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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37화 (37/242)

던전 사냥꾼 37화

잔뜩 굳은 크리슬리의 눈에 결연함이 서렸다.

그녀 역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다.

엘릭서를 섭취하는 데 성공했고 체력이 조금 붙었지만 빙룡의 저주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빠르게 악화되어 생명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다른 다크 엘프들은 몰라도 당사자인 크리슬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크리슬리가 입을 열었다.

“던전 마스터시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크리슬리는 연보랏빛 눈을 들어 나를 마주 봤다.

“제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엘릭서를 마셨지만 다시금 상태가 나빠지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5, 6개월. 저의 육신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버릴 것이니…… 던전 마스터의 바람에 응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엘릭서는 근본적인 치료제가 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천형만큼은 천혜의 물약인 엘릭서로서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고작해야 수명을 몇 개월 늘려 주는 정도가 전부.

나는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해 올 줄 몰랐던 터라 물었다.

“내게 요청하지 않는 건가? 던전 마스터는 포인트만 있다면 엘릭서라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자 크리슬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릭서를 아무리 마셔도 제 몸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던전 마스터시여, 이 의식 역시 사실은 못마땅하지 않으셨는지요? 어렸을 적부터 저도 누군가와 함께할 반려의 의식을 꿈꿨으나 제 처지를 알기에 이미 포기한 상태입니다. 남은 이를 불행하게 할 뿐인 의식…… 줄리엄 장로님은 필시 제 태생에 관해 말했을 것이지만 저는 기대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 나머지 다크 엘프들이 모두 죽을 텐데도 말이냐? 그들은 너의 쓸모 있음을 담보로 살아 있는 것이다.”

크리슬리를 슬쩍 떠보는 말이었다.

그녀는 순응했는지 그저 처연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엘릭서라는 최후의 희망이 좌절로 끝나서일까?

죽음에 임하는 자세,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실제로 ‘벌레’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던 나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내 표정을 본 크리슬리가 이어서 말했다.

“던전 마스터시여, 저희도 마계에서 온 자들입니다. 그곳은 힘 있는 자가 정의인 곳. 뼛속 깊숙이 인지하고 있기에 던전 마스터께서 보여 주신 자비가 얼마나 큰지도 알고 있습니다. 줄리엄 장로님께서 고의적으로 저를 숨기셨으니 다른 마족이었다면 본보기로 장로님의 머리를 자른 채 저를 강제로 범했겠지요. 비록 개의 흉내를 내게 했다고는 하나 생명을 뺏진 않았고, 약속대로 엘릭서와 함께 의식도 행해 주신 바…… 하해와 같은 이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처치에 도리어 크리슬리는 감명을 받은 듯했다.

확실히 어지간한 마족이었다면 다크 엘프들의 목을 자르고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약자에겐 무척이나 잔인해질 수 있는 게 마족이란 종족이었다.

나는 다만 심안을 통해 잠재력을 볼 수 있어서 보통의 마족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잠재력이 높으면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었다.

당장은 부족할지 모르나 후에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이들.

그들에 한하여 나는 넓은 아량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눈앞의 크리슬리다.

만약 크리슬리와 크라스라의 존재가 없었다면 줄리엄은 죽었다. 개의 흉내를 내는 번잡한 일도 시키지 않았을 터였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찌 갚을 셈이지? 너의 생명은 고작해야 5, 6개월 아닌가?”

“말씀만 하신다면 불구덩이 안이라도 웃으며 들어가겠습니다. 차갑게 식어 가는 몸뚱이지만…… 각오 또한 되어 있습니다. 굳이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다크 엘프에게 있어서 반려의 의식이란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

그마저도 포기한다고 한다.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을 불태우리란 결연한 각오는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묘하게 죽음에 달관한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불구덩이 안이라도 웃으며 들어갈 수 있다고 했겠다.’

일단은 그 말을 들은 걸로 족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부터 교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자포자기로 임하는 건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쫘악!

크리슬리를 강제로 눕히고 입고 있던 실크 재질의 얇은 옷을 우악스럽게 찢었다.

동시에 탄력적인 가슴과 몸매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나는 그런 크리슬리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살리마. 그러니 너는 나만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 * *

오늘은 만월이다.

음의 마력이 가장 풍족한 날.

이에 반응하듯 크리슬리의 몸 안에 내재된 다크 엘프 하이어의 마력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마룡의 마력에 비하면 모자란 감이 있지만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췄다는 게 중요했다.

뇌신공의 성취는 어느새 7성에 달했다. 보유한 전력량도 6,400만 와트나 되었다. 진짜 번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피부의 접촉을 통해 전해진다면 번개보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크리슬리의 신체 곳곳에 손을 올린 채 뇌신공의 뇌기(雷氣)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맥이 막힌 부위를 파악하고 음의 마력을 조금 더 진동시켜 보려는 셈이었다.

‘일단 맥을 뚫을 필요가 있긴 하겠군.’

본래 뜨거운 마력은 피를 타고 전신에 흐른다. 반대로 차가운 마력은 한곳에 뭉치려는 습성이 있었다. 타고 흐르는 전신의 세맥도 조금씩 다르다.

크리슬리는 음의 마력이 아홉 곳에 너무 심하게 뭉쳐서 일이 커진 케이스였다.

맥을 뚫은 뒤 닫힌 통로를 다시 넓혀 줘야 할 것 같았다. 뭉쳐 있는 음의 마력은 뇌기로 살살 문질러 주면 고비는 넘길 듯했다.

‘뇌신, 너의 차례다.’

단전에 기거하는 번개의 뱀, 그 이름이 뇌신이었다.

뇌신은 귀찮은 듯 꿈틀대며 내 손을 타고 크리슬리의 몸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크리슬리도 찌릿한 감각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걸 느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참아라. 소리를 내어선 안 된다.”

“……!!”

꽝!

바로 그 순간, 6,400만의 전력을 품은 뇌신이 첫 번째 관문에 도착했다.

뇌신이 막혀 있는 맥에 도착하자 언제 얌전했냐는 듯 저돌적으로 머리를 박아 버린 것이다.

크리슬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튀어나오려는 신음 소릴 억제하고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왼손으로는 바닥을 긁고, 열 개의 발가락을 모두 구부러트렸다. 활의 시위처럼 몸을 구부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어렵군.’

내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도 맥을 뚫지 못했다.

오늘 반드시 첫 관문을 뚫어야 하는데, 나보다는 크리슬리의 몸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음의 마력이 충만해 다크 엘프 하이어의 마력이 눈을 뜬 이날!

진마룡의 마력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이날만이 절호의 기회였다.

적어도 관문 하나만 넘어설 수 있다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절대로 정신을 놓지 마라.”

누군가를 위해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행위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그저 참고 견디라고 말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크리슬리가 입술을 꽉 깨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뇌신 역시 뿔이 잔뜩 났는지 꼬리를 사납게 흔들어 댔다.

꽝!

다시 한 차례 거센 폭풍이 지나갔다.

방금 전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크리슬리의 몸이 꼬였다. 하지만 내 손은 크리슬리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의 몸에 기운을 흘리는 일. 나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만약 크리슬리의 몸에서 마력이 역류하면 나 역시 커다란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뇌신을 빼낸다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내 눈이 한층 진지해졌다.

한번 시작했으니 끝을 볼 수밖에 없었다.

* * *

크리슬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느껴지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고통에 그저 정신을 놓아 버리고만 싶었다.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몸 안을 뾰족한 바늘 수천 개가 들쑤시는 느낌.

그런데 그저 참으란다.

소리조차 내어선 안 된단다.

솔직히 크리슬리는 눈앞의 남자가 무엇을 벌이는지 알지 못했다.

살린다고 말했고, 그럼 어디 해 보라는 심정이었다.

그녀라고 희망을 가져 보지 않았겠는가.

자신을 살리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모두 좌절로 끝났다.

엘릭서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건만 그마저 좌초되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포기와 친숙했던 크리슬리였기에 ‘역시나’ 하는 심정이었다. 장로 줄리엄이나 오빠인 크라스라는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기대가 적으면 실망도 적다.

그리고 엘릭서로 개선된 상태가 다시금 악화되고 있다는 걸 둘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 둘이 보내올, 동정에 찬 시선이 너무나도 싫었다.

한데 이 남자는…… 적어도 동정의 눈빛을 보내진 않았다.

뭐랄까?

모든 걸 간파하고 있는 듯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몸을 취하려는 변명인가 하였다. 마족이면 마족답게 그냥 취하면 될 것을, 의식을 행하고 살리겠단 달콤한 말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불가능하겠지만…… 일족의 목숨을 살려 준 데다 엘릭서를 받은 것도 있어서, 그렇다면 남은 생명을 이 특이한 마족에게 사용하리라 내심 다짐한 상태였다.

‘살 수 있을까?’

그런데 불현듯 이와 같은 생각이 물꼬를 텄다.

고통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마족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꽝!

“……!!”

누가 그랬던가.

고통은 살아 있단 증거라고.

포기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일진대 고통과 함께 들이닥치는 또 다른 감각에 시선이 갔다.

무언가가 몸에 강렬한 통증을 가져다줄수록 여태껏 느껴 보지 못했던 몸의 활기가 직접적으로 맞닿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꽝!

착각이 아니었을까?

이번 충격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볼이 붉어지고 빠르게 피가 돈다. 살아생전 느껴 보지 못한 생명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전신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크리슬리는 확신했다.

자신의 몸에 금제를 가한 저주가, 조금이지만 풀렸다는 것을!

‘살 수 있을까요?’

무덤덤한 마족에게 속으로나마 질문을 던진다.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단 하나도 할 수 없었던, 허약하기 그지없는 몸뚱이.

그게 나을 수 있냐는 말.

그리고 그 희열, 그 희망을 마지막으로 크리슬리는 정신을 잃었다.

* * *

보름달이 떴다.

달빛이 흐르는 이 밀폐된 공간에서 어느덧 한 달을 보낸 것이다.

그동안 크리슬리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창백하고 핏기 없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으며 풍겨지는 분위기에서 전과 다른 위엄 같은 게 서려 있었다.

말랐던 몸에도 살이 붙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졌다.

표정 역시 생기가 넘쳤다. 죽음을 받아들이던 때와 동일 인물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진마룡의 마력과 다크 엘프 하이어의 마력이 조화를 이뤘기에 가능한 일.

나신의 크리슬리가 나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가 다가오더니 정성스럽게 내 가슴을 쓸었다. 그러곤 입을 벌려 혓바닥으로 가슴 중앙을 애무했다.

크리슬리의 혓바닥을 따라 내 가슴 중앙에 혈선이 새겨졌다. 혓바닥은 붓이었고, 혀를 깨물어 낸 피는 먹물이었다. 마치 도화선에 그림을 그리듯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엔 손가락을 찔러 나온 피로 새겼지만 오늘은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날.

의식의 방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전체엔 그런 혈선이 수없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 크리슬리의 피였고, 의식을 위해서였다.

나는 가만히 가슴 한중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받아들이며 심안을 열었다.

이름: 크리슬리

직업: 없음

칭호:

* 진마룡의 피를 잇는 자(Epic, 지능마력+6)

* 달의 가호를 받는 자(Ex U, 마력+8)

능력치 :

힘 23 지능 94(+6)

민첩 21 체력 27 마력 46(+14)

잠재력(211+20/478)

특이 사항: 진마룡 아오진과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의 피를 이어 그 성장의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스킬: 없음

[전후 비교]

힘 19 지 100 민 21 체 1 마 34 잠재력(176+3/478)

힘 23 지 100 민 21 체 27 마 60 잠재력(211+20/478)

체력과 마력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신체적 능력치는 아직도 작지만 과거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물론 나 또한 한차례 변화를 겪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변화가 아니라 뇌신공의 변화였지만…….

나는 씁쓸히 고개를 내저으며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랜달프 브뤼시엘

직업: 마계 백작(던전 마스터)

칭호:

* 불굴의 전사(Ex U, 모든 능력치+2)

* 최초로 요정의 축복은 받은 자(U, 마력+6)

능력치 :

힘 79(+9) 지능 64(+2)

민첩 74(+2) 체력 80(+2) 마력 82(+8)

잠재력(379+23/500)

전력량: 64MW

특이 사항: 나락 군주의 심장을 이식했습니다(온전한 힘을 개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방대한 마력을 집어삼킨 뇌신공의 변화가 진행 중입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스킬: 스킬 조합(R), 심안(Ex U), 뇌신공(???), 분노(Epic)

능력치가 오르거나 칭호가 생기진 않았다.

망할 뱀, 뇌신이 크리슬리의 몸에서 가져오던 진마룡과 다크 엘프 하이어의 마력을 풀어놓지 않고 자기가 꿀꺽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배꼽 아래 보금자리에 죽은 듯이 누워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뇌신공 스킬에 물음표가 세 개나 붙었다.

이런 적은 처음인지라 결과가 어찌 될는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받아라.”

생각을 접고 마법 주머니에서 사령술사의 책과 죽음 지팡이를 넘겼다.

내 가슴에 혈선을 마저 새긴 뒤, 얌전히 물건을 건네받은 크리슬리의 고개가 갸웃했다.

“던전 마스터시여, 이게 무엇이지요?”

“네가 계승할 직업과 스킬, 그리고 네가 사용할 지팡이다.”

단번에 의도를 파악한 크리슬리가 힘을 주어 말했다.

“……최선을 다해 익히겠습니다.”

“몸을 추스른 뒤 익히는 게 좋을 거다. 방법은 알고 있나?”

“예, 어둠의 정령과 계약하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굳이 설명해도 되지 않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편하다.

크리슬리는 어려서부터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인지 눈치가 매우 빨랐다.

이 장소에 있는 한 달간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의도를 파악하고 먼저 움직였다. 첫 관문을 돌파한 뒤로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살 수 있다는 희망!

천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희망이 크리슬리를 완전하게 바꾸어 놓았다.

더불어서 내 성향이나 성격 등도 모조리 파악한 듯싶었다. 첫날 이후로 크리슬리가 나를 거스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갈 때가 되었군.’

던전을 벗어나 길드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한 달이 넘도록 자리를 비웠으니 필시 말이 돌고 있을 터였다.

‘뇌신과 뇌신공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

뇌신 녀석이 마력을 도로 토해 낼 것 같지도 않았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되길 바랄 수밖에.

나는 가만히 크리슬리를 바라봤다.

크리슬리의 뺨에 홍조가 생겼다.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결합의 의식이 남아 있었다.

사령술사의 책과 죽음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내려놓은 크리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크리슬리의 팔목을 잡아 억척스럽게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곤 잡아먹듯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 * *

의식이 끝난 다음 날.

나는 던전을 나섰다.

내 옆에는 크라스라가 있었다.

“던전 마스터시여, 제가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강렬한 태양빛을 받으며 크라스라가 물었다.

마법 귀걸이의 도움으로 뾰족한 다크 엘프의 귀는 감춰져 있었다. 언뜻 보면 피부가 까만 남자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귀걸이엔 자동으로 언어가 번역되는 옵션도 있었다. 크라스라를 대동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여겼다.

“크리슬리에게 들었다. 네가 다크 엘프들을 가르치는 선생 역할을 했었다고.”

내 물음에 크라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기본 검술이나 제가 익히는 창술, 마수를 상대하는 법 등을 몇몇 다크 엘프에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네가 할 일이 그와 같다. 너는 내 휘하의 인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배움을 나눠 본 적이 없어서 내 가르치는 솜씨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유은혜와 앞으로 들어올 각성자들을 가르치려면 역시 능숙한 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크라스라가 낙점됐다.

더불어 공격대의 일원으로 사용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던전에 있어 봤자 당장 크라스라가 할 일이 없으므로 이렇게라도 밥값을 시키는 것이다.

크라스라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이해한 듯 손뼉을 쳤다.

“휘하 인간들이요? 아, 유희입니까?”

“비슷하다.”

지금 당장은 유희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인간들의 수준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크라스라가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던전 마스터의 유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크리슬리를 고친 이후 나를 바라보는 다크 엘프의 시선도 조금은 바뀌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크리슬리는 다크 엘프의 화신이다.

신앙!

신앙과 같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다크 엘프는 개처럼 굴렸던 것을 잊고 내 밑에서 순종하기로 결정 내렸다.

크라스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진실된 역할은 크리슬리의 호위.

크리슬리를 친동생보다 아꼈기에 그녀의 완치가 더욱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 달간 개의 모습을 충실히 유지하면 크리슬리를 고쳐 주겠다는 나의 말에 가장 열심히 개 흉내를 낸 것도 크라스라였다.

전사의 자존심을 내버려도 좋을 만큼 크리슬리가 중요하다는 방증이었다.

아니었다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런 선택을 내리진 않았을 터.

이제 자신의 입장을 완벽히 정리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나는 지나가듯 말했다.

“앞으로는 그냥 마스터라 부르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이윽고 둘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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