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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51화 (51/242)

던전 사냥꾼 51화

* * *

아일랜드 터틀이 바다 위에 몸을 눕히자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펴지고 마음껏 물을 흡수하더니 금세 본래 몸집의 백 배에 다다르는 작은 섬이 되었다.

이윽고 마수들이 발걸음을 옮겨 하나둘 그 위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을 마친 뒤 연기처럼 사라져 동해 앞바다에 도달한 것이었다.

나는 크리슬리와 마찬가지로 반쪽 해골 가면을 착용한 상태였는데, 크리슬리가 왼쪽 얼굴을 가렸다면 나는 오른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가면을 절반으로 쪼갠 모습.

더불어 내 주변으로 검은색의 진한 연기가 아지랑이 마냥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쉐이드’라 불리는 안개형 마수를 덮어 둔 것에 불과했으나 인간들은 결코 나를 알아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은근히 보이는 해골 가면의 기괴함이 겹쳐져 묘한 공포감을 조성했다.

“제법이더군.”

크리슬리의 바로 옆에서 내가 가볍게 입을 열어 칭찬했다.

예상 이상으로 대본에 맞춰 연기를 잘해 주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던가.

누가 보더라도 진짜 던전 마스터임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크리슬리는 뺨을 살짝 붉혔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옵니다.”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그녀는 눈길 한 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답했다. 인간들의 과학이란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해 놓은 터라 최대한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래서 크리슬리는 편하다. 하나를 설명하면 열까지 파악하려 드는 열의를 보였고, 그럴 만한 두뇌가 있었다. 눈치도 빨라서 길게 말을 하지 않아도 먼저 솔선수범하여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파이록을 미리 조련시켜 놓거나 대충 뼈대만 갖춘 대본을 던져 주자 아무런 의문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완성시킨 이번 일이 그랬다.

“출발하라.”

마침내 모든 마수가 아일랜드 터틀의 등에 오른 후 말했다. 곧 아일랜드 터틀의 등껍질 곳곳에 난 구멍에서 압축된 강렬한 공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자신의 몸 주변에 강력한 에어 실드를 생성시켰다.

아일랜드 터틀이 대규모 이동 수단으로 이용되는 데는 바로 이 에어 실드의 역할이 컸다. 강력한 방어력도 갖춰서 어지간한 충격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내 아일랜드 터틀이 바다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 * *

한국에서 일어난 던전 웨이브는 온갖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연히 마수들이 던전을 벗어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도 세계의 수뇌들은 눈치를 챈 상태였다.

마수들이 이동하는 지점을 두고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무렵.

동해 앞바다에서 거대한 거북이가 잠수를 하는 것을 보고 다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거북이 마수의 몸집이 족히 수십 배 이상 불어나더니 마수들을 일거에 태우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급히 구축함과 잠수함을 내보내 수색을 시도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그리고 거대 거북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市]시’였다.

흙색 모레가 가득한 사가미만[相模灣]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건물은 없지만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가마쿠라시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겠군.’

마음 같아선 즉시 던전이 있는 도쿄로 진격하고 싶었으나 도쿄만은 물의 깊이가 매우 낮아 이동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가까운 이곳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내린 것이다.

아일랜드 터틀은 나와 마수들을 내려놓고 다시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근처에서 마력을 개방하면 알아서 떠오를 터였다.

크리슬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곳은 어디인가요?”

“일본이라는 인간들의 나라다.”

“……또 한바탕 파란이 벌어지겠군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크리슬리가 조금은 씁쓸한 듯이 웃었다.

“마, 마수다! 도망가!”

“에? 저게 마수? 어디 영화 촬영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주변의 인간들이 크게 놀라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인간들도 다수 있었지만…….

하여간 일본의 자위대가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 안에 우리를 막거든 철저하게 부술 뿐.”

사실 반나절도 길게 잡은 것이다. 이곳에서 도쿄까지 몇 시간이면 모든 마수가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도 그만한 일을 벌였는데 일본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나의 관할 아래 놓인 영토가 될 것이라고는 하나, 그렇기에 더욱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모두 짓밟아라.”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덟 기의 골렘이 너 나 할 것 없이 육중한 발을 움직였다.

무언가의 이벤트인 줄 알고 근처에서 핸드폰을 만지던 이들, 막 사태를 깨달아 도망치기 시작한 사람들, 인근의 수십 저택과 상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쓸려 나갔다.

애당초 저택은 아무리 높아도 6미터를 넘는 게 없었고, 골렘은 그보다 큰 8미터에 달했다. 가볍게 밟거나 부숴 버릴 수준의 건물들밖에 없으니 쓸려 나가는 것도 당연했다.

타앙! 타앙!

인근의 경찰이 제보를 받고 달려왔지만 그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잡한 권총 따위로 당해 낼 수 있는 마수는 고작해야 코볼트나 놀 정도가 전부였다.

최하급 마수 중에서도 최하급을 달리는 그들에게나 통할 것일진대, 중, 상급 마수에겐 그저 간지러울 따름이다.

주춤거리게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골렘의 의해 육포마냥 찌그러지는 경찰차만 수십 대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골렘을 앞세워, 그 뒤에서 느긋하게 파멸되어 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동했다.

다크 엘프와 파이록은 기동력을 이용해 방해가 되는 것을 쳐 냈고, 리치는 시간이 나는 족족 시체들을 좀비로 만들어 대열에 합류시켰다. 그렇게 불어난 좀비의 숫자만 벌써 300이 넘었다.

‘비싼 값을 하는군.’

확실히 비싼 마수는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법이었다.

괜히 28만 포인트나 들어가는 상급 마수 4Lv이 아니라는 듯 리치는 엄청난 전적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핀이 압도적인 파괴 행위를 보였지만 리치는 인간들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일이 상당히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핀이 지상으로 낮게 날더니 그 위에 선 크리슬리가 내게 말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인간들의 병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상당히 빠르다. 사가미만에 오르고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과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대처 속도에 살짝 감탄하곤 입을 열었다.

“멀리 마중하지 않겠다. 그리핀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명을 받드옵니다.”

짧게 고개 숙인 크리슬리가 그리핀을 가볍게 찼다.

그리핀이 날개를 활짝 펴 다시 하늘을 날았다.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불과 번개’ 스킬이 작열하며 일본 자위대를 녹여 버렸다.

* * *

일본의 던전은 도쿄 에도가와 공원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던전의 크기는 한국에 있는 내 던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구성은 비슷했다.

겉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던전의 크기는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층수는 35층으로 오히려 높았으며 구조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디어 도착했군.’

던전 앞에서,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방해물을 모조리 처리하느라 제법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한국이야 나의 본진이니 적당히 신경 써 줬다지만 이곳은 적지였다. 대공 우파의 휘하 마족 아돌이 관리하는 던전이 있는 곳이니 선전포고의 의미로 완전하게 뭉개 버렸다.

물론 아돌이야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겠으나…… 그저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적인 일이다. 곧 나의 관할 아래에 놓일 것이니 미리 왕의 무서움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아돌, 내가 돌아왔다.’

전생에서 본 광경과 지금 내가 보는 광경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던전을 잃은 패배자였다. 이에 악이 받쳐 일본의 던전을 내 것으로 만들겠단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당연히 무리였다. 잘린 팔을 들고 겨우 도망만 나왔다. 물약을 구할 길이 없어서 그때 잘린 팔을 다시 잇고자 부단한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리는 굴욕이다.

하지만…… 지금 내 시야로 보이는 던전은 무척이나 작고 왜소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지금의 아돌은 나를 막을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혼자였지만 현재 내 주변에는 강력한 마수가 많다.

그리핀, 리치, 다크 엘프, 파이록!

무엇보다 한층 더 강해진 내가 있었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천천히 던전에 입성했다.

아돌의 던전은 내 던전과 달리 점진적으로 마수의 레벨이 높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구잡이로 섞어 놓고 생태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게 오크 샤먼이었으니 말은 다 했다.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감히 던전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를 못할 것이었다.

이어서 놀 챔피언, 아크 고블린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고용을 한 것은 아닐 테고, 자연적으로 태어난 돌연변이들 같은데 그 숫자가 상당했다. 이런 돌연변이들이 내 던전에선 매우 적은 편이었다.

조금은 부러운 마음도 들었으나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는 무리를 보아하니 생존을 위해 약자가 죽고 강자가 살아남은 경우 같았다. 이러면 머지않아 생태의 균형이 완전하게 무너질 터였다. 각성자들도 성장할 기반을 잃게 된다.

악순환.

아돌의 무신경함이 초래한 결과다.

‘전생과 비슷하군.’

몇 층까지 마수들이 번식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성이 계속해서 반복될 게 뻔했다. 이미 한 차례 겪어 본 바가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내가 앞장서겠다.”

던전의 구성을 모조리 꿰고 있는 이는 나뿐이었다.

이곳 던전은 특히나 미로 같은 길이 많아서 지리를 아는 내가 마수들을 이끌어야 했다.

분노를 꺼낸 나는 무자비하게 검을 놀리며 던전을 빠르게 주파해 갔다.

* * *

던전의 최상층.

그곳에서 오크와 한창 교합 중이던 마족 아돌에게 던전 코어의 요정이 다가왔다.

“던전 마스터, 누군가가 침입했어요.”

잠시 행동을 멈춘 아돌의 표정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 내가 행위 중일 땐 말을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그렇지만 굉장한 마력이 느껴져요. 속성별 상급 골렘 여덟 마리에다가 그리핀도…….”

“미친놈! 그리핀은 최상급 마수다! 구할 방법조차 없거늘!”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는 거다.

던전 코어의 요정이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진짠데…… 다른 마족이 쳐들어왔다구요.”

“구요! 이 망할 새끼, 네가 그딴 말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요정 따위가 마족인 내게 장난질을 치려 했던 걸 한 번 용서해 줬더니 이게 진짜 돌아 버린 모양이구나.”

요정의 이름은 구요.

장난기 많은 요정답게 한 번 일을 저질렀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아돌은 방금 전 한 말과 다르게 그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체라 해도 요정을 괴롭힐 방법은 많았고, 구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오크 따위와 교접을 하는 마족답게 아돌은 무척이나 변태적이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도 이처럼 욕을 얻어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구요의 절박한 표정은 변하질 않았다.

한 번 거짓을 말했다곤 하나, 이번에는 진짜였다.

최상급 마수 그리핀과 상급의 마수들이 가파르게 던전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길을 알고 있다는 듯 헤매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

지금 즉시 방비해도 모자를 판국에 아돌은 코웃음만 쳤다.

그것을 믿어 주질 않고 타박만 하니 몹시 속이 상했다.

“진짜라구요…….”

취이이익!

아돌은 아예 신경을 접어 버리곤 다시 행위에 열중했다.

구요의 절박한 목소리는 그렇게 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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