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9화
“즉시 구입하지.”
“키히히, 역시 즉시 구입은 힘들…… 예?”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어둠의 정령이 잠시 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였지만 내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길.”
과연 장난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어둠의 정령이 부리나케 창고를 빠져나갔다.
5분 정도가 지나자 어둠의 정령은 경매 담당자를 대동한 채 나타났다.
경매 담당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타락시킨 게 살찐 인간이었나 보다. 족히 150킬로는 나올 법한 뱃살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영체라곤 해도 저런 몸을 이끌고 달려왔으니 지칠 만하였다.
“헉헉, 현자의 비약을 즉시 구매 하시겠다고요?”
“…….”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어둠의 정령을 바라봤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할 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나려 할 때였다.
“키히히…… 그렇습니다. 손님께선 현자의 비약을 즉시 구매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한 어둠의 정령이 대신하여 답했다.
“그럼 이곳에 수결해 주십시오.”
비대한 몸집의 경매 담당자가 양피지로 작성된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양피지에는 수십 가지의 마법이 담겨져 있었고, 수결을 하는 즉시 발동되는 구조였다.
나는 지체 없이 양피지에 오른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현자의 비약을 즉시 구매했습니다. 520,000PT가 소모됩니다.]
[잔여 1,032,447PT가 남았습니다.]
곧 양피지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한데 뭉쳐 현자의 비약이 있는 곳으로 흘러갔다.
현자의 비약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점차 약해지며 이내 사라졌다.
경매 담당자도 믿기지 않는지 말을 더듬었다.
“거,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현자의 비약을 손에 쥐었다.
이어 마개를 땄고.
꿀꺽! 꿀꺽!
단번에 마셨다.
[현자의 비약을 섭취하였습니다. 등급을 올릴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스킬 조합(R) 2. 심안(U)]
내가 가진 스킬은 두 개. 스킬 조합은 당장 쓸 곳이 없었다. 허공에 손을 놀려 2번을 선택했다.
[심안(U)이 심안(Ex U)으로 상향되었습니다.]
그 문구를 끝으로 더 이상 메시지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끝났나?’
현자의 비약을 섭취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끝났군.’
고개를 끄덕였다.
심안의 등급이 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뭐가 달라졌을까?
달라지긴 했을까?
심안을 열어 남은 물품들을 훑으려는 찰나, 어둠의 정령이 끼어들었다.
“흠흠! 손님, 이제 슬슬 경매장에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사실 지금 가도 조금 빠듯합니다만.”
“알겠다.”
급할 건 없었다.
바뀐 게 있다면 경매가 진행되는 도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어둠의 정령을 따라 창고를 벗어났다.
* * *
마치 오페라 극장을 연상시키는 넓은 장소였다.
중앙에 위치한 수백의 관람석과 2층 네 개로 분리된 사이드의 홀,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여섯 개의 샹들리에, 마법이 깃든 수백 개의 조명, 장인의 정신이 엿보이는 노래하는 소년상과 춤추는 소녀상……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경매가 시작하기 전이었고, 마지막 손님은 나인 듯싶었다.
거대한 반원 모양의 문을 통과해 들어서자 좌우 양방향에서 무시무시한 안광들이 비춰졌다.
중앙 관람석이 아니라 2층에 위치한 네 개의 사이드 홀에서 보내지는 시선들이었다.
사이드 홀 하나에 대공 한 명이 휘하 마족들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들어온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리엘만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조금 더 바라봤을 따름이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즉, 중앙 관람석에 앉는 건 나 혼자뿐이라는 뜻이다.
나는 네 명의 대공 중 어느 휘하에도 들지 않은 이레귤러 마족.
이 백작의 지위조차 힘으로 빼앗은 것이었다.
본래 브뤼시엘이라는 칭호를 가졌던 자는 대공 판데모니엄의 휘하 마족이었다. 마신도 내가 아닌 본래의 브뤼시엘을 초대하려 했었던 게 아닐는지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우연찮은 시기에 우연찮게 초대된, 초대받지 않은 마족이 나였다.
어쨌거나.
‘재밌게 돌아가는군.’
전생에서도 이와 비슷한 처지였다.
다만 전생과 다른 점이라면 나는 비할 바 없이 자신이 있다는 것.
포인트가 없어 경매장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던 내가 아니다.
저들이 사고 싶지만 살 수 없는 것들.
사려고 마음먹었으나 경쟁이 붙은 물건들.
‘다 내가 먹어 치워야지.’
가진 자의 여유인가? 전생에서 이 자리는 가시방석이었다. 네 대공과 마족들의 모멸 찬 시선은 오로지 내게만 향했었다.
악의적 조소와 야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벌레’라는 말.
앞으로는 어찌 될지, 과연 전생에서처럼 모멸 찬 시선을 던질지 조금 기대가 되었다
‘대공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오쿨루스…… 그 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는군.’
경매장은 마수를 대동할 수 없었으니 나는 홀로 걸어가 중앙 관람석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턱을 올려 ‘너희 따위에겐 관심이 없다.’는 여유로움을 내비쳤다.
안타깝지만 이번 경매는 나를 위한 무대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한 편의 연극이었다.
저들은 조연조차 될 수 없으리라.
자신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하며 동시에 판단하기 시작하겠지.
‘저놈은 누구인가?’ 하고.
물론 궁금증으로만 끝날 것이다.
나는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아직 전면으로 나설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힘을 비축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알리지 않는 한 네 명의 대공도 감히 내 위치를 짐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알아내려면 네 명의 대공이 한마음으로 휘하 마족이 가진 던전의 위치 정보를 공유해야 했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공들은 경쟁 관계지. 협력할 리가 만무해.’
어떠한 던전에 어떠한 마족이 있는지는 최대의 기밀 사항이다. 그것을 네 대공이 사이좋게 풀어놓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열두 공작과 네 대공의 던전 위치는 확실하게 파악해 놨다.
사용하기에 따라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정보.
정보는 힘이고,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 낼 유효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족을 잘라 내는 건 나중의 일. 지금은 일단 경매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잠시 후 조명의 빛이 무대 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 무대 뒤에서 피에로 분장을 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손님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경매를 맡은 드보롱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1년에 한 번씩은 보게 될 얼굴이었다.
드보롱. 최상급 어둠의 정령 중 하나인 그는 정령왕의 최측근이다. 웃기게 치장하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냉철한 수완가. 그가 곧 어둠 정령왕의 눈이며 손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를 통해 정령왕에게 흘러갈 것이었다. 두각을 보여 정령왕과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다.
‘마계 옥션은 1년에 한 번 열리고, 정령왕은 그 기회를 최대로 살릴 수 있는 좋은 패지.’
정령이다. 서로 합이 맞으면 사는 세계가 달라도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큰손’임을 자처해 이미지를 쌓아 놓고 정령왕, 혹은 드보롱과 소통할 수 있다면 다음 해에 열릴 경매 물품을 미리 알 수도 있었다.
바로 대공 우파가 10년 후에나 써먹을 수법이었다.
우파는 정령왕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경매장에서 남들보다 몇 발 앞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모종의 거래라고 해 봤자 ‘경매장에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사용하겠다.’ 정도일 테지만.
어둠의 정령은 포인트 거래가 경매로밖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확실하게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여기 모인 마족 중 내가 최고라는 사실을!
드보롱의 눈이 마족 전체를 훑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르러 잠시 멈췄다. 그의 눈이 다른 마족을 볼 때보다 빛났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다.
경매장에 오기 전에 벌써 52만 포인트를 사용한 유일한 마족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가볍게 미소 지어 주었다.
뭐…… 혼자 넓은 관람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눈에 띈 것도 한몫하긴 했겠다.
이윽고 모든 마족의 안면을 확인한 드보롱이 이어서 말했다.
“오늘 강제 소환 건에 관하여 대충 설명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정식적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은 포인트를 사용해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마신 데스브링어 님의 주도 아래 주최된 최대 규모의 경매장!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를 모두 즐겁게 감상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첫 번째 경매 물품을 소개합니다.”
무대의 오른편에서 열댓 명에 달하는 어둠의 정령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철창 하나를 바퀴 달린 판에 실어서 옮겨 왔는데, 철창 안엔 아주 눈에 익은 존재가 있었다.
드보롱은 자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많이 고민했습니다. 첫 경매의 시작을 무엇으로 하는 게 좋을까? 100가지나 되는 물건이 있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걸 선보이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마룡 중의 마룡, 전설로 기록된 진마룡 ‘아오진’의 피가 섞인 하프 엘프 크라스라!”
철창 안에 갇힌 하프 엘프 크라스라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납게 이를 갈았다.
지능이 존재하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종족이라고는 하나, 마족은 마족을 제외한 것들을 모두 마수라고 칭한다. 인간이야 너무나 쉽게 약탈당하는 종족이라 마수 측에도 껴 주지 않지만 엘프 역시 마족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수에 불과했다.
나도 반쯤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달라진 게 없군.’
크라스라는 전생의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기대하며 심안을 열었다.
이름: 크라스라
직업: 마창술사
칭호:
* 용의 피를 지닌 자(R, 힘+4)
능력치 :
힘 74(+4) 지능 69
민첩 65 체력 72 마력 77
잠재력(357+4/437)
특이 사항: 노예 각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스킬: 용의 폭주(U), 마창질주(R)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혜보다도 높은 잠재력과 용의 폭주라는 유니크 스킬. 고르기 그지없는 능력치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건?’
크라스라 바로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안력을 돋아 상대를 확인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드보롱이 마저 설명했다.
“그리고 수명이 다 된 그의 여동생 크리슬리 양입니다. 처지가 딱하여 같이 두긴 했습니다만 크라스라를 구입한 분에게 1+1로,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드리겠습니다. 엘릭서를 사용하면 회복할 수 있긴 하나…… 추천하진 않습니다. 기운을 통과시키는 몸의 모든 통로가 막혀서 회복시켜 봤자 성장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도 얼굴은 반반하니 용도는 알아서 사용하시길.”
예의 바르게 나머지를 설명한 드보롱이 화사하게 웃었다.
“자자, 경매 시작가는 0포인트! 장담하건대 크라스라는 이곳에 있는 마족 분 중 누구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강자입니다! 절대 손님분들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진마룡 아오진의 피가 섞였기에 감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기탄없이 말씀 올려 주십시오. 참고로 가진 것 이상의 포인트를 부르면 천장에 보이는 소년과 소녀상에게서 비웃음 소리가 튀어나올 겁니다.”
사이드 홀 중 한 곳을 차지한 대공 한 명이 손을 들었다.
“1만.”
“대공 아리엘 님! 1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그러자 질 수 없다는 듯 다른 대공이 손을 올렸다.
“2만.”
“대공 우파 님! 빠르게 올라가는군요!”
“5만.”
“대공 판데모니엄 님! 5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다들 조금씩 망설이는 기색이다.
5만 포인트조차 없는 마족이 수두룩했다.
대공들도 포인트에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왜냐면 이런 경매가 벌어질 줄 그들은 몰랐으니까.
하물며 아직도 경매 물품은 많다. 크라스라가 대단하긴 해도 모든 포인트를 투자할 수는 없었다.
“10만.”
“아아! 이로써 모든 대공께서 참여하셨군요. 대공 오쿨루스 님께서 10만 포인트를 부르셨습니다.”
10만.
이 역시 엄청난 액수다.
오쿨루스는 여유롭게 대공들을 향해 묘한 미소를 날렸다.
이 정도 투자도 없이 보물을 가지려 하느냐는 조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 대공의 얼굴에 언짢음이 생겨날 무렵.
중앙 관람석의 유일한 손님인 내가 손을 들었다.
“20만.”
삽시간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천장의 소녀상과 소년상은 비웃음을 날리지 않았다.
그만한 포인트를 잔여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20만! 백작 랜달프 브뤼시엘 님께서 20만 포인트를 부르셨습니다!”
드보롱마저 당황하여 내 풀 네임을 입에 담았다.
충격 요법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처음부터 20만을 부른 건 바로 이를 위해서다.
아니, 크라스라와 그의 여동생 크리슬리라면 이 정도 포인트는 사실 싸게 먹힌 거다. 거저 가져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마족들의 생각은 다르며 동시에 그들은 내 이름을 확실하게 들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궁금할 테지.
계속 궁금해하며 똑똑히 각인시켜 둬라.
랜달프 브뤼시엘.
앞으로 너희들이 숱하게 들을 이름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