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55화
힘이 94에 체력이 92.
90이 넘어서는 두 개의 신체 능력치.
확실히 내가 앞서는 건 마력뿐이었다.
‘이놈의 지능은 하루빨리 올릴 필요가 있겠군.’
다른 건 몰라도 기간테스에게마저 지능이 밀린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잔여 포인트를 지능에 투자하자니 아까운 감이 있었다.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분노를 꺼내 들었다.
“크리슬리, 나가 있어라.”
크리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우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질 것이라면 시작도 않는다.
신체적 능력치는 기간테스가 우위에 있지만 그뿐이다. 능력치의 총합 자체는 나나 기간테스나 비슷하였다. 스킬을 이용한 공격은 내가 강하다는 뜻이었고 말인즉, 서로의 기교와 순간적인 판단이 승부를 가르게 될 것이었다.
크리슬리가 기간테스를 흘끗 바라보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시길,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이윽고 크리슬리가 파이록과 그리핀을 이끌고 제단을 벗어났다.
나는 제단을 지키던 파이어 골렘 두 마리도 움직이게 하여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명했다. 얇은 벽을 밀듯이 부수며 골렘 두 마리가 빠져나가자 제단 근처에 남은 이라곤 나와 기간테스가 전부였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나, 이겨라! 그러면 따르겠다.”
장소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기간테스가 어눌한 발음을 놀려 의지를 전했다.
분노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 파라노말.”
유니크 등급의 반지 파라노말.
다섯 개의 축복 중 하나를 무작위로 받을 수 있는 아이템을 발동시켰다.
[파라노말의 축복! 강력한 매력이 부여되었습니다.]
혀를 찼다.
매력 부여라니.
하필이면 가장 쓸모없는 축복이 걸렸다.
쿵!
하는 수 없이 강하게 발을 굴린다. 지지직! 동시에 신체 전체에 전류가 퍼진다. 뇌신공을 운용하며 일순간 뻗어 나갔다.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심안을 통해 확인했다. 내가 우위에 선 능력치는 마력. 피와 땀내 나는 격렬한 사투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때를 가려야 하는 법이었다.
조금 더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최대치의 마력을 활용한 스킬뿐이다.
쿠르응!
기간테스는 뭉툭하고 커다란 육각형 모양의 몽둥이를 내리쳤다. 던전 자체가 울리는 마냥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였다.
힘 94. 능히 산 하나를 밀어 버릴 수 있는 괴력!
정면에서 맞으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내 체력은 82로 기간테스에 비하면 방어력이 한참 낮았다.
‘지금!’
하지만 동작이 크면 피하기 쉽다. 기간테스의 민첩은 다행히 높지 않은 수준이었고, 충분히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기간테스가 바닥에 꽂힌 몽둥이를 다시 들려는 찰나, 나는 분노를 지면에 찍어 넣었다.
촤르르!
분노를 타고 강력한 전류가 지면을 흘렀다. 곧 전류가 기간테스가 손에 쥔 몽둥이를 때렸다.
“흡!”
지능은 항마력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기간테스는 항마력이 높지 않았다. 뇌신공이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더라도 잠시 멈칫하게 만드는 위력은 있는 것이다.
기간테스가 일순 손에 쥔 몽둥이를 풀었다. 그 즉시 분노를 빼내 바닥을 강하게 박찼다. 높게 공중에 솟아올라 기간테스의 심장에 분노를 때려 박을 계획이었다. 아무리 체력이 높아도 머리나 심장을 잃으면 생명체인 이상 살 수 없으므로!
하지만 내 계획은 실행 단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릉! 던전의 바닥이 솟아나 기간테스의 정면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돌이라면 내가 뚫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카앙!
문제는 스킬로 인해 강화됐다는 점이었다.
대지의 품(Ex U) 스킬이었다.
방어에 특화된 그 스킬이 회심의 일격을 막아 버렸다.
분노는 벽을 뚫지 못했고, 이어 벽이 스러지며 기간테스가 몽둥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위험하다.’
몽둥이에 강한 마력이 응집되었다.
기간테스는 두 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방금 하나를 사용했으니 남은 것은 기간틱 슬래시(Epic)뿐이었다.
내게는 기간틱 슬래시를 맞받아칠 만한 스킬이 없었다.
급히 물러나 기간테스의 공격에 대비했다.
기간테스가 마력이 잔뜩 응축된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강렬한 파동.
몽둥이에서 뿜어진 압력에 주변 모든 사물이 빨려 들어간다.
폭만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상처가 크게 새겨진다. 이빨 자국과 같은 그것이 바닥과 벽에 길게 늘어졌다.
겨우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위력을 보곤 질려 버렸다.
과연 에픽 등급. 그리핀의 불과 번개에 비교해서 꿀리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력 면에서는 더욱 강한 것 같았다. 그리핀의 불과 번개는 대규모 공격이었고, 기간테스의 기간틱 슬래시는 일선(一線) 집중형 스킬이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스킬이 끝나자 제단의 절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탓이다.
‘수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아뿔사다.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고른 듯싶었다. 내가 장소를 옮기자 하여 기간테스가 옮겨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 제단을 수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들어갈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쨌거나 이번 공격으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할 만하군.’
분노 스킬을 꺼낼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나는 차분한 눈초리로 기간테스를 바라봤다.
대지의 품이란 스킬은 우월한 방어력을 선보였으나 시전자인 기간테스도 공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발동하는 데 약간이나마 시간이 걸리고, 범위도 넓다.
그리고 기간틱 슬래시는 일선에 대해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공격이지만 대비하면 충분히 피할 만하다는 게 중요한 점이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공략해야 한다.
행동거지가 결정된 즉시 다시 땅을 박차 높이 뛰어올랐다.
공중에 떠 있는 상대는 보다 맞추기 쉽다는 걸 기간테스 역시 알고 있었다. 강하게 몽둥이를 휘둘러 나를 노리려 하였고, 나는 몸을 틀어 분노를 내리쳤다.
치이익! 분노가 기간테스의 몽둥이를 긁으며 파열음을 내었다. 신체적 능력치는 밀릴지 모르나 무기에 대한 ‘기교’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우위다.
단번에 거리를 좁혀 그대로 기간테스의 목을 노렸다.
이처럼 근거리라면 대지의 품도 발동하지 못할 것이었다.
파삭!
전력을 담아 분명히 목을 찔렀으나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피부를 잘라 낸 것에 그쳤다.
나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급히 몸을 숙여 재차 기간테스의 몽둥이를 피했다.
‘내 힘이 낮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벽을 때리는 기분이었어. 대지의 품 스킬로 육체도 강화할 수 있는 건가?’
자세히 보니 잘라 낸 목의 피부에서 자잘한 흙 같은 게 떨어져 내렸다.
쯧!
설마 육체에 벽을 두를 줄이야.
“크, 크르으!”
하지만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피부는 단단할지 모르나 기간테스는 항마력이 낮다. 분노에는 내 전력 또한 담겨 있었기에 상처를 통해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 여기, 까지다!”
기간테스는 무척이나 화가 난 모습이었다.
전력을 먹은 전신에서 무럭무럭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상태 그대로 기간테스가 기간틱 슬래시를 준비했다.
빠르게 공수를 전환하여 나는 미리 충격에 대비했다.
한데…… 아까 보았던 기간틱 슬래시와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간을 본 거였군!’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 급히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 뇌신공을 발동시킨다. 이것으로 기간틱 슬래시를 상쇄하는 수밖에 없었다.
등급의 차이가 난다고는 하나, 스킬의 공격력을 좌우하는 마력은 내가 훨씬 높다. 모든 전력을 쏟아부으면 적절히 상대가 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게 오판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마치 번개를 머금은 폭풍이라도 치는 듯하다.
그것은 감히 재앙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마력의 진동이었다.
기간테스의 몽둥이를 타고 기간틱 슬래시가 발동되자 일전 본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진동이 모든 것을 깨부수며 다가왔다.
그 폭만 수십 미터에 달했으니…… 이를 악물고 전력을 마지막 한 톨까지 끌어모았다.
중첩에 중첩을 거듭해 마력의 파장을 밀도 있게 깔았다. 겹겹으로 뭉쳐진 전력의 방패가 내 앞을 막아섰고, 곧 기간틱 슬래시와 부딪혔다.
지직! 지지직!
내가 깔아 둔 전격은 정확히 일곱 겹.
7성의 뇌신공으로는 이게 한계였고, 기간틱 슬래시에 의해 순식간에 벗겨지는 중이었다.
두 겹, 네 겹, 여섯 겹.
마침내 마지막 일곱 번째 전격의 방패가 깨졌다.
그 와중 기간틱 슬래시의 공격력을 상당히 와해시킬 수 있었지만 나머지 타격을 나는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쿨럭!”
기간틱 슬래시가 가슴을 때렸다.
역류한 피를 입으로 토해 냈다.
‘재수가 없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표정을 굳혔다.
어깻죽지부터 배꼽 아래까지 손톱으로 긁어낸, 커다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하필이면 심장과 뇌신이 잠든 단(丹)을 동시에 긁어 버린 것이다.
쉴 새 없이 피가 흐른다.
이로써 시간을 끌면 더욱 불리한 판이 짜졌다.
분노를 써야 하나?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를 쓸 경우 지지 않으리란 묘한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 지는 나로서도 알지 못한다.
“커헉!”
한데…… 순간 몸이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이 느낌은 나락 군주의 심장을 막 얻었을 때와 유사하다. 전신의 피가 돌며 정신이 아득해진다.
자극된 심장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마력이 거세게 신체 전체를 좀먹기 시작했다. 표정이 더욱 굳고 말았다.
‘마력 역류!’
이를 악물었다.
마력 역류 현상.
마족이 죽을 때나 겪는다는 그것!
나는 이미 겪어 본 바가 있었다. 해서 그 느낌을 잘 안다.
확실하다. 기간틱 슬래시가 심장을 때린 탓에 그곳에서 마력이 넘치는 게 분명했다.
나락 군주의 심장에 담긴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아직 전부 각성하지 못했음에도 지능과 마력을 35나 올려 주는 기염을 토하지 않았나.
기간테스와의 싸움이 문제가 아니다.
급히 앉아 자세를 취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역류하는 마력을 바로잡아야 함이었다.
나는 흐르는 마력을 최대한 주워 담아 심장 안에 집어넣고, 마력이 흐르는 심장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여기서 포션이나 엘릭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억지로 봉합하면 이미 흘러나간 마력이 무슨 부작용을 일으킬지가 미지수였다.
오로지 자력으로 회복하는 방법뿐이 없는 것이 마력 역류 현상이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일은 또 한 번 일어났다.
기간틱 슬래시로 타격을 받은 건 심장과 배꼽 아래의 단이다.
자극을 받아서인지 배꼽 아래서 꿈틀대던 뇌신이 이윽고 깨어났다. 그러더니 그간 굶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듯 심장에서 빠져나온 마력을 한 움큼씩 집어삼키는 게 아닌가?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장 주변으론 얼씬도 하지 않던 게 뇌신이다. 마치 무서운 존재를 인지한 듯 도망가기에 바빴다.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도전적으로 심장 인근의 마력을 집어삼키며 조금씩 몸집을 불려 나갔다.
나는 마력을 주워 담던 행위를 멈췄다.
넘쳐 나는 것은 언제고 다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유익한 방향으로 줄일 수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렇게 뇌신이 마력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모든 정신을 뇌신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그때였다.
[나락 군주의 심장이 일부 각성하였습니다.]
[‘뇌신공(U)’이 변태를 거쳐 ‘전격의 정령(Epic)’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전격의 정령’은 일반적인 속성의 정령이 아닙니다. 진마룡과 다크 엘프 하이어, 나락 군주의 마력을 집어삼켜 한 차원 위의 존재로 거듭난, 특수한 정령입니다.]
* * *
나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