
“중동의 몬스터 웨이브 때 나왔던 비홀더나 가고일 같은 녀석들 말이지?”
이들은 중동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을 당시 용병으로 참전했다. 거기서 코볼트나 고블린, 오크 외의 마수와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특히 거대한 눈알만 동동 떠다니는 비홀더나 2미터 크기의 가고일은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마수였다.
비홀더는 짧은 사거리의 빔을 쏘았는데, 칼날보다 날카로워 닿는 즉시 신체가 잘렸다.
가고일은 날카로운 이빨 외엔 크게 위협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회복력이 발군이었다. 잠시 한눈팔면 석화처럼 돌변해 순식간에 체력을 회복시켰다.
그 둘에게 희생당한 각성자가 열이 넘었다. 수십 대의 전투기가 일제히 요격하여 끝장을 낼 수 있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바지에 오줌을 찔끔 지리곤 하였다.
“이곳에서만 보물이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비홀더나 가고일보다 까다로운 마수가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때 우리 다섯만 있다면 분명히 전멸하겠지.”
다니엘의 의견은 타당했다.
팀의 리더로서 팀원의 생명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도리였다.
닭벼슬 머리의 남자가 혀를 찼다.
“그래도 중국인들은 마음에 안 들어. 흑사회인지 뭔지, 그깟 오크 좀 몇 마리 잡았다고 축제 분위기잖아. 이러면 오히려 마수들을 자극하는 꼴이라고.”
“나도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참아라. 일단 돌아가는 분위기를 좀 보자.”
“리더, 그런데 정말 보물이 있을까? 2층에서 찾은 거라곤 지팡이 하나뿐이잖아. 마법 효율을 조금 더 올려 준다고 했던가? 그걸 보물이라 하기엔 좀 석연찮은데.”
“지팡이가 있다는 건 더 대단한 것도 있다는 뜻이겠지. 한국의 천명회 길드가 찾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특히 공간을 도약할 수 있는 스크롤은, 억만금을 받을 만한 물건이다. 그런 거 하나만 건져도 이번 원정은 성공이야.”
공간도약 스크롤은 정말 사용할 곳이 많았다. 여벌의 생명이 생긴다는 뜻이고, 반대로 아주 악질적인 일에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걸 비밀 경매장에 내놓으면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닭벼슬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사람들 생각이란 게 다 비슷한가 봐. 던전에서 한탕 하려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말이야.”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인간이란 탐욕적인 동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중국인들을 마냥 욕할 수는 없는 처지지. 여기 있는 모두를 모은 게 그들이니……. 덕택에 3층에 쉽게 오를 수 있었어.”
아무리 던전에 사람이 많아도 따로 들어왔다면 천 명이나 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이 한국에 기거하는 외국 각성자들을 모았기에 가능한 인원이었다.
어떻게 자신들의 행방을 알고 찾아왔는지는 의문이지만 덕분에 2층을 뚫을 수 있었다. 비록 팀원 중 한 명의 희생이 따랐지만 말이다.
닭벼슬 남자가 질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몰라. 난 저놈들이 싫어. 그보다 리더, 진짜 이번에 한탕 제대로 해 보자고. 죽은 잭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해.”
“그래야지.”
잭은 2층에서 죽은 동료의 이름이었다.
잠시나마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그들은 접시에 담긴 스프를 깨작였다.
“커헉!”
그 순간,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을 비롯한 팀원 전부가 급히 무기를 들고 비명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봤다.
좀 전까지 오크 머리통을 창대에 꽂아 빙빙 돌리며 춤을 추던 중국인의 머리에 조잡한 나무 화살이 꽂혀 있었다.
“워 챠오!”
삽시간에 일어난 일.
중국인들이 무기를 들고 벌떼같이 일어났다.
다니엘과 그의 팀도 긴장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키륵.
키에엑.
동시에 침을 질질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수백의 코볼트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코볼트 무리의 선두에 선, 우두머리로 보이는 성인 남성과 비슷한 크기의 코볼트가 활을 든 채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춤을 추던 중국인의 머리에 화살을 맞힌 게 저놈이다.
“젠-부샤쓰!”
단단히 골이 난 중국인들이 코볼트 무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유튜브 등의 영상 매체에서 대륙이라며 놀림 받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런 헌신적인 태도가 동료 한정으로만 나와서 문제이긴 하지만 500명이 달려드는 장면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휘이익.
파삭!
화살 한 대가 더 날아오자 선두에 선 중국인이 검을 들어 잘라 냈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저런 허접한 활쏘기 실력에 당할 각성자는 이곳에 없었다.
“크르윽! 키에에!”
화살이 막힌 즉시 코볼트 우두머리가 함성을 한 차례 내지른 뒤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은 전부 했다는 듯 한 줌 미련이 없었다.
코볼트의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무리를 토벌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여긴 몇몇 각성자가 그 뒤를 따랐다.
보물은 얻지 못해도 코어는 여전히 돈이 된다.
손쉽게 다수의 코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마냥 손가락 빨며 구경할 순 없었다.
“리더, 우리도 쫓아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코볼트 무리와 뿔이 난 중국인들을 지켜보던 닭벼슬 남자가 말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팀은 이곳에 남는다. 뭔가 이상하군.”
“그게 무슨 소리야? 저놈들은 코볼트라구. 그냥 건드려 보니까 이건 아닌 거 같아서 도망가는 거 아냐?”
“가장 앞에 있던 놈. 놈은 우두머리다. 기초적인 전략을 구사할 줄 알아.”
“에이, 리더. 그래도 코볼트잖아.”
한 번 코볼트는 영원한 코볼트다.
놈들의 머리가 닭대가리 수준이라는 건 각성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우두머리라고 해도 유인책까지 써 가며 각성자를 상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다니엘은 감이 무척 좋은 편이었다. 2층에서 잭이 죽은 것도 그가 마음대로 나댄 결과라는 걸 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린 3층의 지리를 전혀 모르지. 만약 유인책이라면 상당한 숫자가 죽어 나갈 거야.”
“쩝. 알았어, 알았다구.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을까?”
“어차피 놈들과 끝까지 같이할 생각은 없어. 같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사정이 파악되는 즉시 따로 행동할 거야.”
다니엘의 선언에 닭벼슬 남자가 옳다구나 손뼉을 쳤다.
“내가 이래서 리더를 좋아한다니깐!”
그러거나 말거나 다니엘은 냉정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일단 우리 중에 가장 발이 빠른 리차드, 정찰을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진짜 함정인지 아닌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오케이.”
“앤디, 주변 경계.”
“알겠어.”
“퍼슨스는 우리에게 축복을 걸어 줘.”
“간단한 일이지.”
“난? 나는? 난 뭘 할까, 리더?”
닭벼슬 남자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다니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스프가 아직도 반이나 담긴 냄비를 바라보곤 말했다.
“스프를 마저 먹어라. 너무 많이 남았군.”
* * *
코볼트 떼를 쫓아간 이들의 숫자가 점차 적어졌다.
동굴의 지리는 워낙 복잡했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낙오하는 이가 하나둘 생겨났다.
처음에는 500명의 대인원이 달렸으나 최종적으로 남은 이는 겨우 백 남짓.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선두의 그룹이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취익!
취이익!
선두의 각성자들은 경악했다.
사방팔방에서 마수가 튀어나왔다.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튀어나왔다면 이처럼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나타난 마수는 200마리의 오크 떼!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렸다.
* * *
‘생각보다 많은데.’
나는 수정구를 통해 전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수정구는 두 개가 한 쌍이고, 마력을 넣어 발동시키면 다른 수정구의 주변 광경을 보여 주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오크 한 마리가 수정구를 들고 전장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전장에서 떨어진 장소에 있는 내가 그곳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무려 5,000PT나 하는 마법 도구였다.
‘생각보다 단순해.’
마지막까지 기어코 따라온 100여 명의 각성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조소를 흘렸다. 설마 코볼트가 유인책을 쓰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코볼트가 겁을 먹고 도망간다고 생각한 거겠지.
따라온 인간 중 대부분이 중국계 각성자였지만 역시 사고가 편협하다.
편견이 불러온 최악의 결과였다.
‘1회용 작전치곤 결과가 좋군. 이제 서서히 피가 마르게 해야겠어.’
전력이 비슷해도 이곳은 내 홈그라운드다.
게다가 이번 작전으로 조금이나마 우위를 가져왔다.
이제 무슨 방법으로 저들을 괴롭힐까?
입가에 새겨진 미소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