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44화
넓은 그라운드.
그 사이를 두고 선 16명의 대원.
하지만 서로의 포메이션에는 확실하게 차이가 있었다.
흑표범 공격대의 경우 네 명이 전진, 네 명이 뒤에서 보조하는 형국이었지만 데빌 헌터는 두 명이 전진 배치되고 나머지 여섯 명이 뒤에 서 있었다.
특히 데빌 헌터 공격대의 대원들은 모두 해골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보여 주는 위압감과 달리 나오는 이가 고작 둘이자 상대편과 관람객, 중계진 모두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일까요? 방패를 든 가더도 아닌 것 같은데요.
당연히 가장 앞에 선 이는 나와 크라스라였다.
그리고 우리 둘이 가장 앞에 섰다는 건…….
삐이익!
쿵!
상대에게 격차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나는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먼지가 피었고, 날아가듯 달려가 상대의 면전에 도착했다.
“어? 어…….”
콰직!
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도 빠른 진격. 상대방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주먹이 복부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채애앵!
전신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하던 실드가 깨졌다. 실드는 목걸이 형태로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는데, 사용이 다하자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고작 한 차례.
공방도 오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게 다다.
“우웨에엑!”
피 한 사발을 토해 내며 상대가 쓰러졌다.
하지만 이게 전부면 싱겁다. 주먹이 들어가는 찰나와 같은 시간, 나는 뇌신공의 전력이 상대의 몸에 잔류하도록 만들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잔류한 전력이 세포를 갉아먹고 혈관을 막아, 적어도 유니크 등급의 전격 스킬을 가진 자가 손보지 않으면 천천히 죽어 갈 것이었다.
당연히 인간 중에서 그런 이는 없으니 미래가 정해졌다 보면 된다.
흑표범 공격대는 내가 만든 공격대를 외부도 아닌 내부에서 비방한 이들로 구성돼 있었다. 단순히 주먹다짐으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확실하게 쳐 내지 않으면 결국 곪아 터지는 법.
어수룩하게 끝낼 생각이었거든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끄아악!”
크라스라가 창대를 휘둘러 상대의 몸에 꽂았다. 이후 빙글빙글 돌리더니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실드가 단번에 파괴되고 육체에도 상당한 대미지가 누적되었다.
양과 늑대?
아니.
양과 호랑이, 사자마저 뛰어넘어, 숫제 말벌과 일벌의 수준이다. 두 마리가 일벌 수만 마리를 학살하는 그 장면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두 명의 공격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한 명씩 쓰러져, 최종적으로 흑표범 공격대 전원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게…… 대체…….
관람석은 조용했다.
중계진조차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순식간에 지나간 장면들은 ‘규격 외’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많았다.
삐이이익!
대전이 종료되었다는 호루라기 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 * *
파죽지세!
예선전은 총 세 번을 연달아 싸워야 했고, 세 번 모두 나와 크라스라만으로 끝냈다. 우리를 상대했던 공격대의 대원들은 모두가 실려 나갔으니,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공격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날 예선이 끝났고, 대회와 관련된 영상은 인터넷으로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갔다.
여러 볼거리와 아이돌 그룹 모리의 출현 등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네티즌들이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건 당연히 데빌 헌터 공격대에 관한 사항이었다.
「데빌 헌터 공격대? 너무 강한 듯. 이건 뭐, 다른 공격대가 상대가 안 되네.」
「마치 공격대 계의 바르셀로나?」
「천명회 길드원들이 약한 거겠지. 아직 모름. 본선은 각 길드의 최강자들이 나올 테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함.」
「데빌 헌터 공격대 두 명이서 모든 게임을 끝냈다. 나머지 여섯이 나서면 더 볼 필요도 없다.」
크게 두 갈래로 나뉜 반응들.
하지만 은연중 인정하는 것은, ‘고작 둘이서 대전을 끝낼 정도로 아주 강력한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여론은 데빌 헌터 공격대를 상대해야 하는 이들에게도 강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오로지 데빌 헌터 공격대를 상대할 방법만 강구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조차 소용이 없다는 걸, 그들은 다음 날 깨닫게 되었다.
* * *
2일 차.
본선의 막이 올랐다.
해골 가면을 착용한 여덟 명의 데빌 헌터 공격대가 그라운드 위에 올랐다.
어제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태도들.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나. 결국 이 무대의 주인공은 두 명뿐이었다. 첫날 ‘너희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던 말을 스스로도 인정하게 만들 광경을 보았으니…….
―자, 예선에서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데빌 헌터 공격대가 출전했습니다. 이번 상대는 5대 길드 중 한 곳인 ‘미스릴’ 길드의 최강 공격대 ‘그리즐리’인데요. 어제와 같은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을지요?
중계진은 나름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내려다봤다.
어제의 예선은 천명회의 길드원들로만 치러졌다.
하지만 오늘 본선은 다르다. 다른 네 개의 길드에서 최강의 조합으로 공격대를 짰다. 실제로 이 경기가 있기 전, 전원이 원거리 딜러로 구성된 담비 길드에서 상대를 아주 묵사발 내는 장면을 보았기에 이번 경기는 어제와 다른 양상이 펼쳐지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삐이익!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불렸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즐리 공격대의 대원 여덟 명 전부가 나와 크라스라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의도를 순식간에 읽었다.
‘두 명이 파고들면 둘러쌀 생각이군.’
피식 웃으며 앞서 나간다.
풀로 만든 벽 따위가 내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가더! 방패 강화!”
“방패 강화!”
척. 척.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네 명의 가더들. 내가 공격할 방위를 모두 차단시키고 어디 한번 들어오려면 들어와 보라는 듯 도발을 날린다.
“힘의 숨결!”
축복을 내리는 사제마저 있었나?
수비에 극도로 치중된 구성이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의 강자를 상대할 때 이보다 좋은 구성은 없다. 방어를 뚫지 못하면 스스로 지쳐서 나자빠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규격 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분노를 꺼냈다. 86에 달하는 힘은 고작 가더들과 사제가 강화한다 하여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쾅!
방패의 표면을 내리치자 마치 폭발하듯 방패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진다.
―아, 아이템의 효과인가요? 대단합니다!
그중 누구도 순수한 힘에 의한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꺼낸 분노가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짐작할 뿐.
쾅! 쾅!
내려칠 때마다 방패가 비명을 내지르며 터져 나갔다. 이에 가더들이 한 발자국 물러나고, 근거리 딜러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크라스라가 찔러 오는 무자비한 창격에 바닥을 뒹굴었다.
미스릴 길드의 정예만 모았다는 최강의 공격대, 그리즐리.
하지만 예선과 다르지 않은 양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본선이 절반쯤 치러졌을 때.
이제는 누구도 데빌 헌터 공격대의 패배를 입에 담지 않았다.
도리어 데빌 헌터 공격대와 맞붙는 상대를 측은히 여길 정도였다.
맞붙으면 반드시 깨진다 하여 기권을 하는 팀도 나왔다.
오직 두 명만으로 이룩해 낸 성과였다.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한 나는 네 명을 거꾸러트린 후 나머지 네 명을 대원들이 처리하도록 남겼다. 이러면 이미 기세가 잔뜩 꺾인 상대 팀은 나와 크라스라의 눈치를 보면서 싸움에 임해야 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잔반 처리반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대원들은 불만을 토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내 덕임을 아는 탓이다.
시작부터 우승이 결정된 대회.
결국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S랭크!
대한민국 최강의 공격대임을 알리는 증표가 수여됐고…….
데빌 헌터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뇌리에 틀어박힌 순간이었다.
* * *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단칼에 끊어 버린 후, 나는 던전으로 돌아왔다.
국가 공인은 아니지만 어차피 각성자들 사이에서 데빌 헌터란 네 글자는 이제 명실상부한 S랭크 공격대였다. 최강, 오직 하나의 공격대에만 허락된 칭호!
굳이 더욱 소란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딱 이 정도가 내가 바라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계획을 앞당길 수 있겠군.’
본래 조금씩 공격대의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늘릴 계획이었다. 한데, 김용우가 꺼낸 랭킹전이란 묘수 덕분에 일의 진행이 훨씬 빨라질 것 같았다.
전생에선 랭킹전이란 게 없었다.
각성자들이 서로 맞붙는 대회가 있긴 했지만 급수를 매기고 나누는 데 이용되진 않았다.
국가와 각성자들이 협력하여 기준안을 만들고 그에 따라 급수가 결정되는 게 본래 있어야 할 미래. 허나 나란 존재의 개입으로 김용우는 랭킹전을 채택했고 그렇게 미래가 바뀌었다.
회귀하고 고작 1년이 조금 넘었을 시간.
각성자들의 뇌리에 선명한 이미지를 새기지 않았는가?
나는 여기까지 오는 데 3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안 그랬다면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지.’
2년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이다.
길드에 돌아가 즉시 마녀사냥으로 몰았던 이들을 박살 내지 않고, 임시 대원을 뽑아 그들을 훈련시킨 모두가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아니었다면 뭐 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는가.
‘슬슬 몬스터 웨이브를 준비할 시기다.’
몬스터 웨이브.
대거의 몬스터가 던전을 벗어나 국가를 침공하는 것!
나는 그 준비를 하려고 던전을 찾아왔다.
최강의 공격대란 칭호를 얻은 즉시 실행하려고 했던, 그러니까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2년 후에나 준비했을 일을 나는 고작 1년 만에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던전의 최상층에 도착한 나는 던전 코어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히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아야! 우씨! 누구야!”
잠이 깬 이히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바짝 굳었다. ‘어버버’ 소리와 함께 눈을 몇 차례나 비비더니 이내 울상을 지었다.
“팔자가 좋군.”
“바, 방금 잠든 거예요. 이히는 오매불망 마스터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나는 개의치 않으며 물었다.
“됐다. 그보다 포인트가 얼마나 남았지?”
“으음, 잠깐만요. 어디 보자, 엘릭서 구매 건으로 10만 포인트를 사용해서 이제 163,752포인트가 남았어요.”
“살짝 부족하군.”
경매에서 물건들을 구입하느라 사용한 포인트가 너무 많았다. 물론 후회하진 않지만 잔액이 텅텅 비는 데 결정적인 요인을 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마스터? 포인트를 사용할 일이 있나요?”
“오우거 몇 기와 트윈 헤드 오우거를 구입하려 한다.”
“어, 엄청나게 부족한데요…….”
이히는 계산을 해 보곤 헉 소릴 냈다.
둘 다 상급에 등재된 마수들로, 오우거는 40,000PT, 트윈 헤드 오우거는 250,000PT나 하는 것들이었다.
당장 가진 16만 포인트로는 오우거 네 마리가 한계였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잠시 턱을 쓸다가 말했다.
“드워프와 다크 엘프들을 소집해라. 그들이 해 줄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