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31화
비틀!
나는 급격한 무력감을 느끼며 잠깐 몸을 비틀거렸다.
‘이게 페널티인가?’
3일간 힘이 저하된다는 메시지창.
‘이 정도면 할 만하다.’
그래도 영구적으로 내려가지 않은 게 어딘가.
굳이 5만 포인트나 들여서 살 무기는 아닌지라 나는 입찰에 들어가지 않았다. 흥미를 느낀 아리엘 대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찰하여 물건을 가져가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대공들은 썩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다.
그들은 도박을 싫어한다. 거기다가 시작가가 너무 비쌌다.
이어 15번째에 또다시 봉인된 무구가 나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심안을 열었다.
이름- 뭉툭한 검(N)
설명: 검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무기.
[봉인의 등급이 매우 높아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72시간 동안 체력이 –10 저하됩니다.]
“후흡!”
빈혈이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버텨 냈다.
힘겹게 확인했건만 최고의 쓰레기 아이템이었다.
‘쓸 만한 게 있을 거다, 분명히.’
회귀 전의 일이다.
봉인된 무구에서 에픽 등급의 장비가 뜬 적이 두 번 있었다. 공개되지 않은 것까지 치면 서너 개는 될 것이었다.
확률은 낮지만 이번 경매에서 에픽 등급 아이템이 뜨지 말란 법이 없었다.
경매 물품 21번.
이번에도 봉인된 검이 등장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심안을 열었다.
이름- 분노(Epic, Set Item)
설명: 신들조차 반해 버린 신화적인 대장장이 오스웬의 마지막 작품. 7대 죄악을 모티브로 만들었지만 강력한 사념이 깃들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오스웬은 미쳐 버렸다고 전해진다.
“분노하라, 순수 악이여!”
* 힘+7, 7일에 한 번 에픽(Epic) 등급 스킬 ‘분노’ 사용 가능
[‘7대 죄악’ 세트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같은 종류의 세트 아이템을 모으면 모종의 효과가 더해집니다.]
[봉인의 등급이 매우 높아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72시간 동안 민첩이 –10 저하됩니다.]
‘나왔다……!’
지독한 무력감이 몰려왔지만 무시했다.
이로써 내 도박은 완전하게 성공했다.
에픽 등급, 거기다가 세트라니?
세트 아이템은 모으면 모을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일곱 개를 모두 모았을 때 레전드 등급의 무구와도 감히 견줄 만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노멀, 레어, 유니크, 에픽, 그리고 레전드로 이어지는 등급의 사슬에서 사실상 에픽 이상만 되어도 정점이라 할 만했다.
전생에서조차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은 두 개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게, 등급 높은 스킬보다 등급 높은 아이템 찾기가 몇 배는 어려웠다.
그중 ‘Set’ 표시가 붙은 아이템은 더욱 희귀했다.
에픽 등급에 세트? 거의 꿈의 영역이다.
세트 아이템을 모두 모으면 표시된 등급보다 한두 단계 위의 가치를 갖게 된다.
7대 죄악을 얻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더 이상 장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뜻이다.
미약하게 몸이 떨렸다.
크라스라나 크리슬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다.
다듬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분노는 이미 완성되었으며 더욱 완벽하게 완성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내 자신의 강화에 이용된다. 마수를 부리거나 동료를 늘리는 것보다 나 자신의 강함이 축적되는 게 더욱 큰 기쁨을 가져다줬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천생 전사인가 보군.’
전사는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착용할 무구에 애착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분노를 바라보는 내 눈이 더욱 깊어졌다.
‘바람잡이 역할로 꽤 많은 포인트를 소진시켰지. 이제 20만 포인트 이상을 가진 자는 많아야 둘이다.’
21번째 경매가 오기 전까지 바람잡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결과 내가 크라스라와 크리슬리를 구입하느라 사용한 걸 제외한, 총합 257만 포인트를 비워 버리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어둠의 정령은 마족이 가진 포인트의 평균값이 13만이라고 말했으니…… 내가 가지고 있었던 150만 포인트를 제외하면 786만. 이중 경매에서 들인 257만을 빼면 71명의 마족이 가진 포인트는 529만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7.5만에도 살짝 못 미치는 액수.
반면 난 아직도 83만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다.
슬쩍 시선을 돌려 사이드 홀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경매에 참여하며 20만 포인트 이상을 사용한 마족은 둘이었다.
한 진영당 한 명씩 있다손 쳐도 그 이상의 포인트를 가진 마족은 많아야 둘이라는 소리.
경쟁조차 되지 못하는 구도지만 최대한 아끼는 게 좋은 현재로선 그들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도 봉인된 무구입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향이 심상치 않은 이 물건! 역시 5만 포인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드보롱이 자신 있게 소개했다.
나는 즉시 손을 들지 않았다. 분노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이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손을 들었다.
“5만.”
“백작 랜달프 님! 5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6만.”
“대공 아리엘 님! 포인트가 아직 남아 있으셨군요!”
아리엘이 참전했다.
그녀는 이전에도 봉인된 무구를 하나 구매하지 않았나.
그것도 익셉셔널 레어(Ex R) 등급의, 그럭저럭 괜찮은 것을 가져갔다.
잔여 포인트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일진대 이번에도 참여한 걸 보면 봉인되었다곤 하나 무기를 보는 안목 하나는 상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스킬이 아니라 순전한 안목이다. 아리엘 디아블로는 웨폰 마스터. 봉인된 무구조차 조금은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 정도면 감의 영역인데 놀랍기 그지없다.
“7만!”
“대공 우파 님, 7만까지 나왔습니다. 가파르게 올라갑니다!”
문제는 대공 아리엘이 참여함으로써 그녀의 정적인 대공 우파가 참전했다는 것이다. 마음 편하게 가져가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 경쟁이 붙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둘은 나 따위야 안중에 없다는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에픽 등급의 세트 아이템임을 알아차린 이상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0만.”
“백작 랜달프 님!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 멋집니다. 10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11만.”
“대공 아리엘 님!”
“12만.”
“대공 우파 님!”
“15만.”
“그의 끝은 어디인가! 백작 랜달프 님!”
둘이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달았는지 대공 아리엘과 우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당연히 좋은 의미의 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이미 한계였다. 진즉 5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잔여 포인트가 얼마 없었다. 우파도 그렇게 넉넉한 상황은 아닌지라 내게 무시무시한 안광만을 던질 따름이었다.
나는?
여유가 있었다.
그들보다는 확실히.
“3, 2, 1! 축하드립니다. 랜달프 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드보롱이 박수를 쳤다.
분노가 나의 것이 된 순간이었다.
이어진 경매에서 나는 여섯 개의 물품을 추가로 더 구입할 수 있었다.
‘뇌신공’이라 불리는 유니크 등급의 스킬북, 유니크 등급의 반지 ‘파라노말’, 민첩의 물약, 익셉셔널 유니크 등급의 세트 아이템 ‘죽음 지팡이’, 레어 등급의 ‘영원의 꽃’, 그리고 다크 엘프의 마을 하나를 통째로 구입하여 총 65만 포인트를 사용했다.
얻은 아이템을 나열해 보자면…….
이름- 뇌신공(雷神功, U)
설명: 뇌신이 되기 위한 공부가 적힌 비법서. 12성까지 연마하면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이름- 파라노말(U)
설명: 다섯 가지 축복 중 하나를 무작위로 내려 주는 반지.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2, 회복, 30분간 마력+5, 강력한 매력 부여, 무한 정력 중 한 가지 축복을 하루 한 번 얻을 수 있다.
이름- 민첩의 물약
설명: 민첩 1을 영구히 증가시킨다.
이름- 죽음 지팡이(Ex U, Set)
설명: 죽음의 왕이 사용했던 지팡이. 죽음을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업적은 공포로 얼룩져 있다.
* 마력+4, 귀속 아이템, 언데드 제조(U) 스킬 사용 가능.
이름- 영원의 꽃(R)
설명: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영원히 핀다는 아름다운 꽃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지는 효과가 있다.
마지막 다크 엘프의 마을은 아이템이 아닌 관계로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총인원 50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성년의 다크 엘프는 중급 마수 Lv3에 달하는 무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만물상점에서도 따로 구입할 수 있으나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뇌신공과 파라노말, 민첩의 물약은 내가 사용할 물건이었다.
특히 능력치를 영구히 올려 주는 물약은 지금이 아니면 엄청나게 비싸게 구매해야 하기에 선점해 두었다. 나중에 벽에 막히거든 마실 것이다.
죽음 지팡이는 일전에 얻은 사령술사의 책과 훌륭한 시너지를 낼 것 같았다. 사령술사도 죽음을 관조하는 직업이니 함께 사용하면 상당한 상승효과를 가져올 게 분명했다
나는 이 두 개를 크리슬리에게 양도할 작정이었다.
그녀의 지능과 잠재력이 합쳐지면 전무후무한 네크로맨서가 탄생하리란 기대감이 있었다. 조금 더 성장하면 나를 대신해 던전 마스터 대리를 맡겨도 무방할 터였다.
사실상 죽음을 다루는 직업만큼 던전 마스터와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
대리로 세우기엔 안성맞춤이다.
영원의 꽃은…… 이건 3천 포인트에 구입했는데, 당연하게도 이히에게 배정되었다. 내가 꽃 따위를 어디다가 쓰겠나. 이히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었고, 이히의 반응을 상상하니 썩 재미가 있을 듯해서 구입했다.
‘이게 끝이 아니지.’
포인트를 사용한 경매에서 얻은 건 위의 것들이 전부다.
하지만 포인트를 사용하다가 얻은 게 있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이스터 에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놀라운 업적! 첫 경매에서 100만 포인트 이상을 사용하였습니다.]
[7급 이스터 에그가 개방됩니다.]
[‘잔여 능력치 1’을 획득합니다. 한 번에 한하여 원하는 능력치를 하나 올릴 수 있는 권능입니다.]
“하하하!”
경매가 끝난 뒤 나는 크게 웃어 버렸다.
원했던 것을 모두 얻었으며 기대 이상의 결과에 만족했다.
나락 군주의 심장을 얻었던 3급에 훨씬 못 미치는 7급이지만 보상은 나쁘지 않았다. 원하는 능력치를 원하는 때에 올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순수 능력치가 90을 넘으면 하나 올리기가 죽을 만큼 힘들다. 그때 민첩의 물약이나 잔여 능력치는 한계를 넓혀 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줄 것이었다.
“멈춰라.”
경매장의 넓은 홀을 막 벗어난 시점.
그로기 후작이 날 막아섰다.
던전 안을 서큐버스로 채웠다가 지리멸렬한 마족.
대공 우파의 측근 중 한 명인 그가 왜 나타났는지 대충 짐작은 되었다.
좋은 물건을 죄다 뺏긴 게 억울해서겠지. 아니, 어쩌면 포인트 모으는 비법이 궁금해서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로기를 무시하고 걸었다. 놈이 나섰다는 건 공작이나 대공의 묵인하에 행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신경 써 줄 필요가 없었다.
“이 버러지가 날 무시해?”
수악!
정확히 나를 노리고 창대가 날아들었다.
그로기가 그사이를 참지 못해 공격을 한 것이다.
하지만 능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아무리 저주로 능력치가 하락되었다고 해도 공작이나 대공이 나서지 않는 한, 후작 따위가 날 어찌할 순 없었다.
날아드는 창대를 잡았다.
“이걸 공격이라고 하는 건가?”
“익……!”
그로기가 분해하며 창을 움직여 봤지만 요지부동이다.
“이놈! 놔라! 후회할 것이다!”
“후회? 네가 하는 거겠지.”
“죽음 지팡이를 넘겨라. 그 물건은 너 같은 버러지가 가지기엔 아깝다. 더욱 어울리는 분이 존재하니 기쁜 마음으로 건네야 할 것이다.”
시비를 건 이유는 죽음 지팡이에 있었나 보다.
“버러지라…….”
나는 쓰게 웃었다.
결국 벌레라는 말이다.
이번 생에서조차 같은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나는 창대를 잡은 자세를 유지하며 검을 소환했다.
그대로 강하게 창대를 잡아당겨, 그로기의 왼팔을 잘랐다.
“크아악!”
“주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창졸간에 일어난 일.
그로기의 능력치는 나에게 한참 못 미친다.
마족답게 그로기는 쓰러지진 않았지만 악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엔 마치 네가 버러지처럼 보이는구나. 가볍게 밟아도 등이 터지는 존재 말이야.”
나는 차게 웃으며 나머지 팔 하나를 잘라 내려 했다.
죽이는 것 자체는 이곳이 아니라 지구로 돌아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이곳에서 마족을 죽였다간 드보롱과 겨우 터놓은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파삭!
막 검을 내리치려는 찰나 그 사이로 검은색의 구체가 지나갔다.
구체는 땅에 박혀 주변의 지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위력을 조종했는지, 아직 스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빨아들이는 힘이 적었다. 하지만 저 스킬을 최대치로 사용하면 건물 자체가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눈에 익은 스킬.
동시에 사방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애가 다치니 부모가 납시셨군.”
나는 검을 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