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6화
‘흐음, 이히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던가?’
살짝 당황스럽긴 하였으나 뭐, 나쁘지 않았다.
내 앞에선 하도 허당처럼 굴기에 의외의 눈빛을 던졌을 뿐이었다.
전생에서 나는 이히에게 포인트 사용 권한을 맡긴 적이 없었다. 던전 자체도 빠르게 잃어서 이히의 이런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것도 훌륭한 채찍과 당근이다.
이히가 악덕 업주마냥 상대방을 쥐어짜면 반발심이 들 때 즈음 내가 나선다. 아주 조금 환경을 개선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나.
조금만 더 이히의 재능이 완숙의 경지에 다다르면 완급 조절도 잘 해내리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밑바닥에서 일해야 할 일꾼들이 죽어선 곤란하니까. 이히는 조금 더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비싼 포인트를 들여 소환했고 그들의 뼈와 살, 피 한 방울까지 나의 것이었다.
하루 세끼와 시간마다 10분의 휴식 시간, 6시간의 취침 등은 생명을 존속하기 위한 마지노선에 지나지 않았다.
‘디자인은 구리지만…… 내가 쉴 곳이 아니니.’
각성자들은 안전하다면 물불 가리지 않을 것이다. 흉악한 마수들을 피해 기꺼이 이 똥궁전 안으로 몸을 들이밀리라.
그러니 디자인은 어찌 되었든 좋았다.
“마, 마스터. 어때요? 아름답지 않았나요?”
때마침 이히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말했다.
이히와 나는 3층에서 벗어나 던전 코어의 근처에 있었다.
던전 코어가 더욱 빛을 뿜어 대는 걸 보아 이히가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의미에서 아름답더군.”
“이히히.”
이히가 활짝 웃었다.
여러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히, 내가 말한 사항을 준수해라.”
“알겠어요.”
“그러나 굳이 너의 행동을 바꿀 필요는 없다.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저들이 보다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전적으로 네게 맡기마.”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던전에 있을 시간이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임시로 던전을 맡겨야 하는데, 너만 한 적임자가 없지 않느냐.”
신뢰를 담아 말하자 이히가 눈을 크게 떴다.
“제, 제가, 그런 큰 중책을 맡을 수 있을까요?”
“이히, 앞으로 상당히 바빠질 거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어날 거야. 그리고 난 앞으로도 중요한 일들을 너에게 맡기겠지. 그때마다 지금처럼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나는 적잖이 실망하고 말 것이다.”
“아니에요! 이히는 마스터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이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맡기는 일이라고 해 봤자 던전의 생태에 관한 것이거나, 드워프들을 부리듯 일꾼들을 관리하라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의욕을 내서 안심이었다.
“믿는다.”
“이히~”
“그보다 이히, 내정 모드로 들어가자. 3층의 오크를 충원하고 이번 기회에 5층을 손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슈웅-
곧 던전 코어가 홀로그램을 띄웠다.
나는 던전의 현황을 바라보다가 3층의 오크를 100마리 더 충원했다. 이번 일로 대부분의 오크를 잃었다. 적어도 번식할 수 있는 숫자가 필요했다.
처음 50마리 정도에서 시작하여 9개월 만에 겨우 200마리까지 불렸건만 그중 9할이 사망했으니 이것만큼은 뼈아픈 손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크의 임신 기간은 3개월이며 한 번에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고작 6개월 만에 성체가 된다.
실제로는 1년 반쯤이 걸려야 정상이지만 던전 특유의 마나 파장이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 특성 덕분에 다시 4개월가량이 지나면 원래의 숫자가 복원될 터였다.
‘조금 아깝긴 하군.’
오크는 한 마리에 700PT.
고블린이나 코볼트는 35PT면 충분한 반면 오크는 비싼 녀석이었다.
‘그러나 5층까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이번 일처럼 내가 계속해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잠깐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각성자들이 4층을 넘어서면 최상층까지는 그들을 막을 게 없었다.
그들에게 한차례 절망을 안겨 줄 5층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나는 구입할 수 있는 마수 목록을 띄웠다.
[최하급 마수 목록]
고블린 2Lv- 35PT
코볼트 2Lv- 35PT
에일 스네이크 1Lv- 20PT
식육 박쥐 1Lv- 20PT
슬라임 3Lv- 200PT
스켈레톤 4Lv- 500PT
좀비 4Lv- 450PT
미믹 5Lv- 1,200PT
놀 2Lv- 80PT
크레이지 하운드 2Lv- 120PT
…….
[하급 마수 목록]
오크 2Lv- 700PT
머드 골렘 5Lv- 2,000PT
꼭두각시 인형 2Lv- 900PT
스노우맨 3Lv- 999PT
거대 식인꽃 4Lv- 1,400PT
수면 나방 3Lv- 1,100PT
가고일 5Lv- 1,900PT
하피 4Lv- 1,200PT
…….
목록이 워낙 많아서 여러 개의 창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정리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원하는 마수를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Lv은 그 급수에서의 보편적인 강함을 수치화 시킨 것으로, 최대 5까지 존재한다. 놀은 최하급 2Lv, 오크는 하급 2Lv, 이런 식이었다.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수치였다. 무조건 맹신해선 안 된다. 참고 정도만 하는 편이 가장 좋다.
“머드 골렘으로 시작해야겠군.”
5층은 각성자들에게 최초로 절망을 맛보게 할 장소였다. 엄청난 난이도의 상승은 없겠지만 4층까지 경험하고 올라온 각성자들은 금세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죽거나.
5층의 입구는 두 개였다.
나는 머드 골렘 20기를 구입해 10기씩 5층의 입구 쪽에 배치시켰다. 그 주변에 꼭두각시 인형 30마리를 보조로 붙였다.
꼭두각시 인형은 마계의 스캐빈저들이 부리는 도구다. 각종 금속과 약물, 마법과 주술을 이용해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인형을 만든다.
스캐빈저들의 손재주가 워낙 조잡해 그다지 강력하진 않지만 전투적인 측면에선 오크보다 나았다.
‘번식종은 하피가 괜찮겠지.’
층마다 번식할 수 있는 종이 하나씩은 있어야 했다.
고블린, 코볼트, 오크는 천적이 없으면 무한정 늘어나는 것들이니 적절히 균형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지만 하피는 늘어나는 속도가 둘에 비해 느리다.
머드 골렘과 꼭두각시 인형이 입구를 지키는 동안 어느 정도 늘어나려면 최소 50마리 이상이 필요했다.
나는 5층에 하피 80마리를 들여놨다.
이로써 총 26만 포인트를 내정에 사용했다.
남은 포인트는 91만이 조금 넘었다.
여기서 던전의 보물을 늘리면 더 줄어들 것이었다.
‘이 정도는 금방 복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의 보물을 노리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각성자들이 많으니까.’
한국의 수많은 각성자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홈페이지와 길드의 영향이다. 땅이 좁아서 그런지 나름 통제가 잘됐다.
반면 해외는 그렇지가 않다.
밀입국을 해서라도 던전에 들어오려는 각성자가 많았다. 그들만 처리해도 소모된 포인트는 보충할 수 있었다.
“일단 이 정도로 해 두지.”
“끝나셨어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내정 모드를 종료시키자 이히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이냐?”
“이히히, 그냥요.”
할 것도 없는 요정이다.
“이제 가 보마. 이다음의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맡겨만 주세요!!”
우렁차게 대답한 이히였지만 금세 시무룩해졌다.
던전 코어는 마스터인 나와 연결되어 있고, 이히는 그 던전 코어에 묶인 요정이다.
영혼으로 엉켜 있으니 내가 가는 것이 섭섭하겠지.
이히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지만 기본적으로 수다쟁이인 요정이다. 대화할 상대가 필요할 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와 통신할 수단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물상점을 찾아보면 이히도 사용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이 걸린 물건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었다.
“아! 그, 그러면 제가 감히 던전 마스터의 신체에 마법을 하나 새겨도 될까요?”
“마법도 사용할 줄 아나?”
전생을 통틀어, 던전 코어의 요정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도우미일 따름이다.
신체가 없기에 물리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던전을 관리하며 조언 몇 마디 해 주는 게 요정의 역할이었다.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히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많이는 사용할 수 없지만요. 사용하기도 싫고요. 그래도 던전 마스터는 이히에게 매우 잘해 주시는걸요. 그러니까 논외예요.”
“마음대로 해라. 어디다가 새기면 되지?”
“그게…….”
“그게?”
“입술인데요…….”
“알겠다. 어서 새겨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요정의 마법이라는 걸 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자 이히의 뺨이 발그레해지며 쉴 새 없이 날개가 퍼덕였다.
“그, 그럼 할게요……?”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해라.”
“우선 눈을 감아 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나?”
무슨 마법이기에 눈을 감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의아해서 묻자 이히가 눈에 힘을 빡! 줬다.
“그래야 마법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거든요.”
“희한하군.”
요정의 마법이라 그런가?
하긴, 던전 코어의 요정이 최초로 마법을 사용하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범위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곧 이히가 정면으로 날아와 잠시 멈춰 섰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부딪쳤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허공에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놀라운 업적! 최초로 던전 코어의 요정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
「칭호 ‘최초로 요정의 축복을 받은 자’가 주어집니다. 」
‘이건…….’
칭호라니!
여태껏 내가 얻은 칭호는 ‘불굴의 전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두 번째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나는 이히의 만행도 잊고 급히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랜달프 브뤼시엘
직업: 마계 백작(던전 마스터)
칭호:
* 불굴의 전사(Ex U, 모든 능력치+2)
* 최초로 요정의 축복을 받은 자(U, 마력+6)
능력치 :
힘 79(+2) 지능 64(+2)
민첩 74(+2) 체력 80(+2) 마력 82(+8)
잠재력(382+16/500)
특이 사항: 나락 군주의 심장을 이식했습니다. (온전한 힘을 개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킬: 스킬 조합(R), 심안(U)
[전후 비교]
힘 79 지 65 민 75 체 82 마 84 잠재력(375+10/500)
힘 81 지 66 민 76 체 82 마 90 잠재력(379+16/500)
등급도 예사롭지 않았다.
유니크. 유일무이한 칭호!
마력을 6이나 올려 주는, 보배로운 이름이었다.
순수 마력 82에 칭호 효과로 8이 더 올라, 이로써 내 마력은 90을 넘어섰다.
능력치 90부터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력은 마법의 위력과 주변의 지배력 등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내가 작심하고 마력을 개방하면 어지간한 마족들도 위엄을 느낄 것이다. 위축되고 놀라겠지. 전생에선 지능과 마력이 낮아서 고생했는데, 지금은 마력이 가장 높았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고 이히를 바라봤다.
이히가 부끄러운 듯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쩍 내가 화를 낼까 봐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축복에 칭호까지 가져다주었는데 화를 낼 리가 없었다.
“고맙다.”
도저히 입에 잘 안 달라붙는 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 일 따위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마움을 전할 때다. 어색하다고 입 다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히는 진심으로 기쁜 듯 빙그레 웃었다.
“이히히, 뭘요. 이제 던전 마스터는 원하실 때 이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이히도 그렇구요!”
“급한 일 아니면 자제해라.”
하지만 요정은 수다쟁이다.
마음대로 풀어놓으면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려 들 것이었다.
“……네.”
“이제 진짜로 가 보마. 내가 없는 동안 던전을 잘 보살펴다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던전 마스터.”
이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한 차례 손을 들어 대답하곤 던전의 최상층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