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35화 (35/242)

던전 사냥꾼 35화

* * *

“룰루~”

비밀의 화원.

녹음이 짙은 풀과 나무, 꽃들이 아우러져 있었다.

던전의 다른 곳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이히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장소였다.

던전 마스터 몰래 포인트를 조금씩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러 가며 어렵사리 완성한 곳이다.

던전의 지형이나 구조를 바꾸는 일은 제법 많은 포인트가 들어서, 여기를 꾸미는 데만 1년을 전부 사용했다.

화원의 구석. 양봉장에 도착한 이히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마, 마, 마스터는~ 커다란 무기가 두 개~”

파라노말의 축복 ‘무한 정력’에 의해 불뚝 솟았던 분신.

두 개의 무기란 손에 들고 휘두르던 무기와 하반신에서 휘둘러지던 무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히는 요상한 노래와 함께 부지런히 일을 하는 꿀벌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안녕? 맛있는 꿀들아?

이에 반응하듯 꿀벌들이 몸을 바짝 움츠렸다.

던전 마스터가 제정신을 찾은 게 기뻐서 그만 양봉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말았지만 지금의 이히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만 살아가는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이히였기에!

“랄라!”

콧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히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엔 가운데가 훤히 뚫려 있는 피나무가 있었다.

구멍 안에는 꿀벌이 열심히 만든 목청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히는 그중 가장 튼실해 보이는 목청을 하나 꺼냈다.

목청이 질긴 꿀을 뚝뚝 흘리며 이히의 뒤를 따라 날아왔고, 그제야 이히는 몸을 돌렸다.

“마스터는 무기가 두 개!”

던전 마스터가 상태 이상에 걸린 직후 휘두르던 두 개의 늠름한 무기를 떠올리며 이히가 볼에 홍조를 띠었다.

* * *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눈앞에 자리한 크라스라를 바라봤다.

“터무니없군.”

그리고 맹렬하게 비웃으며 혀를 찼다.

최상층에 찾아온 크라스라는 예상처럼 나를 본 즉시 ‘엘릭서를 한 병만 주십시오.’하고 간청해 온 것이다.

직구도 이런 직구가 없었다.

하지만 크라스라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릭서를 하사해 주신다면 이 크라스라, 온몸을 바쳐 던전 마스터를 보필하겠나이다.”

크라스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크라스라의 성장력은 눈여겨볼 수준이다.

당장 12공작 중 한 명과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뿐이라는 게 문제다.

진정 저 머리는 장식이란 말인가? 내가 구입한 이상 크라스라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오로지 나를 위해 사용해야 마땅하다.

그 당연한 것과 엘릭서를 교환하자니?

이런 터무니없는 유머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너 따위가? 나를 보필한다고? 하하!”

당연히 말이 곱게 나갈 리 만무.

나는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가장 강한 100마리의 마수 중 하나였던 자.

그만한 역량을 보여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고작 충정 따위에 내가 움직이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크라스라는 자신의 가치가 얕보였다 여겼는지 열변을 토했다.

“제 무력은 데스 나이트나 다크 워리어와도 필적합니다. 오우거 둘을 동시에 상대해 승리를 거머쥔 적도 있으며 진족 뱀파이어의 목을 잘라 낸 이력 또한 있습니다. 잘만 사용한다면 충분히 던전 마스터의 검이 될 것입니다.”

구구절절한 스펙 나열이다.

나는 여전히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검이라. 그럼 검에게 묻겠다. 너는 줄리엄을 포함한 너희 마을의 다크 엘프를 모조리 도륙할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크라스라의 눈이 커졌다.

이미 저런 자세를 취한 것부터가 검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검은 휘두르면 그대로 행해야 하는 물건.

의구심을 갖지 않아야 정상이다.

나는 비웃음을 지우고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는 감히 내게 거짓을 고했다. 뱀파이어의 희생양이 된 크리슬리가 불쌍하여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지. 정말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내가 그따위 말을 믿을 줄 알았는가?”

“오해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마을은 서로 의지하며 오랜 세월을 버텨 왔습니다. 특히 크리슬리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하!”

내가 크게 코웃음을 치자 크라스라가 몸을 떨었다.

나는 모든 마력을 개방하여 크라스라를 압박했다.

좋게 말해서 알려 줄 생각이 없다면 태도를 바꾸면 그만이다.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로군.’

대화로만 풀기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분명히 기회를 줬고, 이를 마다한 건 크라스라였다.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할 듯싶었다.

하여 다소 격양되게 말했다.

“크라스라, 너는 마지막 기회를 내버렸다. 내가 베푸는 아량에 침을 뱉고 바닥에 내동댕이쳤어. 마지막 순간에라도 진실을 고했다면 나는 충분히 너의 충정을 믿고 재고했을 터.”

내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찼고 내 목소리엔 살의가 가득했다.

누가 보더라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 화가 난 모습처럼 보일 것이었다.

크리슬리를 지키는 이유!

나는 그 하나만을 원했다.

진마룡의 피를 이은 것과 관련하여 무언가 배경이 있으리라 여겼다.

안 그러면 그들이 오로지 크리슬리를 위해 헌신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어 봤자 아무런 득도 없는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마룡 중의 마룡인 진마룡과 관계된 것이라면 반대로 커다란 득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라스라는 내 기대를 배반하였다.

노예가 주인에게 중대한 사실을 감추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무리 잠재력이 높은들 그런 노예는 필요가 없었다.

교육, 그리고 벌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노예 각인이 새겨져 나의 말 한 마디면 죽음에 달하는 고통조차도 느끼게 할 수 있지만 그건 너무나 싱겁다.

“무기를 들어라, 크라스라. 네가 여기서 나를 막는다면 이 일을 덮어 주마.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너희 다크 엘프들은 모조리 몰살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윽고 분노가 내 손에 쥐어졌다.

마창술사란 직업답게 크라스라가 붉은색의 기다란 창을 들었다.

칭호의 옵션을 더해 362에 달하는 능력치 총합의 소유자. 하지만 분노를 든 내 능력치 총합은 400을 넘어갔다. 40 차이는 결코 허투루 볼 수 없다.

단순히 육체적 능력치만 따져 봐도 내가 우월했다. 거기에 나는 방대한 전투 지식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크라스라가 아무리 노련해도 내 상대는 되지 않는다.

크라스라 역시 은연중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대치한 것만으로도 송골송골 흐르는 땀과 쉼 없이 삼키는 침. 긴장감이 역력한 눈동자가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감은 좋다만…….’

실력은 어떨까?

잠재력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줄 수 있을까?

나는 검을 쥐고 그대로 내달렸다. 강자가 약자에게 한 수 접어준다거나 그런 사치를 나는 배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적이라 규정한 이를 박살 낼 뿐이었다.

차앙-!

크라스라가 가까스로 창을 올려 검을 막아섰다.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크라스라의 몸이 살짝 갸우뚱거렸다. 고작 한 차례의 격돌. 크라스라는 적어도 힘에 있어서 나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 보다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스킬 ‘마창질주’다.

회오리같이 창대를 돌리며 나를 압박하려 들었다. 마치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다가오는 느낌. 현란한 움직임 속에 숨겨진 진짜를 찾지 못하는 한 확실히 곤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마창질주 스킬의 등급은 레어. 압도적인 능력치의 격차를 좁힐 수 있을 만한 스킬은 아니었다.

챠앙!

툭!

붉은 창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의를 파악하고 창을 쳐 내는 것 자체는 내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었다.

크라스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단박에 자신의 스킬이 파악당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겠지. 나만 한 강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는 방증이다.

“이게 끝이냐? 고작 이 정도로 내 검을 자처했는가!”

내가 타박하자 크라스라가 정신을 차렸다.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쥔 크라스라의 눈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파충류의 눈과 같이 반개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얼굴 표면으로 까슬까슬한 검은색 비늘이 올라왔고, 이빨과 손톱이 더욱 뾰족하고 더욱 단단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용의 폭주!

크라스라가 가진 유니크 등급의 스킬이다.

“크르…….”

짐승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크라스라가 내게 적의를 던졌다.

나는 그 상태가 심히 궁금하여 심안을 열었다.

이름: 크라스라

직업: 마창술사

칭호:

* 용의 피를 지닌 자(R, 힘+4)

능력치 :

힘 74(+4) 지능 59

민첩 65 체력 83 마력 77

잠재력(358+4/437)

특이 사항: 노예 각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스킬 ‘용의 폭주’가 발동된 상태입니다. 기존에 배웠던 모든 스킬이 없어지고 대신 특수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된 스킬은 용의 폭주가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스킬: 용의 숨결(U), 단단한 비늘(R), 날카로운 공격(R), 위험 감지(Ex R)

능력치는 변한 게 없었다.

대신 스킬이 달라졌다.

기존에 있었던 용의 폭주(U)와 마창질주(R)가 사라지고 다른 네 가지 스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특이한 스킬이군.’

전생에서 크라스라가 싸웠던 모습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소문만 무성히 들었다. 용의 폭주가 이런 스킬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존에 배웠던 스킬을 대신하여 특수 스킬을 발동시킨다, 라.

딱히 스킬을 배우지 않았을 땐 엄청나게 좋은 수가 되겠지만 기존에 좋은 스킬들을 익히고 있다면 사용 안 하느니만 못한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좋다고 하기에도, 나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스킬이 용의 폭주였다.

‘용의 숨결만 조심하면 되겠지. 나머지는 오로지 육탄전이 되겠어.’

육탄전.

제일 자신 있는 분야다.

피식 웃으며 분노를 겨눴다.

그 순간 크라스라가 움직였다.

정확히 내 좌측을 파고들기에 한 발자국 물러나 분노를 휘둘렀다. 크라스라는 전진하는 중이었고, 엄청난 반응 속도로 휘두른 검이건만 그것을 피해 냈다.

휘두르기 전에 감지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위험 감지 스킬.’

몇 번 더 검격을 나누자 확실해졌다.

위험 감지 스킬이 항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만능은 아니다.

굳이 그런 스킬이 없더라도 나는 크라스라의 움직임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스라는 그저 감에 의지해 내 움직임을 읽는 데 그쳤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무한히 찔러 오는 검. 한 번의 빗나감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준다는 뜻!

푸욱!

“끄윽!”

가슴을 깊숙이 파고든 분노. 울컥하는 피와 함께 크라스라가 단말마를 질렀다.

“아직…….”

하지만 크라스라의 두 눈에 투지는 여전했다.

크라스라는 내 검을 부여잡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움.

무언가가 고동치는 소리와 함께 상당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나는 곧 결집되는 마력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용의 숨결!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내는 그 스킬이 곧 크라스라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려는 찰나.

지지직-!

검을 타고 흘러간 뇌신공이 마력의 결집을 방해했다.

용의 숨결은 불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검을 통해 흘려보낸 마력은 뇌 속성이다. 다른 두 개의 마력이 몸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커어어억!”

스킬이 캔슬되고, 응집되지 못한 마력이 미쳐 날뛴다.

그 여파는 크라스라에게 모두 전가되었다.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선 연기가 치솟아 올랐으며 눈이 뒤집혔다. 꿀렁이며 흘러나오는 피의 양도 상당했다.

그나마 즉사하지 않은 것은 용의 피 때문이다.

나는 분노를 빼낸 뒤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이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이겼군.”

* * *

50명의 다크 엘프가 내 부름을 받고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올라온 즉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린 채 넝마가 된 크라스라를 바라보았다.

크라스라는 일족 최고의 전사!

믿기지가 않았다.

정신을 잃은 크라스라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겨우 목숨은 부지한 상태지만 걸레짝이 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크라스라의 몸뚱이 위에 반쪽짜리 해골 가면을 착용한 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늦었구나.”

“위대하신 던전 마스터를 뵙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줄리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어 나머지 엘프들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한 명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묻자 줄리엄이 빠르게 답했다.

“크리슬리는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이곳까지 올 수 없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나는 분명 모든 다크 엘프가 최상층에 오르라 명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줄리엄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생겼다.

“그, 그럴 리가요. 던전 마스터께서는 저희의 하늘 같은 주인님이십니다.”

“끝까지 나를 기만하겠다는 건가. 들어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크 엘프들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그 알량한 세 치 혀만을 믿고 나를 재려고 들었다. 몇 번이나 말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숨기기에 급급했지. 그것도 모자라 크라스라는 나와의 싸움에서마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한데, 이제는 내 명령마저 불복했다. 내가 너희를 어찌 대해야겠는가! 너희는 노예라 칭할 자격조차 없다.”

꿀꺽!

다크 엘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침을 삼켰다.

마력을 개방하자 가면의 효과가 발동되어 그들에게 공포를 심은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강력한 마력에 그들은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그 순간 목이 잘려 버릴 것만 같았다.

바닥이 보이도록 고개를 숙인 채 몸만 덜덜 떨어 댈 뿐이었다.

모두 의도한 바다.

해골 가면을 쓴 것도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는 다크 엘프들을 오연히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그 죄, 목숨으로 갚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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