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36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던전 마스터시여!”
선언이 끝난 직후.
줄리엄이 급히 고개를 들더니 무릎을 바닥에 끌면서 다가왔다.
지극히 노예다운 자세다. 하지만 내 표정은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누가 너에게 발언을 허락했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현명하게 판단하시어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쿵! 쿵!
줄리엄은 이마가 부서지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피가 줄줄 흘러 얼굴이 흥건하게 젖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거짓이 아니었다.
크라스라와 크리슬리를 죽이는 일은 없겠지만 아주 모진 꼴을 당할 테고, 나머지 다크 엘프들의 생사는 내게 있어서 전혀 아쉽지 않았다.
줄리엄을 바라보는 다른 다크 엘프들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가던 그때.
죽은 듯이 기절해 있던 크라스라가 줄리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퍼억!
나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크라스라의 배를 걷어찼다.
붕 뜬 크라스라의 신체가 몇 미터나 날아가서 볼품없이 땅 위를 굴렀다.
단말마마저 내지르지 못하고 크라스라는 다시 기절했다.
동시에 짧지만 긴 정적이 찾아왔다.
다크 엘프에게 있어선 1초가 1분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그 이야기라는 게 매우 중해야 할 것이다. 별 볼 일 없거나,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크라스라와 크리슬리를 비롯한 너희 모두 무사하진 못할 터이니.”
나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냉엄하게 말했다.
내가 이 정도로 자비를 보이는 건 정말 흔치 않다.
회귀하며 도량이 넓어진 것도 있지만 그만큼 진마룡과 관계가 있을 크리슬리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였다.
진마룡 아오진은 전설적인 존재.
마왕을 잡아먹었다 전해지는 용이다.
그게 사실인지는 몰라도, 마왕과 비슷한 격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줄리엄은 내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한다. 짧게 말하라.”
“제 이야기는 던전 마스터께 분명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크리슬리를 영원의 반려로 맞아 주실 수 있으신지요?”
영원의 반려.
나도 들어 본 바가 있었다.
일반적인 혼례와 의미는 비슷하지만 다크 엘프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만이 행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보름달이 뜨는 날 달빛이 비추는 밀폐된 장소에 남녀가 알몸으로 들어감으로써 시작되는데,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오로지 물만 섭취하며 하루에 한 줄씩 서로의 신체에 피로 인을 새긴다.
의식을 행하는 동안은 결코 몸을 섞어선 안 되며 신체가 완전하게 정화되고 한 점의 노폐물이 없을 때 다음 보름달이 뜨는 날이 되어야 비로소 결합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생명력이 강한 다크 엘프라서 가능한 의식이지만 한 달을 굶는 것 정도는 내게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왜 크리슬리와 그 의식을 행해야 하냐는 점.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해 줄 리가 없었다.
“너희는 자신의 입장을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줄리엄은 급히 도리질을 쳤다. 닦지 못한 피가 사방에 튀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의식을 통해 던전 마스터께 큰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내게 도움이 된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전에 크리슬리의 혈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나를 먼저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라.”
“크리슬리는 태양왕 아오진 님과 달의 여왕 쉴라 님의 자식입니다. 진마룡과 다크 엘프 하이어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진정한 화신이지요.”
진마룡 아오진의 피를 이었다는 건 칭호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 엘프 하이어라.
다크 엘프이되 다크 엘프의 규격을 벗어난 자.
최상급 마수 중에서도 상위에 링크된 그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럼 크라스라는 뭐지? 같은 피를 이어받은 게 아닌가?”
“엄밀히 따지자면 아닙니다. 아오진 님의 피를 주입받긴 하였으나, 그게 전부입니다. 크리슬리를 지키는 호위 같은 존재입니다. 정작 크리슬리는 모르고 있지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칭호부터가 어색한 감이 있었다.
크라스라의 칭호는 ‘용의 피를 지닌 자’.
아오진의 혈통을 완전히 이었다고 하기에는 등급도 매우 낮았다.
단순히 피를 주입받은 거라면 이해가 됐다.
이제야 앞뒤가 맞는 사실을 털어놓을 셈인 듯싶었다.
줄리엄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둘의 피는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게다가 균형도 맞지 않았습니다. 태양왕의 혈성이 조금 더 우세하여 여왕의 피는 발현조차 하지 못하고 저주로 남아 버렸지요.”
과연 진마룡. 다크 엘프 하이어의 피가 가진 특성을 발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격을 가진 존재였다.
저주라는 것도 익히 짐작이 되어 말했다.
“그게 빙룡의 저주인가.”
“맞습니다. 엘릭서가 체질을 개선시켜 줄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릭서는 신의 음료! 감히 저희가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아오진 님이나 쉴라 님이 계셨다면 모르겠지만 두 분은 크리슬리를 낳은 뒤 수명이 다해 돌아가셨으므로 방법이 없었습니다.”
확실히 진마룡이라면 진즉 수명이 다해 죽었어야 할 나이였다. 여태까지 살아 있었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그래서 어둠의 정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냐?”
“남은 방법은 그뿐이었으므로…… 저희의 힘이 부족한 탓입니다. 저희만을 담보로 엘릭서를 구해 보려 했지만 어둠의 정령들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더군요. 대신 엘릭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습니다. 던전 마스터는 포인트라는 걸 이용하여 엘릭서를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있다고…….”
“무모하군.”
터무니없는 도박이다.
거기다가 엘릭서는 단순히 체력을 조금 회복시켜 주는 정도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겠지만 엘릭서 하나만 믿고 계약을 하였으니 무모하다 할 만했다.
내가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자 줄리엄은 이를 악물었다.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이대로 다크 엘프의 화신이 될 아이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크리슬리의 수명은 몇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일족의 염원을 건 마지막 도박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던전 마스터시여!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크리슬리를 거둬 주시옵소서. 다크 엘프는 의식을 함께한 이에게 헌신하는 종족이니 크리슬리는 던전 마스터의 행보에 크나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저희의 목숨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나 그 아이만은 부디, 부디!”
쿵!
줄리엄이 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찧었다.
‘의식이라…….’
요지는 유능한 아이니 의식으로 확실하게 거둬 달라는 것이다.
크리슬리와 나를 묶어 내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엘릭서로 개선이 안 되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작정이겠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줄리엄의 말마따나 다크 엘프는 의식을 함께한 반려를 위해선 웃으며 죽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종족이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크리슬리에게 그만한 내력이 존재하다니. 이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대어다.
‘기운의 불균형만 해소시켜 줄 수 있다면 진마룡과 다크 엘프 하이어의 특성을 동시에 발현할 수 있다는 건가. 흥미롭군.’
단순히 음의 마력을 태우고 혈맥을 뚫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하다.
‘음의 마력을 태우면 진마룡의 피가 날뛸 것이다. 반대로 진마룡이 가진 양의 마력을 태우면 정확히 균형을 맞춰 주지 않는 이상 크리슬리의 몸 안은 격전지가 되어 버릴 테지. 불가능한 일이다. 조화…… 그래, 조화가 필요하다. 이걸 태극이라 하였던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
음과 양을 분리하지 않고 섞어 버린다면 더는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었다.
이론뿐이지만 가능할 것도 같았다.
‘뇌신공을 잘만 활용하면 마력의 조화를 꾀함과 동시에 조화되며 흘러나오는 진마룡과 다크 엘프 하이어의 마력을 내 쪽으로 끌고 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듯한데. 이건 연구가 필요하겠군.’
내 몸 안에 자리 잡은 뇌신.
불현듯 든 생각이다.
이 뱀은 무 속성의 마력을 뇌 속성으로 바꿔 냈다.
다른 두 가지 속성의 마력을 집어삼키고 중화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리고 중화되며 빠져나가는 마력을 내가 먹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뇌신을 어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릴 듯했다.
물론 성공한다 하더라도 크리슬리가 품은 마력의 10% 내외에 불과하겠지만 상당한 도움이 될 건 분명하다.
‘시기상조. 시간이 필요하다.’
허나 아직 성취가 일천하여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내게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참고 듣길 잘했다.
나는 눈길을 돌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구나. 그 말이 사실일 경우 크리슬리가 회복되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 의식을 치르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그, 그럼?”
일말의 기대를 담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그 기대를 배신하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말한 건 지키는 주의다. 이미 너희의 죽음을 선언했으니 이를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다크 엘프들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한마디에 그들의 목숨 줄이 쥐어진 셈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이 시간부로 네 발로 걷고 험하게 짖는 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다크 엘프임을 잊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한 달의 시간만 지켜보겠다. 그 시간 동안 만약 개의 한계 이상을 보이는 자가 있거든 의식도 없을 것이며 너희의 생명 또한 스러지리라. 반대로 훌륭히 소화해 낸다면 의식을 행하고 염원대로 크리슬리를 고쳐 줄 것이다.”
한 달간은 다크 엘프로서의 습성을 죽이고 개처럼 행동하란 뜻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신분 상승이다.
적어도 주인에게 있어서 만큼은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게 개라는 짐승이니까.
어디에도 나만 한 아량을 가진 마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줄리엄이 나를 묘한 눈초리로 올려다봤다.
이에 나는 차갑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짖어라. 개는 말을 하지 못한다.”
* * *
2주일 후.
던전의 15층.
“왈! 왈!”
“헥헥헥…….”
놀랍게도 다크 엘프들은 개처럼 활동하는 데 완벽히 적응이 된 상태였다. 50명의 다크 엘프가 한 명도 빠짐없이 네발로 기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만하였다.
식사를 하거나 볼일을 보는 것조차도 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평생을 바란 염원과 생명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놀라운 결과였다.
크리슬리만이 그 자리에 없었기에 예외였다. 다만 그녀는 병색이 완연하여 쉬이 걸을 수도 없었으므로 크게 상관은 없었다.
반대로 크라스라는 그 자리에 있었기에 충실히 개처럼 굴어야 했다. 그리고 다크 엘프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개의 흉내를 내는 게 크라스라였다.
“밥 먹을 시간이에요~ 이히가 개밥을 가지고 왔어요.”
때마침 이히가 잡탕밥처럼 여러 가지 음식이 섞인 개밥을 내왔다.
이히는 그들을 감시하는 악덕한 요정이었다. 처음에야 줄리엄의 공손함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히에게 던전 마스터의 명령은 절대적. 그가 감시하라 일렀으니 이히는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다크 엘프를 지켜봤다.
“왈!”
줄리엄이 가장 먼저 솔선하여 다가왔다.
그는 모범을 보여야 할 존재다. 솔직히 그가 맨 처음에 나서서 개의 흉내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줄리엄이 밥그릇에 입을 대어 개밥을 먹고, 그다음 자리를 크라스라가 차지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까 이히도 기분이 좋아요. 다음번에는 특식으로 살아 있는 생닭을 잡아다가 줄게요. 목덜미를 물어뜯는 맛이 날 거예요.”
이제는 진짜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이히의 태도도 바뀌었다.
순간 다크 엘프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이히의 앞에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꼬리를 대신해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 * *
한 달이 지났다.
다크 엘프들은 충실히 내가 말한 바를 지켰다.
이 부분에 있어선 나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히의 감시가 소홀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직접 내린 명령은 충실히 해결하려 드는 게 이히였다.
조금이라도 흠이 잡히면 제대로 본때를 보여 주려 했다. 하지만 그 집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크 엘프로서는 몰라도 개로서의 가치는 증명하지 않았나. 집념을 보아 집 지키는 개로서는 제법 쓸모가 있을 듯하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나도 놀지만은 않았다.
뇌신공의 성취를 높여 어느새 7성에 달했다. 이 정도면 크리슬리의 내부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 엘릭서 한 병을 크리슬리에게 먹였다. 며칠 후 확실히 달라진 크리슬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때가 되었다 판단한 나는 달빛이 드는 장소에 그녀를 이끌고 들어왔다.
오늘은 만월.
음의 마력이 가장 충만할 때였다.
크리슬리는 긴장을 했는지 몸이 굳은 채였다.
혼혈이라 그런지 피부가 까맣진 않았다. 보기 좋은 황색의 피부와 대비되는 백발, 특이한 연보랏빛의 눈동자……. 병색 탓에 마르긴 했지만 이목구비 또한 훌륭했고, 몸의 볼륨도 나쁘진 않았다. 미(美)에 중점을 두는 이라면 반드시 혹할 만한 여자다.
나는 입었던 옷을 벗어 던졌다.
의식은 알몸으로 행해야 한다.
한 달 동안 피로 서로의 몸에 인을 새기고, 마지막 날 결합하면 의식이 종료된다.
단지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크리슬리의 몸 안에서 날뛰는 마력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키려면 필요한 행위이기도 하였다.
완전히 나신이 된 이후, 나는 크리슬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벗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