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60화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 어둠을 이용할 줄 아는 빠르고 은밀한 짐승! 특히나 산이 많은 지형에 능해 이곳 한국과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즉시 지형 변경을 시도했다. 마력 파장과 맞는데 주변 환경마저 비슷하다면 조금 더 번식률이 높아질 거란 기대감에서였다.
“이히, 18층 전체를 산간 지대로 설정하려면 몇 포인트가 들지?”
그 옆에서 가만히 손가락을 빨며 나를 지켜보던 이히가 고개를 갸웃했다.
“산의 개수나 높이 등에 따라서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굽이치는 산맥처럼 만들 경우엔?”
너른 산맥.
샤벨 타이거가 활동하기에 최적화된 장소다.
이히가 손가락 10개를 전부 펴더니 하나하나 접기 시작했다.
“마스터, 이히가 계산을 해 봤는데요. 25만 포인트 정도가 들어요.”
“설정하도록 하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요, 조금 아깝지 않을까요? 샤벨 타이거 숫자가 지금 너무 적잖아요.”
“숫자는 늘리면 된다.”
나는 만물상점에서 샤벨 타이거 100마리를 추가로 구입했다.
과감한 결단이었다.
제아무리 업적 퀘스트가 존재한다 해도 보상이 미지수인 지금 상황에서 50만 포인트가량을 쏟아붓는다는 건 누가 봐도 미련한 짓이었다. 여기에 지형 변화까지 꾀하면 거의 80만에 달하는 소비.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마족에게나 그렇다. 나는 그들보다 잔여 포인트가 많다. 다른 마족이라면 전 재산의 수준이겠지만 나는 이 정도의 소비를 ‘투자’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
굳이 보상이 사용한 포인트에 못 미친다 한들 업적 퀘스트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게다가 이런 유의 퀘스트라면…… 필시 따라오는 최초 업적 하나가 더 있을 터였다.
‘다른 마족이 업적 퀘스트를 진행해서 완료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것까지 계산하면 크게 손해는 안 난다.
이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마스터! 무슨 일 있으세요? 기분이 나쁘다고 포인트를 막 쓰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요. 이히가 확신해요. 마스터 몰래 숲 지형을 조금 만들다가 다음 날 엄청 후회했…… 헙!”
이히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다른 요정들은 장난기가 많아서 거짓말도 곧잘 한다는데 이히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거짓말이 무척 서툴러서 간혹 이처럼 진심이 마구 튀어나오곤 했다.
“지형을 변화시키도록.”
“아, 알겠어요. 이히히.”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는지 이히가 어색하게 웃었다.
“지형 변화 먼저 하구 이히가 꿀차를 맛나게 타 드릴게요.”
일본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는 타 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잊어버렸겠지.’
사소한 건 자주 잊는 종족이 요정이다.
그리고 애당초 양봉이란 건 주변에 숲이 있어야 가능했다.
15층의 숲 지형은 얼마 전 생겨났으니 이히가 만든 게 따로 있다는 뜻.
뭐…… 수정구로 확인도 끝낸 상태이긴 하였다.
포인트를 횡령한 죄는 무거우나 그다지 과소비는 아니었는지라 가만히 넘겨주었다. 꿀차도 맛있고. 적어도 이히 한해선 다른 이보다 낮은 잣대를 들이밀 수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히의 얼굴에선 ‘이히히’하는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 * *
과연 지형이 변화되자 번식률이 눈에 띄게 늘었다. 여기에 적절히 적이라 할 수 있는 마수를 투입해 주니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다.
남은 일수는 30일.
그간 뱃속에 최대한 많은 새끼를 배게 만들어야 했다.
던전 마스터의 마력을 개방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지만 부작용이 크다. 수정이 안 될 가능성이 높았고, 절제를 못해 상대 마수가 죽는 일이 허다하다. 웨어 울프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지금처럼 자연적으로 최대한 번식하게 유도하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던전의 내정에 힘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
품 안에 넣어 둔 드보롱의 돌멩이가 빛을 발했다.
‘드디어 연락이 왔군.’
나는 돌멩이를 꺼내 쥐었다. 이후 마력을 조금 흘려 넣자 상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드보롱입니다.
마계 옥션에서 경매를 담당했던 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다.”
―어휴! 다행입니다. 저를 잊으셨으면 어쩌려나 하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사실 정령계를 벗어나 이렇게 따로 연락을 드리는 건 금기시되어 있어서 지금에야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랜달프 님께선 저희 경매장의 최고 고객이시니까요, 하하.
“인사치레를 하려고 연락한 건가? 그렇다면 조금 실망이군.”
―아니, 설마요? 제가 ‘선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돌멩이 따위가 전부라면 저라도 섭섭할 겁니다. 저는 랜달프 님이 보다 확실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진짜 선물을 드릴 생각입니다만…… 혹시, 경매 물품의 목록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본론이다.
내가 바라던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건 조금 관심이 가는군.”
―하하! 그럼 이야기가 편해지겠습니다. 사실 선물이라고는 했지만 교환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고 랜달프 님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니 걱정은 마십시오.
“바람잡이 역할은 톡톡히 해 주지.”
―역시! 역시 랜달프 브뤼시엘 님! 다른 꽉 막힌 마족들과 달리 말이 통하십니다. 조속히 목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의 감시망을 피해서 종이 한 장 보내는 것도 사실 엄청 힘든 일입니다만, 랜달프 님은 저희의 VIP 고객이시니까요.
생색내기에 불과했지만 저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상 정령계에서 이쪽의 차원에 접근할 수단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뚫고 종이 한 장이나마 건네려면 나름의 도박이 필요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지.’
나만큼이나 마족들에게 가시가 되는 존재는 없다.
바람잡이 역할은 톡톡히 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둠의 정령들은 나를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포인트는 그들의 ‘격’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요소니까.
하물며 내가 몇 포인트를 잔여로 남겨 뒀는지 알게 된다면 그 태도는 더욱 극진하게 변하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알게 되면 내가 구매할 법한 것의 경매 시작가를 확 높여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후 던전 코어 옆의 공간이 일렁이며 종이 한 장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곳엔 글씨가 가득했는데, 모두 100가지 경매 물품의 이름이었다.
“확실한 것 같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의 구축!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비밀스러운 협약이 맺어진 순간이었다.
경매 물품의 내역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름만 보고 파악할 수 없는 물건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물건에 한정해서 나는 효율적으로 포인트를 분배할 수 있었다.
‘이번 경매에서 살 물건이 꽤 많군.’
경매 물품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며 턱을 쓸었다.
과연 2년 차는 1년 차보다 더욱 좋은 물건이 많았다.
하지만 최상급 마수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격의 마수를 잡으려면 어둠의 정령들도 상당한 출혈을 감당해야 했으니 이해는 되었다.
물론 확신할 순 없다. 내가 모르는 최상급의 마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크라스라와 같이 특별한 종이 경매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번 업적 퀘스트의 보상에 따라 구매할 수 있는 폭이 달라지겠지.’
나는 가만히 던전 수정구를 응시했다.
대부분 암컷 샤벨 타이거의 배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오늘로써 퀘스트 만료 기간인 30일째가 채워진다. 샤벨 타이거가 한 번에 최대 네다섯 마리의 새끼를 품는 고로 적어도 100마리 이상이 태어나리라 기대가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머지않아 허공에 여러 개의 메시지창이 띄워졌다.
[업적 퀘스트– 번식종이 완료되었습니다.]
[던전의 마력 파장과 샤벨 타이거의 일치율은 ‘99%’입니다.]
[총 166마리의 새끼를 번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급 3Lv의 마수임을 감안하여 보상을 계산 중입니다.]
[기본 보상 1,500,000pt와 추가 보상 1,717,768pt가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하나에 320만 포인트라…….’
기본 보상이 상당하다. 마족을 최초로 죽였을 때조차 200만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수치다. 거기다가 추가 보상은 기본 보상을 뛰어넘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여태껏 투자한 이상의 이득을 얻었다.
내 수중에 존재하는 포인트는 어느덧 570만에 육박했다.
처음 상정한 400만을 훌쩍 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는 업적! 최초로 ‘업적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업적 퀘스트는 관련 업적 점수가 일정 이상일 때 발생하는 ‘보너스’의 개념으로, 사용자의 플레이에 따라 상상 이상의 보상을 취득할 수도 있습니다.]
[800,000pt가 지급됩니다.]
650만!
“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 * *
마계 옥션이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15일.
그 시간마저 아깝다. 놀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크라스라와 함께 오랜만에 던전을 빠져나와 천명회로 향했다.
길드 하우스의 2층에 다다르자 데빌 헌터 공격대의 모든 대원이 커다란 벽걸이 TV를 응시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 세상이 망하려는가 보다.”
“몬스터 웨이브가 30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어휴!”
유은혜가 눈망울을 적시며 이지혜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도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곳곳에서 도움 요청이 쇄도하고 있대요. 아까 길마가 저한테 한숨 쉬면서 말하더라고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이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우리가 아니라 공대장님일 거야. 우리가 가서 큰 도움이나 되겠니?”
“그래도…… 벌써 죽은 사람이 다섯 자리를 넘긴다니까.”
“너 얼마 전에 던전 공략하다 죽을 뻔한 거 잊었어? 얘는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거야?”
“그럼 지켜보고만 있어요?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둘 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표정으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쿵!
지켜보던 크라스라가 창을 바닥에 내리쳤다. 동시에 대원들의 시선이 돌아갔고, 나를 발견하자 눈을 크게 떴다.
“공대장님!”
그들의 얼굴엔 저마다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2차 몬스터 웨이브 이후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인 탓이다.
“대체 어디를 갔다가 오신 거예요?”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아랑곳 않고 말했다.
“우리 데빌 헌터 공격대는 지금 이 시간부터 각국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데 주력한다. 오늘 저녁 바로 이동할 것이니 모두 빠지지 말고 참석도록.”
“역시 공대장님! 내가 이래서 공대장님을 좋아한다니깐~”
유은혜가 윙크를 날리곤 헤실헤실 웃었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내가 정의의 사도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내 진정한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다.
‘포인트 벌이의 목적이 강한 몬스터 웨이브다.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막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막는다.
그것이 1차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왕지사 움직이는 김에 데빌 헌터 공격대를 동원해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작정이었다.
마족이 인류 최강의 용사이자 희망이 된다면 그것도 퍽 재밌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