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65화
경매를 시작하기 전 물품을 미리 볼 수 있는 장소.
그곳이 창구였다.
그리고 1년 차 때와는 다르게 수많은 마족이 창구에 모여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구매할 물품을 확인하고 전략을 짜기 위해서다. 한정된 포인트로 최대한의 효율을 얻으려거든 남들보다 빠르게 준비해야 함이었다.
물론 다른 파벌을 견제하는 전초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넓은 창구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와 중압감. 누군가 한 명이 입을 여는 순간 터져 버릴 것 같은 무거운 공기.
대동한 마수로 말미암아 상대의 역량을 확인한다. 상대가 노리는 물품이 무엇인지 알아낸 다음 포인트를 소진시킬 계획을 세운다. 내가 했던 ‘바람잡이’ 역할의 중요성을 마족들도 슬슬 깨우치는 단계였다.
쿵!
기간테스의 묵직한 발소리가 창구 안을 울렸다. 최상급의 격에 다다른 짙은 마력의 향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몇몇 마족이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내게로 향했다.
‘열렬한 환영식이군.’
파벌마다 나를 바라보는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대공 아리엘과 그 휘하 마족들은 크게 적대적이진 않았다. 그냥 흥미롭다는 정도?
반대로 대공 우파와 그 휘하 마족들은 나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쯤으로 여겼다. 눈빛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벌써 죽지 않았을까 싶을 수준의 살벌함이 담겨 있었다.
대공 오쿨루스는 관심이 없다. 전생에서 유일하게 세계수를 띄운 마족. 진정으로 자신이 몰두할 분야의 무언가가 아니라면 아예 신경을 꺼 버리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판데모니엄은…… 냉소적이다. 애당초 그는 비관하길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휘하 마족들 역시 그 성격을 이어받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키히히, 저는 바깥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들어갔다간 버티질 못하겠군요.”
어둠의 정령이 읍을 하곤 물러섰다.
정령은 마력에 민감하다. 소리 없는 격전지에 섰다간 한시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
‘우파…….’
나는 어둠의 정령이 창구를 벗어난 직후 짧게 혀를 찼다.
대공 우파가 자신의 휘하 마족들과 함께 창구 안에 있었다.
파간 그리울리를 재물 삼아 다시 마계 옥션에 입장하는 걸 허락받은 것이었다.
정말 아쉽게 됐다.
우파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 또한 나를 쳐다봤다. 두 눈에는 강렬한 분노가 담겨 있었고…… 정령계가 아니었다면 싸움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간을 보는 기색이다. ‘너냐?’라고 묻는 듯한 눈초리.
나는 곧 저 눈빛의 저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돌 루프가 사라진 게 내심 걸리는 거겠지.’
다름이 아니라 범인이 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휘하 마족의 관리에 소홀한 우파라고는 하나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공작 파간을 제외하면 모두가 강제 전송되었어야 옳았다. 허나 아돌 루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돌 루프가 죽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의 파벌을 공격했다…… 그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내가 범인이라고는 확정할 수 없다. 우파는 이곳에 모인 모든 마족을 의심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파벌의 모든 마족은 저 눈빛을 한 번씩 받았을 것이었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제한다.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조차 절제시켰다. 저 의심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다. 파벌 간의 불협화음이 시작되고, 대공세의 시기가 앞당겨진다면 도리어 나에겐 큰 이득이 된다.
‘이런 걸 두고 어부지리라 하던가?’
하여튼 내가 창구에 찾아온 건 물품을 확인하기 전에 다른 마족들의 상태창을 보기 위해서였다. 즉시 심안을 열었다.
이름: 우파 블레넌
직업: 마계 대공(던전 마스터)
칭호 :
* 파괴자(Epic, 지능+4 마력+7)
* 중력의 주인(Ex U, 마력+7)
능력치 :
힘 82 지능 79(+4)
민첩 75 체력 74 마력 81(+14)
잠재력(391+18/500)
특이 사항: 네 명의 대공 중 한 명. 움직이는 거대한 성 블레넌의 주인이다.
스킬: 블랙홀(Epic), 중력장(Epic), 관찰(R)
[상대 비교]
우파 블레넌
힘 82 지 83 민 75 체 74 마 95 잠재력(391+18/500)
랜달프 브뤼시엘
힘 89 지 74 민 77 체 82 마 93 잠재력(392+23/500)
절로 주먹이 쥐어지며 힘이 들어갔다. 능력치도, 스킬도 크게 밀릴 게 없었다. 오히려 소폭이나마 내가 앞서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그것을 본 대공 우파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걸은 길은 틀리지 않았다.’
다른 대공들도 확인해 보았다. 우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창이 떠올랐다. 400~415 사이로 수렴하는 능력치총합과 두 개가량의 에픽 등급 스킬을 보유했다.
싸운다면 백중지세. 어쩌면 소폭 내가 앞설 수도 있겠다. 거기다가 나에게는 네 명의 대공이 가지지 못한 최상급 격의 마수가 둘이나 있었다.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휘감는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확실히 대공들조차 앞서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번 마계 옥션에서 그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는 창구의 중심으로 들어가 아주 ‘느긋하게’ 물품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 * *
경매가 진행되는 홀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네 개의 사이드 홀과 1층에 마련된 넓은 관람석.
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1층의 관람석을 차지한 이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네 파벌의 마족들은 사이드 홀에 올라가 서로를 견제하는 중이었다.
딱히 나를 의식하는 태도는 없었다.
‘저들이 내 포인트 보유량을 알 리 없으니.’
대략 700만. 이는 한 개의 파벌이 가지는 평균적인 포인트 총합보다 높거나 비슷하다. 즉, 적어도 포인트의 보유량에 한해서 나는 일인 군단과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다른 마족들, 심지어 경매를 주최하는 어둠의 정령들조차 내가 가진 포인트가 몇인지 알지 못한다. 알았다면 모든 이의 태도가 단번에 달라졌을 것이지만 그것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밝혀 봤자 이득 볼 게 없다.
어차피 진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었다.
머지않아 무대 뒤에서 피에로 분장을 한 드보롱이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경매를 맡은 드보롱이라고 합니다. 어여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드보롱의 얼굴은 작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최상급의 정령이며 나와 은밀하게 거래를 튼 자. 그가 보내 준 목록으로 나는 제법 깔끔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쭉 경매장을 훑어보곤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데 두 분의 자리가 비었군요. 한 분은 규율을 어긴 죄로 3년간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만, 나머지 한 분은…… 몇 번이나 강제 전송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싶습니다.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약간의 조롱이 담긴 말.
잠시 묵념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어 환하게 웃었다.
대공 우파의 표정이 더욱 언짢아졌지만 드보롱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라면 우파와 그 휘하 마족들은 옥션에 3년간 참가하지 못했을 터였다. 파간 그리울리에게만 죄를 덮어씌운 건 정령들도 한 발자국 물러서 양보해 준 일. 물론 그 덕분에 대공 우파를 바라보는 정령들의 시선이 썩 좋지 않게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자! 올해에는 작년보다 더욱 화끈해진 구성으로 준비를 해 봤습니다. 1년간 발에 땀띠가 나게 뛰어다닌 정령들의 수고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손님분들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기엔 24시간이 부족하니 애석할 따름이군요. 무엇보다 이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 자명한지라 굳이 열거하진 않겠습니다.”
어깨를 으쓱한 드보롱이 이어서 말했다.
“100개의 경매 물품, 그중 첫 번째로 선보일 물건은 저희도 엄선하고 엄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에는 진마룡 아오진의 피가 섞인 크라스라를 선보였지요. 아아,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매자 랜달프 브뤼시엘 님, 크라스라의 구입 건에 대해선 만족하셨습니까?”
드보롱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크리슬리가 진짜였지만 크라스라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잠재력을 모두 채우면 능히 최상급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는 강자.
“훌륭하더군.”
만족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드보롱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최고의 칭찬 감사합니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이 대동하신 최상급의 마수보단 못할 듯싶지만 크라스라도 충분히 좋은 마수지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를 띄운다.
나는 바람잡이.
무언가가 ‘있어’ 보여야 확실하게 먹히는 법이었다.
몇몇 마족이 움찔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은 파급력과는 비교가 안 된다.
궁금증을 가진 마족도 있었다.
팔지 않는 마수를 어떤 방법으로 구했는지 고민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역시 드보롱.
사기꾼의 기질이 다분하다. 뛰어난 장사치라고 평할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사기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슬슬 이번 경매의 첫 번째 물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저희 정령들이 고대의 유적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만…… 아마도 많은 분이 생소해하실 그것, ‘아스트랄 코드’입니다!”
네모난 검은색의 바가 담긴 상자를 다른 정령이 가져왔다.
까맣긴 까만데, 저렇게까지 까만 물질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완전한 흑색이었다. 길이는 20센티 남짓. 그 외엔 그냥 평범한 봉처럼 생겼다.
많은 마족이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두가 관찰(R) 스킬을 익힌 듯했지만 내 심안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관찰 스킬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이템의 이름과 옵션뿐. 상세한 설명, 감춰진 옵션, 봉인된 무구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스트랄 코드. 강화 아이템이었던가?’
몇 번 본 것 같기는 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구매해 본 경험이 없는 탓이다. 나는 심안을 열어 아이템을 확인했다.
이름- 아스트랄 코드(U)
설명: 아이템에 한 가지 옵션을 부여한다.
* 능력치를 +1, 2, 아이템의 고유 특성 강화 중 무작위로 선택된다.
* 실패 확률은 사용자의 마력에 반비례한다.
설명을 보니 그제야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밑에 *로 표시된 부분의 내용은 생소했다. 바로 심안으로만 보이는 옵션이었다. 단순한 관찰 스킬로는 저 부분을 확인하지 못한다.
‘이건 사야겠군.’
드보롱이 보내 준 목록만 보고 상세한 옵션까지 떠올릴 순 없다. 직접 확인하자 구매할 욕구가 무럭무럭 들었다. 예상외의 지출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었다.
저 ‘고유 특성 강화’는 무척이나 쓸모가 있었다. 예컨대 날카로운 검을 더욱 날카롭게 해 주는 특성이었다. 문제는 무작위라서 걸릴 확률이 낮다는 것.
그래도 능력치를 올려 준다는 점에서 구매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이쯤이면 됐다고 판단한 드보롱이 크게 외쳤다.
“경매 시작가는 10만 포인트! 하나밖에 없는 무기를 강화시킬 수 있는, 후회하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최상의 아이템입니다! 그리고 작년에도 말했지만 가진 것 이상의 포인트를 부르면 천장의 소년과 소녀상이 비웃음을 잔뜩 흘릴 것이니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작년보다 시작가가 높아졌다.
하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마족들이 보유한 포인트가 늘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10만.”
“오호…… 대공 아리엘 님! 뛰어난 안목이십니다. 역시 이 아이템의 값어치를 알아보시는군요. 10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12만.”
“대공 오쿨루스 님! 신중한 선택에 감사드립니다.”
“15만.”
“대공 우파 님! 왜 안 나오시나 했습니다! 이번 첫 번째 경매에도 모든 대공님들이 참여하실지 그 귀추가 무척 기대됩니다.”
“20만.”
“아아, 판데모니엄 님마저! 이로써 모든 대공님들이 참여하셨습니다.”
아이템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만약 에픽 등급 이상의 무구에서 특성 강화가 선택된다면 이는 백만 포인트를 들여도 아깝지 않았다.
대공들의 열전에 다른 마족들은 언감생심 손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30만.”
나는 홀로선 자.
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