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3화
* * *
각성자들의 눈이 새빨갛다.
피부의 각질이 벗겨지고 입에선 단내가 줄줄 흘렀다.
지난 수일.
그들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괴성을 질러 대고 기습을 가하는 코볼트와 고블린, 주변을 배회하는 오크 덕분에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몇몇 각성자가 이에 분노하며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죽어 나간 각성자만 수십이다.
처음 800이 넘었던 각성자의 숫자가 700 아래로 떨어졌다.
던전을 빠져나가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중국 흑사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작 지팡이 하나 얻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굳건한 태도를 유지했다.
최대 그룹인 흑사회의 도움 없이 던전을 내려갈 간 큰 각성자는 몇 없었다. 사실 마수가 정면 대결을 안 해 줘서 이 모양이지 맞붙으면 질 전력은 아니었다.
희망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군.”
그러나 다니엘의 생각은 달랐다.
“코볼트와 고블린, 오크가 연합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야.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데…… 누굴까? 마수에게 아주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 상급 마수? 아니면…… 던전의 주인?”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다니엘은 감이 아주 뛰어난 편이었고, 특히 위험에 관한 냄새를 잘 맡았다.
지금은 최고조였다.
이처럼 불안했던 적은 각성자가 된 이후 없었다.
중동에 용병으로 참가했을 때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간을 보고 있다. 상대는 여유로워.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런데도 그러지 않고 있다면 제기랄, 놀고 있는 건가? 우리 따윈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나?”
다니엘은 초조가 극에 달하면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리더?”
다니엘의 이상함을 눈치챈 닭벼슬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다니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가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앞은 개미지옥이야. 들어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 마수들은 우리를 간 보고, 가지고 놀고 있어. 놈들을 움직이는 존재가 뒤에 있다는 뜻이지. 코볼트나 고블린, 오크, 모두 참을성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마수들이 천천히 우리를 말려 죽이고 있으니까. 놈들이 따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교묘하게 연동되어 있다.”
“리더, 리차드가 돌아오지 않았어.”
리차드. 발이 제일 빠르다며 정찰을 보낸 동료다.
돌아오리란 사실에는 회의적이었다.
던전 깊숙이 들어간 100여 명 중 살아 돌아온 이는 전무했다. 모두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머리통이 뜯기고 시체가 훼손되어 리차드가 죽었는지 확인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그가 죽었음을. 그러나 닭벼슬 남자는 인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시체는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닭벼슬 남자는 그런 이였다. 그게 최소한의 동료애라고 믿었다.
다니엘은 이를 갈았다.
“그나마 전력이 보존되어 있을 때 움직여야 해. 흑사회가 지금처럼 소극적으로 움직인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우리 팀은 여기서 해체되겠지. 팀만 해체되는 게 아니라 네 빌어먹을 몸뚱이가 해체될 거라고!”
“리더, 리차드가 돌아오지 않았어.”
닭벼슬 남자는 같은 말을 되뇔 뿐이었다.
“리차드는 죽었어.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돌아오면 그게 이상한 거야.”
“리차드가…….”
“닥쳐! 리차드도 우리가 던전을 벗어나길 원할 거다. 리차드는 절대 무리를 할 녀석이 아냐. 그런데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이 앞에 아주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다리겠다고? 오크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가 널 죽이고 말지!”
“리더는 가. 나는 기다릴게.”
“이…… 이, 망할 자식!”
다니엘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항복 선언이다.
다른 팀원들도 은근히 닭벼슬 남자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는 눈빛들.
리더로서 팀원의 의견을 따르는 건 당연했다.
“고마워, 리더. 내가 이래서 리더를 좋아한다니깐. 내 마음 알지?”
닭벼슬 남자가 히죽였다.
둘이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벌써 10년을 넘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은 전장에 있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한마디만 더 지껄여 봐. 다신 말할 수 없게 입안에 검을 틀어 박아 주마.”
“음, 리더라면 한 번쯤은 대 줘도 괜찮다구? 상냥하게 해 줘.”
“망할 새끼.”
다니엘이 이마를 짚었다.
“킥!”
“흐흐흐!”
남은 팀원들이 깔깔 웃어 젖혔다.
어두침침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졌다.
무엇보다, 아직 각성자는 700명이나 남아 있었다. 마냥 우울한 상황은 아니었다.
* * *
흑사회가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인다는 건 모든 각성자가 움직인다는 것과 같았다.
700명의 각성자 중 400명이 흑사회 소속.
위험한 상황에서 다수를 따라 소수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그들도 놀기만 하진 않았다. 탐색 스킬을 가진 각성자 몇을 내보내 주변 지리를 살피거나 마수들이 향하는 장소를 알아냈다.
지금 흑사회가 향하는 장소가 그곳이다.
3층의 모든 마수가 총집결하는 장소를 단번에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마수 새끼들, 오늘이야말로 너희 제삿날인 줄 알아라!”
“다 죽여 버리자고. 아주 씨를 말려야 해.”
지난 며칠간 시달림을 당해서 그런지 각성자들 모두가 독이 오른 상태였다.
특히 동료를 잃은 이들의 분노는 더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진즉에 대군을 움직여 마수들을 소탕해야 했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서 그저 아쉬움만 토해 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다.
처음부터 계획 없이 움직였다면 십중팔구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주변 지리를 파악하고, 어느 정도 독기가 쌓인 지금 기세를 몰아 단번에 몰아치는 게 오히려 나았다.
‘그런데도 이 불안함은 가시질 않는군.’
왜일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심장의 거동이 거세지기만 한다.
개미지옥에 스스로 발을 드미는 기분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마수들과 비교해도 전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간 보인 마수들의 총규모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숫자였다.
본인의 추측대로 마수들의 뒤에 상상외의 생명체가 존재하지만 않는다면 붙어 볼 만했다.
‘리차드, 부디 우리를 미워하지 않기를.’
던전을 빠져나갈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리차드가 죽음으로써 틀어졌다.
리차드의 원혼이 그들을 저주한다면 앞으로의 상황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사지로 내몬 다니엘을 축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삐이이익!
선두에 선 흑사회 그룹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멈추라는 신호다.
앞은 늪지대였다.
제법 넓지만 그다지 깊지는 않아 걸어갈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질서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간 대열에 차질이 생긴다.
천천히 소수로 움직여 늪지대에 발을 옮겼다.
“대열을 유지해! 천천히, 구보를 맞춰서 움직…… 억!”
절반가량이 늪을 건넜을 때.
늪을 뚫고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늪을 건너던 이들의 발을 잡고 끌었다. 끌려간 이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히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 건넜는데, 어떻게?
하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블린들은 탈것을 타고 늪 안에서 이동한 것이다.
늪지렁이!
늪에 서식하는 최하급의 마수였다.
질척거리는 늪 안에서 서식하며 평소엔 작은 벌레 따위를 먹고 산다.
몸집은 80센티 정도로, 마수답지 않게 온순하다. 대신 힘이 세다.
각성자들 입장에선 그다지 위협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무게가 얼마 안 나가는 고블린이나 코볼트의 이동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한 번의 습격. 대열은 흐트러졌다.
정확하게 허리를 양분당한 것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원거리 딜러들이 늪지대의 마수를 향해 공격을 준비했다.
취익.
취이익!
그러나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움찔하고 말았다.
700명의 대인원은 약 300, 400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운데 늪이 있어 합류할 수 없는 상황. 오크들이 나타난 곳은 늪을 건넌, 300명의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키이익.
케에엑.
남은 400명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천 마리가 넘어가는 코볼트와 고블린 떼가 무리 지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갇힌 형국이다.
따로 나뉜 채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더들 앞으로!”
“앞으로!”
“딜러들을 보호해!”
“진을 짜! 당황하지 마라!”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버벅거리면 다음 순간 죽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뭉치는 속도도 빨랐다.
“젠장!”
다니엘이 욕을 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코볼트 한 마리가 목을 잃은 채 허공을 날았다.
“조심!”
닭벼슬 남자가 다니엘의 뒤에서 입을 벌리고 달려들던 코볼트를 발로 차 냈다. 이어 할버드를 내리쳐 고블린의 몸을 동강 냈다.
“뒤통수는 나한테 맡겨, 리더.”
“늪으로 달려!”
다니엘이 급하게 외쳤다.
“엥? 늪? 거긴 고블린이 있잖아?”
“기만전술이다! 정작 늪 안에 있는 놈들은 얼마 없어. 여기 묶이는 게 오히려 놈들이 바라는 바다! 어차피 놈들은 못 따라오니 빠르게 반대편으로 합류하는 게 나아!”
“우리만?”
“전부!”
“오케이!”
닭벼슬 남자가 할버드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워낙에 거구인지라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나를 따르라!!”
후웅-!
할버드가 어김없이 코볼트의 목을 잘랐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의 다니엘을 향해 닭벼슬 남자가 윙크를 날렸다.
“이거 꼭 해 보고 싶었어, 리더.”
“더 크게!”
닭벼슬 남자가 히죽 웃고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나를!! 따르라!!”
늪 쪽으로 달려가며 괴성을 지르는 남자.
이목이 쏠린 가운데 다니엘과 그의 팀이 늪지대에 도착했다.
빠르게 코볼트 등을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하나둘 눈치를 보던 이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움직이던 게 열이 되고, 열은 금세 백으로 불어났다.
코볼트나 고블린들은 늪지렁이 없이는 몸이 작아 늪을 건널 수 없었다.
이윽고 반대편의 모두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오크는 200마리가 전부였으나 각성자는 700에 약간 못 미쳤다.
오크만 빠르게 처리하면 늪을 건너오는 고블린이나 코볼트는 애들 장난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형세 역전!
희망이 더욱 물꼬를 텄다.
* * *
‘허. 머리를 쓰는 놈이 있었나?’
나는 입맛을 다셨다.
쉬울 줄 알았는데 판을 볼 줄 아는 놈이 있나 보다.
늪을 최대한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요지였다. 그걸 알아차리고 늪을 건너려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전쟁은 어려워.’
쉬운 건 없다.
전쟁은 참여만 해 봤지 이렇게 전략을 짜 본 적은 없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노릇.
그래도 아쉽다.
며칠간 지치게 만들고 일부러 독이 오르게 했다. 탐색자들에게 마수들이 모이는 장소를 은근슬쩍 공개하기도 했다.
열에 받쳐 달려오길 원해서다.
반은 성공했으나 막상 실행하니 아직은 미숙하다.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만족스럽다.
마수를 부려 전쟁을 하는 기분은 최고였다.
한국은 양식이고, 아직 키워야 할 단계라 전쟁을 벌일 순 없지만 지금 던전에 있는 놈들은 별식이다. 살려 보내 봤자 다른 마족의 던전에서 죽어 포인트가 되겠지.
그럴 바엔 내가 다 먹어 버리는 게 낫다.
나는 뼈로 제작된 해골 가면을 뒤집어썼다. 정확하게 얼굴의 반만 가리는 이 물건은 별다른 효과는 없지만 보는 이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
마력 수치가 높을수록 상대가 느끼는 공포도 커진다. 고작 그 효과 하나만으로도 레어 등급의 판정을 받은 물건이었다.
히이잉-!
내가 반쪽짜리 해골 가면을 쓰자 말 한 마리가 옆에서 투레질을 했다. 꼬리와 갈기가 불로 이루어진 흑마 ‘인페르노’다.
유니콘의 사촌 격이라 이마에 마나가 집약된 긴 뿔이 달렸다.
평범한 말과는 크기부터 달랐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명마였다.
중급 마수이며 이동 수단으로 제격이다. 곧 열릴 마계 옥션을 생각하면 탈것 하나쯤은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있어서 구입한 것이다.
나는 인페르노의 위에 오른 뒤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내가 나설 수밖에.’
검을 손에 쥐고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