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68화 (68/242)

던전 사냥꾼 68화

찰나와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그로기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복잡 미묘. 하지만 확실하게 ‘분노’가 담긴 눈빛.

자신이 낚였음을 재차 깨달은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굴던 다르한의 검이 결국은 미끼였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낚시꾼이었고, 그로기는 물고기였다. 혓바닥이 꿰뚫린지도 모른 채 으스댈 정도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물고기!

으드득!

그로기가 몸을 떨어 댔다. 이빨 가는 소리가 적나라 했다.

연이은 굴욕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계 옥션이었다. 자신의 실책이 파벌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그저 부르르 몸을 떨어 대는 게 그로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50만! 50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백작 랜달프 님이 입찰하셨습니다!”

잠시간의 정적을 깨며 드보롱이 외쳤다.

방금 전 드보롱이 놀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거침없이 50만을 부르면서도 여유로운 나의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할 말을 잃었다. 175만이 끝이 아니리라는 강렬한 확신. 그렇다면 과연 그 끝이 어디일지 상상하자 한순간 눈앞에 먹먹해졌다.

이는 드보롱이 정령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조금 더 넓게 바라보는 게 가능했기에 내가 엄청난 포인트를 보유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마족은 그렇지가 않다.

마족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편집적인 성향이 유독 강했다. 내가 포인트를 높게 부를 때마다 ‘저게 끝이다.’란 안이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들이 보유한 포인트가 적으니 나 역시 그러리라 정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이한 편견은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내가 직접 붙잡고 흔들며 얄팍하기 그지없는 보호막에 금을 내는 중이었다.

드보롱이 박수를 쳤다.

“대단합니다! 대지룡의 사체까지! 이로써 벌써 네 개의 물품이 백작 랜달프 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30초가량의 시간이 지났지만 상위 입찰을 시도하는 마족이 없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한 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포인트 대결로 가면 내가 승리하는 건 당연한 수순.

저들이 나를 이길 방도는 없었다.

잠시 후 드보롱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자, 아직 남은 물품은 많습니다! 다음 물품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말을 하는 도중 드보롱의 표정이 급변했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얼굴이 굳는다.

경매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진중하기 짝이 없는 태도.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었다.

‘마력의 간섭이 느껴지는군.’

미약하게 느껴지는 제3자의 마력을 통해 나는 드보롱에게 누군가가 간섭을 해 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와 이히가 연결된 것처럼 드보롱과 연결된 누군가가 통신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드보롱은 최상급의 정령이다. 어지간한 일은 턱 끝으로 해결하는 게 가능했다. 그와 연결된 이라 봤자 무척이나 한정적이다. 그가 직접 저런 표정을 지으며 보고를 할 이라면 특히 없었다.

‘정령왕이군.’

어둠의 정령왕.

그래, 있다면 정령왕밖에 없었다.

그의 통신이라면 드보롱이 긴장할 만했다.

수십 초의 시간이 흐르고 미약하게 침음을 흘린 드보롱이 얼굴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근처의 일꾼들에게 말하십시오.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드보롱이 무대의 뒤로 사라졌다.

이후 급이 낮은 어둠의 정령들이 나타나 마족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정령왕의 호출이라…….’

내게 다가온 정령이 사근사근 웃으며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지만 내 신경은 오로지 드보롱에게 쏠려 있었다.

전생을 통틀어서 정령왕이 경매에 간섭한 경우는 매우 적었다. 아주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만 드보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곤 했다.

무슨 일일까?

나는 한동안 고민하며 드보롱이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약 30분 후 드보롱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매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오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18번째 경매 물품 ‘대지룡의 사체’를 가져가신 백작 랜달프 님께 다시금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어 드보롱이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한 차례 축하 인사를 전했음에도 굳이 반복한다? 게다가 저 미소는 여태껏 보인 드보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드보롱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 그였다.

그저 웃음이 나왔다는 이유로 넘기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자, 여기서 끝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아이템이 많습니다. 또한 지금 무대 위로 올라올 19번째 물품 역시 매우 만족하시리라 장담합니다. 모든 손님분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그 아이템, ‘달의 눈물’입니다!”

일꾼 정령 한 명이 아름답게 꾸며진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드보롱이 상자를 건네받고 그것을 열자 그 안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다르다.’

드보롱이 사전에 전한 경매 목록.

그중 ‘달의 눈물’은 없었다. 몇 번이나 보고 외웠기에 확실하다.

나오지 말았어야 할 물건이 나왔다.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일.

정령왕의 호출을 받은 뒤 목록이 갱신됐음이 분명했다.

왜?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딱히 물건을 바꾼 대도 정령들은 크게 득을 볼 게 없었다.

어차피 마족이 가진 포인트는 한정적이었다. 목록에 있는 물품만 배치한 대도 충분히 소진시킬 수 있을 수준이었다.

거기서 나는 조금 전 드보롱의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혹…… 어둠의 정령왕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인가?’

확정할 순 없었다.

일단은 경매가 진행되는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달의 눈물로 설명해 드릴 것 같으면 엄청난 마력의 집약체입니다. 달의 마력을 억겁의 세월 동안 모으고 정제시킨, 사용키에 따라서 여러분의 능력치를 대폭 올려 줄 절호의 아이템! 이 영롱한 빛을 보십시오. 보고만 있어도 황홀하지 않습니까?”

드보롱이 신이 난 것처럼 주절주절 이야기를 떠벌렸다.

그의 말마따나 물방울은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꼭 달에서 뿜어지는 빛과 같았다.

나는 마음을 추스른 후 심안을 열었다.

이름- 달의 눈물

설명: 달의 마력이 자연적으로 집약된 마력의 결정체. 섭취할 경우 순수 마력이 80 이하일 시 3의 마력을, 85 이하일 시 2의 마력을, 90 이하일 시 1의 마력을 올려 준다.

* 매우 낮은 확률로 ‘달의 저주’에 걸린다.

숨겨진 옵션이 있었다. 하지만 매우 낮은 확률이라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과연 저 물품을 내가 구매하느냐, 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능력치를 올려 주는 아이템은 귀하다. 내 순수 마력은 정확히 85. 섭취한다면 무려 2의 마력을 올릴 수 있었다.

구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드보롱과 정령왕의 의도가 걸린다.

‘일단…….’

나는 드보롱을 바라봤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달의 눈물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단순히 의도가 걸린다고 주는 걸 마다할 순 없는 노릇.

‘장단에 놀아 주마.’

그러니 구매한다. 의도는 천천히 경매를 진행하며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시작가는 25만 포인트입니다. 마력이 낮은 손님이라면 서두르십시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신 구할 수 없습니다!”

“25만.”

“……백작 랜달프 님!”

마족들이 멈칫한다.

그러곤 살짝 질렸다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본다.

허나 나는 개의치 않고 가만히 드보롱만 주시했다.

“27만.”

“오랜만이군요. 후작 델라트 님! 27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 입찰을 서두르십시오!”

“28만.”

“이런,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스구프 님!”

“30만.”

“대단한 저력입니다. 백작 랜달프 님께서 30만 포인트로 앞서 나갑니다.”

입찰을 하려는 마족이 뜸해졌다.

30만 포인트 이상을 보유한 마족은 상위의 계급인 경우가 많았고, 그를 증명하듯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마력이 2나 오르는 건 구미가 당기지만 아직 나올 아이템이 많았다. 마력 2쯤은 가볍게 상회할 효율을 지닌 무구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르한의 검만 보더라도 피를 흡수한 양에 따라 최대 5의 힘을 올려 주지 않던가.

“축하합니다. 달의 눈물이 낙찰되었습니다!”

30만 포인트면 적절한 가격이었다.

달의 눈물을 얻었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었다. 목록이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마족은 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경매 물품으로 무엇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그 의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럼 바로 19번째 경매 물품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전 아이템과 대비되는 그것! ‘태양의 미소’입니다!”

역시…….

목록에는 없었던 아이템이다.

달의 눈물과 태양의 미소.

하나의 짝을 이루는 듯한 이름이지 않은가.

마치 이 두 가지를 꼭 사라는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즉시 심안을 발동시켰다.

이름- 태양의 미소

설명: 태양의 마력이 자연적으로 집약된 마력의 결정체. 섭취할 경우 순수 지능이 80 이하일 시 3의 지능을, 85 이하일 시 2의 지능을, 90 이하일 시 1의 지능을 올려 준다.

* 매우 낮은 확률로 ‘태양의 저주’에 걸린다.

달과 태양, 마력과 지능이 바뀌었을 뿐 판박이 아이템이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섭취하면 따로 추가되는 옵션이라도 있는 것일까?

달의 눈물, 태양의 미소. 둘 다 전생에서 나온 적은 있지만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구매자도 각각이라 동시에 섭취한 마족은 없었다.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어찌한다.’

나는 턱을 괴었다.

어둠의 정령왕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를 확실히 알아야 했다.

적인가, 아군인가.

실인가, 득인가…….

이 판에서 영원한 동맹은 없다.

우리가 비록 은밀한 협약 관계 아래에 놓여 있다고는 하나 언제 뒤통수를 때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여 나는 더욱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시작가는 25만입니다! 태양의 미소는 달의 눈물과는 달리 지능을 올려 주는 절세의 비약!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 겨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25만.”

“후작 아나스타샤 님! 25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더 안 계십니까?”

드보롱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지능은 다소 외면받는 능력치다.

다른 능력치와 다르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적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위 입찰을 하는 자가 없었다.

나 역시 고민 중이었고.

하지만 이왕지사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결론을 내린 뒤 입을 열었다.

“26만.”

이로써 231만.

경매가 진행되며 사용한 포인트의 총합이다.

소년상과 소녀상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그만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는 뜻. 이쯤 되자 마족들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수로 저만한 포인트를 모았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던전으로 들어오는 각성자는 나날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첫해가 오히려 포인트 수익이 더 나았다. 그러나 나는 첫해보다 더욱 많은 포인트를 소유했다.

무슨 비법이 있으리라 여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몇몇 마족의 눈에 탐욕과 흥미가 떠올랐다.

어지간한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대공 오쿨루스마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나…… 나는 그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26만 포인트에 태양의 미소가 낙찰되었습니다. 백작 랜달프 님, 축하드립니다!”

드보롱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후 곧장 다음 경매로 넘어갔다.

“대망의 20번째 물품입니다. 그리고 작년 경매에서 봉인된 무구가 몇 번 나왔던 것을 손님분들도 기억하실 겁니다. 운이 좋으면 에픽 등급의 아이템도 얻을 수 있는 그것, 올해도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봉인된 망토’입니다!”

드보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령들이 가지고 나온 것.

어두운 진홍빛의 망토였다.

허름하기 짝이 없었고, 곳곳에 그을음이 있었다.

이번 경매에 처음 선보이는 봉인된 무구였다.

다른 마족들은 몰라도 나는 이 무구의 옵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안을 열자 장문의 메시지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름- 나태(Epic, Set Item)

설명: 신들조차 반해 버린 신화적인 대장장이 오스웬의 마지막 작품. 7대 죄악을 모티브로 만들었지만 강력한 사념이 깃들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오스웬은 미쳐 버렸다고 전해진다.

“왕의 유일한 덕목은 나태일지니!”

* 민첩+7, 7일에 한 번 에픽(Epic) 등급 스킬 ‘나태’를 사용 가능

[‘7대 죄악’ 세트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같은 종류의 세트 아이템을 모으면 모종의 효과가 더해집니다.]

[봉인의 등급이 매우 높아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72시간 동안 힘이 10 저하됩니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주시했다.

작년에 이어서 또다시 7대 죄악에 해당하는 세트 아이템이 떠오른 것이다.

평상시였다면 주먹을 불끈 쥐어도 남았겠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달의 눈물과 태양의 미소.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나태.

이 일련의 과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나를 시험하고 있군.’

작게 혀를 찬다.

드디어 정령왕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