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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32화 (32/242)

던전 사냥꾼 32화

나를 제지한 이는 대공 우파였다.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그의 전매특허 스킬.

대공 우파의 옆에는 수많은 마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도다.”

말투에서부터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오만하며 독선적인.

충분히 그만한 위치에 있는 존재이나 내겐 별개다.

“내가 그쪽의 휘하 마족인가? 그쪽에 붙은 기억은 없는데.”

우파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버릇없는 것. 하지만 네놈이 내 휘하의 마족을 공격한 건 엄연한 사실. 이를 어찌 해명할 셈이냐?”

해명이고 자시고 공격했기에 받아친 것뿐이었다.

나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대충 답했다.

“놈이 먼저 공격했다.”

“팔을 잘라 낸 건 네놈이지.”

“포션으로 붙이면 될 거 아닌가.”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따지고 드는지.

이런 상황이 되리란 예상을 어렴풋이 하고 있기는 했다.

예상했기에 적당히 연극을 해 준 것이다.

사실 그로기 따위에게 욕 좀 들은 걸로 흥분하면 그건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김용우가 말하던 코끼리와 개미, 그 정도의 차이였다.

애당초 화가 나지도 않았다.

팔을 잘라 낼 일조차 아닌 일에 나는 굳이 손을 썼다.

왜일까?

마계의 이면, 어둠의 정령왕이 다스리는 이곳의 룰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는 오로지 나밖에 없으니까!

“목이 잘려야 조용해질 놈이구나.”

“내 목을? 하하!”

내 목을 자를 수 있는 이는 없다.

전생에서, 힘이 부족할 때조차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나다.

고작 이런 장소에서 죽자고 회귀한 게 아니다.

“이놈……. 적당히 성의를 보이면 용서해 주려 했다만 안 되겠다. 파간, 저놈의 입을 막아라.”

공작 파간.

우파를 곁에서 보좌하는 세 명의 공작 중 하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나는 심안을 열었다.

이름: 파간 그리울리

직업: 마계 공작(던전 마스터)

칭호 :

* 늑대의 왕(Ex U, 힘민첩+4)

능력치 :

힘 80(+4) 지능 63

민첩 65(+4) 체력 68 마력 77

잠재력(353+8/500)

특이 사항: 척박한 늑대의 땅, 그리울리의 주인.

스킬: 늑대화(U), 재생력(U)

[상대 비교]

파간 그리울리

힘 84 지 63 민 69 체 68 마 77 잠재력(353+8/500)

랜달프 브뤼시엘

힘 71 지 56 민 66 체 72 마 80 잠재력(329+16/500)

(페널티로 인한 모든 능력치 –10 상태)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능력치 면에선 살짝 밀린다. 페널티 탓이다.

경매 중 다섯 개의 봉인된 무구를 심안으로 살피며 능력치가 –50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라면 정상적인 상태에선 여유롭게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스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역시 뇌신공을 익히고 분노를 사용하면 역전될 부분이었다.

‘대공과 공작 간의 차이가 크군.’

대공들의 능력치 총합은 대부분이 400에 근접했다. 반면 공작은 340에서 360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과연 대공. 격이 다른 존재란 말인가.

그리고 나 역시 대공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비록 페널티가 그것을 다 깎아 먹었지만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경매장 안에서 마족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대공 아리엘, 판데모니엄, 오쿨루스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소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와 파간을 바라봤다.

물론 그 흥미의 대부분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72마족 중 어느 파벌에도 들지 않은 유일한 자.

거액의 포인트를 아낌없이 사용하던 마족…….

강자일까, 약자일까?

강자라면 접촉하고, 약자라면 버린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듯이.

그런 식의 계산을 냉정하게 하려 들 것이다.

“무기를 들어라, 풋내기 마족아.”

파간이 짐승처럼 그르릉거리며 입을 열었다.

늑대의 왕, 그리울리의 지배자, 충신 중의 충신. 하지만 허무하게 버려질 자, 우직하게 멍청한 놈.

빠르게 머릿속으로 파간 그리울리에 대한 평가가 지나갔다.

“그쪽은 무기가 필요 없나? 멍멍이 마족?”

“버릇없는 놈이군. 내 무기는 이거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칼날보다 예리한 이빨과 손톱을 보이며 파간이 말했다.

“그런가? 그럼 사양 않지.”

나도 검을 들었다.

자세를 잡은 후 막 격돌하려는 찰나.

“……멈추시오! 이곳은 정령왕께서 다스리시는 성전! 함부로 난동을 부리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소!”

거칠어 보이는 인상의 최상급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드보롱이 서 있었는데, 그가 나를 보곤 윙크를 날렸다.

나는 말하자면 VIP 고객이다. 게다가 바람잡이 역할로 톡톡히 재미를 봤기에 그가 나에게 보내는 호의도 당연한 것이었다.

‘제때 왔군.’

나는 즉시 검을 늘어트렸다.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음을 그들에게 알렸다.

“정령들 따위가 우리의 행사에 끼어들려 하느냐? 저놈은 대공 우파 님을 모욕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와 반대로 파간은 불같은 성질을 드러내며 노골적인 항의를 했다.

정령계에 발을 들인 건 그들로서도 처음 있는 일. 하물며 오만으로 똘똘 뭉친 우파와 휘하 마족들답게 누구의 말에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멍청한 짓이다.

경매를 주관하는 어둠의 정령들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파악했다면 이런 행위는 해선 안 된다.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대공 우파 역시 파간을 막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도 짜증이 서려 있었다.

강제 소환을 당해 경매에 참여했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내가 도발하고, 정령들이 자신의 행사를 막아섰다. 차곡차곡 쌓인 분노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단지 우파와 파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을 뿐이고.’

다른 장소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은 어둠의 정령들에게 절대적인 장소.

정령왕의 성전이다.

이곳에서 정령왕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다?

사생결단을 내자는 거다.

마신의 계약에 의거해 정령들이 먼저 마족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는 없지만 경매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있었다.

특히 초창기에는 포인트가 부족하여 경매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데, 경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다른 마족과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우파와 파간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렇기에 저런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정령들 따위? 대공 우파와 그대들이 마계에선 제법 한가락 한다고 하나 이곳은 정령계! 그대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최상급 어둠의 정령이 분노에 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뒤로 여러 정령이 모여들고 있었다.

파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그래서 우리를 막겠다는 건가? 이건 우리 마족의 일이다!”

마족의 일에 정령이 간섭하는 건 모습이 좋지 않았다.

다른 마족들 역시 조금은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그러나 나와, 정령들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이곳은 정령계다. 그대들이 이곳에 왔으니 마땅히 정령의 법을 따라야 할 터인즉!”

“강제로 소환해 놓고 따르라? 우리가 그리 만만해 보이는가!”

“마신께서 주관하신 것이지 그것은 정령들의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싫다고 한다면 좋다! 대공 우파와 그 휘하 마족들에게 3년간 경매장 출입을 금하도록 하겠다.”

“오냐. 오라고 사정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

파간이 결정해선 안 되는 사항이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릴 것 같던 이야기가 파간의 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하하!’

3년이라!

걸작이다.

이로써 대공 우파와 휘하 마족들은 3년간 이뤄지는 세 번의 경매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메울 수 없을 만큼의 간극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초반의 격차가 후반까지 갈 것이 자명했다.

‘한 명은 떨어트렸군.’

예상은 하고 있었다. 시비를 걸어오는 마족이 있을 것이라고. 그 덫에 대공 우파가 걸렸다.

바람직한 일이었다.

적당히 장단에 맞춰서 놀아 준 대가로는 충분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은 정령의 법대로 처리하겠다.”

어둠의 정령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파간이 이를 갈았다.

“웃기는 소리! 누가 감히…….”

“동의하지. 궁금한 게 있나?”

파간의 말을 내가 끊었다.

원하는 바는 이뤘고, 이제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동시에 최상급 정령의 표정이 달라졌다. 옆에 선 드보롱의 얼굴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 사정 취조에 협조해 주시겠소?”

“적당한 선이라면 협조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곳은 그대들의 땅이니까.”

“고맙소이다.”

“후후! 인간들의 말 중에 이런 게 있지.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참고로 로마는 어느 국가의 이름이다.”

“인간들도 그런 면에선 괜찮은 구석이 있구려. 그보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 일의 경위부터 듣고 싶소만…….”

파간을 대할 때와는 말투와 행동 자체가 다르다.

어차피 다른 마족은 모두 나와 경쟁 관계였다. 놈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알 바 아니다.

반면 정령은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누구의 손을 들어야 하는지는 시작부터 뻔하다.

마족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파간이나 대공 우파는 대놓고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개의치 않았다.

저들의 틀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이 앞길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저들이 없으리란 건 확실했다.

그러니…… 막힘없이 한 번 걸어 보련다.

* * *

경매가 끝났다.

나는 무사히 던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을 뜨자 던전 코어 위에서 잠든 이히의 모습이 보였다.

‘웬종일 잠만 잔 모양이군.’

요정은 원래 잠이 많다. 육체도 없는 주제에 왜 잠을 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놔두면 몇 날 며칠을 잠들기도 했다.

던전 마스터가 왔음에도 꿋꿋한 자세다.

작게 혀를 찬 후 품에서 새끼손톱만 한 돌멩이를 꺼냈다.

경매를 진행했던 담당자 드보롱.

정령왕의 최측근인 그가 내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이걸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 돌멩이는 연락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셈이다.

허나 단순히 연락만 주는 게 선물은 아닐 것이었다.

드보롱이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준 선물이 무엇인지 짐작은 갔다.

‘편의를 봐주고 경매 물품을 미리 알려 주겠다는 뜻.’

경매에 뭐가 나올 것인지만 알면 미리 계획을 짤 수 있다. 그만큼 좋은 아이템이나 스킬, 마수를 얻는 게 가능해진단 소리다.

앞으로 몇 년 뒤에나 가능할 것 같았는데, 우파와 파간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정령들과 반목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를 통해 화목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람잡이 역할도 계속해 주리란 암묵적인 동의 아래 이번 일이 성사된 것이다.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구조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이잉.

그때 공간의 균열이 내 바로 옆에서 생겨났다.

나는 돌멩이를 품에 집어넣은 후 시선을 돌렸다.

‘도착했군.’

균열이 걷히며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분노다.

이어 죽음 지팡이, 파라노말, 영원의 꽃, 뇌신공, 민첩의 물약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구매한 경매 물품의 전송이었다.

“헙! 뭐, 뭐예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느닷없는 파공음에 잠에서 깨어난 이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입가의 침이 적나라했지만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이히를 무시하고 물건을 모두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지이이이잉!

곧 그 옆에서 더욱 큰 균열이 생겨나며 50명의 다크 엘프들이 걸어 나왔다.

대부분이 아직 어려 성체는 몇 없었지만 충분히 제값을 하는 존재들이다.

성체의 다크 엘프 하나가 보통 6,600PT를 호가하니까. 이들 50명을 고작 8만 포인트에 구매했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걸어오는 두 명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크라스라와 크리슬리!

이번 경매 최대의 기대주들이 잔뜩 표정을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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