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38화
강남 역삼동에 위치한 길드 하우스.
5층짜리 빌딩 하나를 통째로 매입하여 길드 하우스로 이용하는 곳은 현재 천명회뿐이었다.
던전이 생기고 1년이 채 안 되어 강남에 빌딩 하나를 매입할 정도로 김용우의 수완이 좋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빡빡하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한데 오늘은 웬일인지 천명회의 길드 하우스 앞에 수백에 달하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359번 각성자님! 359번 각성자님, 들어오세요!”
노란색의 눈에 띄는 옷을 입은 도우미 몇 명이 건물 앞에서 사람들을 유도하는 중이었다.
줄의 가장 앞에선 남자가 번호표를 보이며 길드원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크라스라는 그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건물이 천명회입니까, 마스터?”
“그렇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을 내려오며 크라스라에게 간단하게 설명한 것 중 천명회에 관한 게 있었다. 앞으로 지낼 곳이니 필수적으로 알아 둬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는데, 나도 조금은 얼떨떨하였다.
길드 하우스에 이만한 사람이 줄지어 있는 것 자체를 처음 보았다.
‘전부 각성자인가?’
심안을 열어 줄을 선 이들을 살펴보니 모두가 각성자였다.
‘신입 모집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슬슬 길드의 인원을 확충할 때이긴 하였다.
안전지대를 선점하여 안정적으로 코어를 조달할 기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천명회는 무시 못할 입지를 본격적으로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대로 된 행보를 보이려면 당연히 인원도 늘어나야 했다.
“지구라는 곳은 상당히 재밌는 곳 같습니다. 높지 않은 건물이 하나도 없군요.”
크라스라는 감탄을 터트렸다.
산을 내려온 이후 계속해서 이 상태다.
마계와 지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마계에서 살아가던 크라스라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압도되진 않았다.
과학 기술 외에는 별 볼 일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강자존.
크라스라는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찾아왔다.
이 중 자신을 긴장하게 할 만한 전사가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닫고 유람이라도 온 듯이 느긋하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크라스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대한민국에 전례가 없었던 참극이 벌어진다.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다.
크라스라의 능력치 총합은 362에 달했고, 이 정도면 상급 마수 Lv3에 달하는 무력이었다. 현대 병기가 거의 통하지 않는 수준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나는 혀를 차곤 말했다.
“이곳이 유독 심할 뿐이다. 하여간…… 들어가도록 하자.”
강남만큼 건물이 높은 곳도 흔치 않다.
어차피 앞으로는 매일 보게 될 광경인데 하나하나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길드 하우스의 입구를 향해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천명회 데빌 헌터의 공대장인 내가 줄을 서서 들어가는 것도 웃기는 꼴이다.
“저건 뭐야?”
“새치기하지 마세요!”
“새끼야,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이 줄 안 보여?”
여기저기서 항의가 빗발쳤다.
걸걸하게 욕을 내뱉는 각성자도 없지 않았다.
“마스터, 이럴 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크라스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좋은 현상이다. 무턱대고 움직이려 들었다면 크게 타박했을 터였다.
신중하게 내 의견을 묻는 건 크라스라가 진정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했다는 뜻. 노예는 명령 없이 움직여선 안 되는 존재였다.
“무시해라.”
“알겠습니다.”
일일이 반응했다간 끝이 없다.
무엇보다 시간 낭비였다.
내가 막 입구에 발을 들이려는 찰나 노란 옷을 입은 이가 길을 막아섰다.
“길드 가입 희망자시면 줄을 서 주세요.”
“너는 누구냐?”
“천명회 길드 소속 김철순입니다. 줄을 서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김철순이라. 이런 이도 있었던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없는 사이에 들어온 신입인 듯싶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천명회 소속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대장이다.”
“천명회에 그런 이름을 가진 공격대는 없습니다만.”
“그럴 리가.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유은혜와 이지혜가 소속되어 있을 텐데?”
“그런 이름을 가진 길드원도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장난치러 오신 거라면 그만 꺼지시죠?”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내가 자주 자리를 비워도 이런 적은 없었다.
물론 한 달 넘게 없었던 건 처음이지만 공격대 자체가 없어졌다니?
반응을 보아 없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하물며 유은혜와 이지혜도 없다고 한다.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공격대는 없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길드원은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유은혜와 이지혜란 이름 또한 들어 본 적 없다는 태도다.
김철순이 밟힌 캔처럼 인상을 구겼다.
“그만 가시라니까요? 저 사람들은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저기 서 있는 줄 아세요? 아, 시팔. 아니면 외국인이라 한국말 잘못해요? 랜달프 뭐시기님?”
“마스터, 이것도 무시합니까?”
크라스라가 의중을 물었다.
마법 귀걸이는 쓸데없이 상세하게 번역을 해 줬는데, 김철순이 내뱉은 단어 중 하나가 매우 상스러운 욕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김용우는 안에 있나?”
“아니, 길드 마스터가 네 친구예요?”
“안에 있나?”
“안에 있으면 어쩌려고요? 진짜 미쳐 버리겠네.”
김철순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힘으로라도 쫓아낼 기색이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뭐야? 왜 안 움직여?”
나름 힘에는 자신 있는 전사인 듯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다. 능력치 총합 180을 간신히 넘기는 떨거지!
“김용우를 불러와라.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간다고 전해.”
“무슨 일이야?”
노란 옷을 입은 다른 신입 길드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김철순이 가만히 서 있자 의아함에 다가온 것이다.
내 어깨에서 손을 뗀 김철순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이 사람이 길드 마스터 이름을 옆집 친구 이름처럼 부르더라고. 데빌 헌터 공격대 공대장이라나? 우리 길드에 그런 공격대 없잖아?”
“데빌 헌터? 작명 센스가 끝판왕 수준인데?”
“둘 다 외국인이잖아. 한 명은 흑인, 한 명은 백인. 잘생겼네. 어디 모델들인가? 건물 잘못 찾아온 거 아냐?”
듣다 보니 내 말은 무시된 것 같았다.
조용히 들어가서 사정을 밝히려 했는데 이래선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군.”
나는 크라스라에게 눈빛을 던졌다.
크라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멘 창갑(槍匣)을 풀었다.
쇠로 된 기다란 창갑 안에서 붉은색의 창이 튀어나왔다.
“죽입니까?”
“살려라. 적당히 신체 한 곳을 부러트리는 정도라면 괜찮다.”
“알겠습니다.”
김철순을 비롯한 길드원들은 황당무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름대로 한가락 하여 길드원으로 선택된 게 자신들이다. 고작 한 명이 창을 들었다고 어찌할 레벨이 아니란 말이다.
김철순과 길드원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좋은 말 할 때 그냥 가시죠? 전투에 들어가면 곱게는 못 보내드립니다.”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공간에서 검을 뽑아낸 김철순이 비릿하게 웃었다. 신입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서 선물받은 레어 등급의 검이다.
공간 이동 마법이 걸려 있고, 무척이나 절삭력이 높아서 실력을 한 단계 끌어 올려 주는 보물이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검이로군.”
내가 한때 사용하고, 던전 곳곳에 뿌린 검이 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내 던전에서 가져온 검이라는 뜻인데.
그다지 자랑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건만 좋다고 사용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마스터. 5초면 충분할 듯합니다.”
크라스라가 창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아오! 말 더럽게 안 통하네! 후회하지 마……!”
말도 채 끝나기 전이었다.
후웅!
“케헥!”
창대 끝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김철순이 개구리 같은 자세로 나자빠졌다. 나머지 두 명의 길드원도 곧 비슷한 길을 걸었다.
세 명의 길드원이 바닥에 너저분히 쓰러져 있었다. 말이 5초이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 할 만한 광경!
수백 명의 길드 가입 희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마스터, 뼈가 너무 물러 터져서 기절만 시켰습니다. 부러트립니까?”
김철순의 오른쪽 팔 위에 다리를 얹으며 크라스라가 말했다.
워낙에 차이가 많이 나서, 창을 쥐고 힘 조절을 잘못했다간 뼈만 부러트리는 게 아니라 아예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었다.
그걸 염두에 둔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가자.”
길드 하우스에 들어서자 그제야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본 즉시 한결같은 반응이었는데,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 취급받고 있었군.’
그 반응을 본 뒤 머릿속으로 조금씩 정리가 됐다.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운 데다 연락할 방법도 없어, 길드 내에서 사망자 처리된 것 같았다.
나를 중심축으로 존재하던 데빌 헌터 공격대도 당연히 해산.
그러나 유은혜와 이지혜가 어디로 갔는지가 여전히 의문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5층을 눌렀다.
막 문이 닫히려는 찰나, 때마침 여러 길드원이 같이 탑승하였다.
“너, 너는?”
그중 가장자리에 선 남자가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이름이 김태환이던가? 오랜만이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1층을 공략할 때 함께한 12인 중 한 명이다. 길드 내에서도 제법 영향력이 있는 자였다.
게다가 던전 안에서 정규적인 지옥 훈련을 계획해 나름 인기를 끌었다.
그가 이내 벌린 입을 닫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같은 층을 가는지 김태환은 가만히 내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런 말을 누가 했지?”
“네가 던전에 들어가는 걸 본 길드원이 있다.”
“어리석군. 내 실력을 모르는 건가?”
“던전에 들어간 사람이 한 달이나 감감무소식이면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다.”
“그래서 데빌 헌터 공격대를 해산시켰고?”
김태환의 눈썹이 휘었다.
“보아하니 길드 마스터를 만나려고 하는 모양이다만, 이제 네가 길드에 서 있을 자리는 없다. 네가 없는 사이에 실력 있는 신입들도 많이 들어왔지. 나도 레어 등급 스킬을 얻었어. 오크 두 마리쯤은 나 역시 상대할 수 있다.”
내가 이들에게 보여 준 게 딱 그 정도였다.
오크 두 마리를 상대하는 것.
하지만 김태환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했다.
나는 이에 의아해하며 말했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험한 꼴 보기 전에 떠나라는 거다.”
띵동~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5층. 길드원들이 모이고 쉬는 장소가 눈앞에 들어왔다.
김태환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그 뒤를 함께 탄 이들이 따랐다.
“마스터, 다 쓸어버립니까?”
“됐다.”
크라스라가 묻고 내가 즉답했다.
뭐가 문제인지 알았으니 먼저 해결해야 할 게 있었다.
“길드 마스터를 만나야겠군.”
자세한 사정을 들은 뒤 이야기에 따라서 행방을 결정할 것이다.
간이 작은 김용우가 혼자서 내 공격대를 해산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방금 전 만난 김태환같이 다른 길드원이 성화를 부렸을 테다.
그들의 눈에 나와 내 공격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내가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김용우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리라.
그 정도 선이라면 나도 납득할 수 있었다.
반대로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벌을 줄 수밖에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