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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4화 (24/242)

던전 사냥꾼 24화

* * *

오크의 우악스러운 손이 각성자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오크의 근력이라면 산 채로 찢어발겨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그러나 잡힌 중국의 각성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오크가 눈 깜빡할 사이에 20번의 검격을 당했다. 20개의 칼자국이 아로새겨지며 오크는 전신에서 피를 뿜었다.

중국 각성자 라이펑(李易峰)의 작품이다.

그가 가진 레어 등급의 스킬은 2초 동안 민첩에 비례하여 전신을 가속화한다. 스킬 이름조차 가속이었다. 체력과 힘이 그다지 높지 않아 몇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라이펑은 오크를 쓰러트린 즉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200에 달하던 오크의 대다수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코볼트와 고블린이 늪지렁이를 타고 부랴부랴 늪을 건너고 있었지만 오크가 없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승리다!

라이펑과 모든 각성자의 눈에 희망이 번졌다.

각성자는 아직도 500가량이나 남았다.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방비한 덕분이다. 숫자적인 우세를 이용하여 몰아치니 제아무리 강력한 오크라도 목이 잘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펑은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한 번은 더 쓸 수 있겠군.’

가속.

2초간 절대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스킬.

몸의 상태를 보아하니 한 번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상 사용하면 전신이 뜯겨져 나가는 양날의 검.

하지만 충분하다.

어차피 남은 마수라곤 소수의 오크와 코볼트, 고블린이 전부였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승리가 눈앞에 왔다!”

라이펑이 외쳤다.

동시에 살아남은 흑사회의 각성자가 그의 옆으로 몰려들었다.

방진을 새롭게 짜고 남은 마수들을 압박했다.

투욱! 투욱! 투욱!

수백의 각성자가 거세게 발을 굴리자 땅이 울렸다. 다가오던 코볼트와 고블린이 당황하며 주춤한다. 일렬 방진을 짠 상태로 호기롭게 움직이니 마수들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서걱!

무엇보다, 라이펑의 칼날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레어 등급 스킬을 얻었다는 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쳤어도 라이펑은 흑사회 최고의 전사였다.

검신이 마수의 목을 훑고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마수의 사체와 피가 던전을 가득 채웠다.

코볼트와 고블린의 몇몇 우두머리조차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키에엑.

키히익.

마수들의 저항은 거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도 착실하게 숫자가 줄어 가고 있었다.

각성자 모두의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피어날 찰나.

다그닥. 다그닥.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

모두가 침묵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래, 마치 사신…….

사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사신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꼬리와 갈기가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흑마.

그 위에 탄 한 남자.

보이는 거라곤 얼굴의 반쪽뿐이다. 나머지 반쪽은 해골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검은색의 망토를 두르고 한 손에 검을 쥔 그 모습에 각성자들은 질리고 말았다.

보는 순간 전신에 공포가 엄습했다. 처음으로 마수와 마주쳤을 때의 공포감과 비슷한 종류지만 공포의 질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라이펑은 떨리는 몸을 억제하고자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다시 공기가 바뀌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승리하였다 생각하며 힘차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저 남자의 등장이, 단지 등장한 것만으로 공기를 바꿔 놨다.

공포에 젖은 병사는 쓸모가 없다. 이대로는 안 된다. 라이펑은 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느꼈다.

결정을 내린 라이펑이 움직였다.

자신에게는 가속 스킬이 있었다.

같은 레어 등급의 스킬도 가속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감히 2초 무적이라 칭할 수 있는 스킬.

아무리 나타난 남자가 강해도 순식간에 20번의 검격에 당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남자는 화염 말에 탄 채 오연하게, 다가오는 라이펑을 바라봤다.

차라리 저런 식으로 방심해 주는 편이 좋다. 전사로서는 굴욕적인 일이지만 승리를 위해서라면 인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펑은 모른다.

남자의 두 눈은 라이펑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고.

라이펑이 하려는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흐읍……!”

남자의 지척에 다가간 라이펑이 가속을 활성화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느려지고 라이펑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20번의 검격, 검의 진수가 담긴 ‘이십사검결’ 중 스무 초식이 라이펑의 몸을 통해 펼쳐졌다. 라이펑을 검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최강의 검법!

‘통한다!’

라이펑이 보기에 남자는 한없이 느리다. 거북이도 이보다는 빠르리란 생각이 들 정도다.

통한다. 이길 수 있다. 남자는 그저 존재감만 압도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20번의 검격이 끝나고 라이펑의 검이 남자의 목을 꿰뚫었다.

아아, 승리했다!

이제 분위기는 다시 바뀔 터였다.

라이펑은 고개를 돌려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목소리가……?’

그리고 그것이 라이펑이 생각한 최후의 사념이었다.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모양이군.”

라이펑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걸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 * *

가속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뇌와 근육을 혹사시키는 자살용 스킬이었다.

죽음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망가지지 않았나.

어차피 몇 년 안 가서 몸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했겠지. 지금 내 손에 죽은 게 라이펑의 입장에선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겠다.

‘레어 등급 스킬을 한 명 더 가지고 있을 텐데? 아니면 이미 죽었는가?’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500명은 족히 남은 각성자 무리를 바라봤다. 오크 한 마리면 각성자 두 명은 상대할 수 있다. 단순히 계산만으로는 300명 이하로 남았어야 정상이지만…… 수가 읽힌 시점에서 그런 단순한 비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가 이렇게 많음에도 남은 레어 등급 스킬의 보유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미 죽은 듯싶었다.

남은 쭉정이들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몰살!

이들은 양식장의 그물을 찢고 들어온 물고기다.

살려 보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보물이 나온다는 사실은 천명회와 이곳 국가의 다른 길드들을 통해서 해외로 널리 알려질 것이었다. 그들은 내 양식장 안의 물고기인 탓이다.

그러면 지금과 같이 많은 별식이 몰려올 것이고, 나는 그걸 먹음으로써 허기를 달랠 수 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양식장은 굳이 손댈 필요가 없고…….

언젠가 다른 마족도 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 혼자 독식할 기회는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저들의 몰살을 생각하며 인페르노의 등을 때리려는 찰나였다.

“던전의 주인이시여!”

웬 남자가 앞으로 다가와 대뜸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

나는 여러 국가의 언어를 알았고, 영어 또한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화를 식히시고 부디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보물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을 가려는 어리석은 양들일 뿐입니다.”

“미쳤어, 리더?!”

“펑즈!”

“께 스트론쪼!”

남자의 행동을 보며 모두가 비난했다.

말은 달랐지만 뜻은 하나, 미친놈이라는 것.

“부디!”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남자는 진심으로 격의 차이에 몸을 떨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못 보고 못 느끼는 걸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에 흥미가 동한 나는 심안을 열었다.

이름: 다니엘 드류 마틴

직업: 용사(가더)

칭호: 없음

능력치:

힘 33 지능 41

민첩 31 체력 35 마력 15

잠재력(155/308)

특이 사항: 없음

스킬: 통찰력(Ex N), 초감각(Ex N)

초감각과 통찰력이라!

등급은 낮지만 두 개의 스킬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덕분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전원이 달려들어도 내겐 안 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들의 눈에 나는 마수 이상으론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용케 무릎을 꿇고 빌 생각을 하였다.

물론 이들의 결말을 바꿔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단순한 감탄이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신 던전의 주인께서 신경 쓰일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던전 쪽은 쳐다도 보지 않겠습니다.”

“그건 조금 곤란하군.”

더욱 많은 이들이 던전의 보물에 혹해 스스로 발을 들이밀길 원했다. 이들이 전원 살아 나가 내 존재에 대해 떠들면 던전을 찾는 이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예……?”

다니엘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영어로 말할 줄은 상상조차 못해서다.

솔직히 도박이었다. 의사소통이 안 될 가능성이 컸다.

도박은 성공했고, 회화가 성립했다.

그리 생각하겠지만 나도 조금은 흥미가 동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

“10분 주마.”

“도망갈 시간입니까?”

다니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500명이 각자 흩어지면 그중 몇은 살 수 있다.

거기에 자신의 스킬이 더해지면 적어도 남은 팀원들은 살릴 수 있었다.

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10분간 공격할 것이다. 너희는 막아라. 10분이 지나면 공격을 멈추겠다.”

선언하듯 검으로 다니엘을 가리켰다.

“우선은…… 그래, 너부터다.”

촤악!

데구루루…….

다니엘이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나는 검을 내리쳤다.

그의 목이 바닥에 놓였고, 그 순간 게임은 시작됐다.

“리, 리더!”

10분.

남은 인원은 500.

초당 한 명씩은 없애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는 인페르노의 등을 가볍게 찼다.

“이 개새끼가! 죽여 버린다! 기필코 죽여 버린다!”

히이잉!

인페르노가 움직인다.

붉은색 닭벼슬 머리의 남자가 할버드를 들고 따라왔지만 무시한다.

이 중에서 그가 가장 격노하고 있었으니까.

다니엘을 대신하여 죽는 순번을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 주었다.

일말의 자비다.

그리고 내 검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수 명의 인간이 주검이 되었다.

“막아! 막으란 말이야!”

그들은 방진을 짜고 더욱 단단하게 방비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그 방진을 뚫어 버렸다.

나는 공성추였다. 수많은 방파제를 무력화시키는 거대한 해일이었다.

쉬이익!

화아악!

화살과 마법이 날아든다.

이 역시 무시했다.

온몸으로 맞아도 현 각성자의 수준으로 내 몸에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크아악!”

“사, 살려 줘!”

달리고, 베고, 찌르는, 지극히 단순한 시간이 지나갔다.

필사적으로 막던 무리는 어느새 겁에 질려 바닥에 엎어졌으며 허리를 잃고 양손으로 바닥을 헤엄쳤다.

아무리 발이 빨라도 인페르노에게 벗어나는 것은 무리다.

유니콘과 동격의 마수가 인페르노였다.

늪을 통해 도망가려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늪에서 튀어나온 고블린과 코볼트를 맞이해야 했다.

정확하게 10분이 지난 순간, 남아 있는 이는 고작 한 명뿐이었다.

수많은 시체 앞에 단 한 명만이 살아 있었다.

“운이 좋군.”

약속은 지킨다.

던전을 빠져나가는 건 별개지만.

설혹 빠져나가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조심성 많은 다니엘이라면 모르겠으나 닭벼슬 남자가 가진 스킬은 격노.

그 이름처럼 분노에 몸을 맡겨 더 많은 각성자를 끌고 온다면 오히려 내게는 이득이었다.

쥐고 있던 검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고삐를 쥐고 말머리를 돌렸다.

남아 있는 마수들이 그런 나를 뒤따랐다.

시체와 함께 남자만이 오롯이 남게 되었고…….

남자는 오열했다.

“젠장. 제엔장-!”

닭벼슬 머리의 남자.

유일한 생존자는 다니엘이 아닌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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