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69화 (69/242)

던전 사냥꾼 69화

봉인된 무구라고는 하지만 정령왕은 필시 나태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분노를 가져간 것 역시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봉인을 꿰뚫어 볼 수준 높은 관찰 스킬의 소유자, 막대한 포인트의 보유자…….’

그래서 시험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왕은 나를 간 보고 있었다. 좋은 물건을 던져 주며 ‘능력이 된다면 구매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능력이란 아이템을 볼 줄 아는 안목과 막대한 포인트의 소지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 나는 달의 눈물과 태양의 미소를 구매했다. 적어도 지능과 마력을 눈에 띄게 올려 준다는 점에서 그 둘은 매우 좋은 아이템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나태라.’

하필이면 7대 죄악 중 하나인 나태가 나왔다.

딜레마였다. 내게 꼭 필요한 아이템. 이미 그중 하나인 분노를 소지하지 않았던가. 나태마저 손에 넣는다면 급전적인 전투력의 상승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저것을 확정하며 구매하는 순간 정령왕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게 문제다.

허나 가장 큰 걸림돌은 정령왕이 나머지 7대 죄악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경우였다.

나머지 다섯 개의 아이템으로 암처에서 나를 움직이려 든다면 그때 나는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실리를 따져서 계산해 본 뒤 ‘움직이는’ 쪽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반드시 물 수밖에 없는 미끼.’

가만히 미간을 주무른다.

나태를 구매하는 순간 심안이라는 내 밑천을 정령왕에게 내보일 수밖에 없다. 막대한 포인트를 소지한 것이야 애당초 모두에게 드러낼 셈이었으니 걸릴 게 없다지만…….

쯧, 내심 혀를 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나태는 구매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봉인된 망토를 자세히 보십시오. 단순히 헤지고 찢어진 오래된 망토가 아닙니다. 혹시 ‘오스웬’을 아십니까? 마계에 떨어진 비운의 대장장이, 그러나 신들마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화적인 존재! 이 망토는 그가 죽어 백골이 된 동굴에서 우연히 구한 것입니다. 필시 예사 물건은 아닐 테지요.”

드보롱이 말했다.

봉인된 무구.

정령도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구한 장소와 아이템의 외견에 따라서 유추할 수는 있었다.

동시에 마족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오스웬을 모르는 마족은 없었다.

그가 남긴 무구 중 뛰어나지 않은 게 드물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움직이게 만들 위력을 자체적으로 품고 있었다. 우연찮게 오스웬의 무기를 얻은 마족이 귀족과 대등할 수준의 힘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농담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오스웬의 무기는 나타날 때마다 마계에 엄청난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물건 하나 얻자고 수차례 전쟁이 벌어질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대공 아리엘.

특히 그녀의 눈이 번쩍였다.

지금은 없지만 마계에 있었을 당시 그녀는 오스웬이 만든 무기를 즐겨 사용했다. 그중 아리엘의 전매특허 스킬 ‘어비스 소드’가 오스웬의 검을 통해 재현되는 날이면 대지가 찢어지며 수많은 마족이 가루처럼 산화되었다.

그러나 72명의 마족이 경합을 벌이는 게임이 시작된 직후 모든 것을 마계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손에 익지 않은 무기도 전혀 장애가 될 게 없는 웨폰 마스터가 그녀라지만 아쉬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비록 망토라고는 하나 구매 가치는 충분하다.

오스웬의 이름은 그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작정을 했군.’

나는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나태임을 알려 주진 않았다. 하지만 이만큼의 정보를 공개했다는 것은 제대로 경합을 벌여 보란 이야기다.

달의 눈물과 태양의 미소, 그도 모자라 나태까지 알아보고 구매할 저력이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 뻔히 보이는 속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드보롱은 예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봉인된 물품은 예외적으로 포인트 시작가를 높이겠습니다. 30만, 30만 포인트입니다!”

“30만.”

“대공 아리엘 님! 이번에는 반드시 낙찰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먼저 손을 든 건 대공 아리엘이다.

그녀는 투지를 불태우며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여태껏 구매한 아이템이 없으니 아리엘의 포인트 한계는 62만 언저리였다. 풍요의 여신상으로 쟁탈전이 벌어질 때 한계가 드러난 바가 있었다.

“35만.”

“공작 디펠라 님!”

“60만.”

“……! 대공 아리엘 님! 경합조차 귀찮다! 이건 그냥 가져가겠다는 거군요!”

일순 정적이 돈다.

단번에 25만 포인트가 뛰어 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태를 욕심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스웬의 이름도 있지만 아리엘은 안목이 매우 뛰어나다.

일전 분노가 경매 물품에 나왔을 당시 입찰을 시도한 것처럼 그만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당연히 이후 입찰하는 마족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60만 포인트 이상을 소지한 마족 자체가 거의 없었다.

“63만.”

“아니, 백작 랜달프 님! 대단한 저력입니다. 그리고 어쩐지 익숙한 수치입니다.”

있어 봐야 나 정도?

드보롱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아리엘의 한계치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63만을 부른 게 짓궂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실제로 아리엘의 표정은 볼만 했다.

찌푸려진 눈썹, 꾹 닫힌 입매. 척 봐도 무척 심기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내 두 뿔이 길어지며 더욱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눈에선 피가 뚝뚝 흐를 것만 같았다. 이어 그녀는 사이드 홀을 박차고 나가, 어느덧 내 앞에 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경매에서 적의 한계를 파악하고 그보다 상위 입찰하는 건 기본적인 전략이다.

“포인트로 안 되니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건가?”

“무례한 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따위 저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공 아리엘이다.

막무가내인 경향이 있긴 했지만 모든 대공 중 가장 고고한 품격의 소유자. 나도 그건 인정하고 있었다. 우파는 음흉하고, 판데모니엄은 비난적이며 오쿨루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정상적인 성격이라는 거다.

하지만 누가 봐도 화가 난 기색이 역력한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 지금은 경매가 진행 중입니다. 경매에 지장이 가는 행동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켜보던 드보롱이 첨언했다.

마계 옥션은 절대로 분란의 장소가 되어선 안 된다. 서로가 포인트만을 가지고 경쟁하는 게 정령들의 입장에선 최고의 일이었다.

당연히 분란을 일으키는 이는 입장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모를 아리엘이 아니다. 고작 2년 차. 앞으로도 무수하게 기회가 많을진대 일을 그르칠 만큼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너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걸 인정해 주마.”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칭찬을 내뱉어 봤자 와닿지 않는다.

아리엘은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랜달프 브뤼시엘, 내 휘하로 들어오라.”

느닷없는 영입 제안.

모든 마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일이다.

이 대담함에 나도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이미 한 차례 거절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시험일 따름이었지만 어쨌든 거절은 거절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접촉해 왔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하물며 장소의 문제도 있었다.

이곳은 경매장이 한창 진행 중인 곳.

모든 대공과 마족이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아리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상하군.’

아리송하다.

아리엘은 지략가가 아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튀어 나가는 마족. 그런데 지금 타이밍에 나서서 나를 몰아가는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대도 그녀로선 손해 볼 게 없었고, 거절한다면 명분이 생긴다.

본능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계산된 계략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회유하려는 작정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거절한다. 누군가의 밑에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 차라리 군림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나는 묵묵하게 답했다.

그리고 확실하게 내 진정한 목적을 말했다.

처음부터 이곳에 모인 모든 마족은 적이었다.

그것이 조금 공론화될 따름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공 아리엘이 표정을 굳혔다.

“거절로도 모자라 군림을 논하다니…… 그것도 나 아리엘의 앞에서 말이다.”

‘참으로 발칙한 녀석이지 않은가.’라고 작게 덧붙인 그녀가 자신의 뿔을 한 차례 쓰다듬었다. 그러자 뿔이 원래의 모습대로 짧아졌다.

“이제껏 마계에선 대공이라 칭한 자들 네 명이 군림해 왔다. 나 역시 그중 하나이지. 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변치 않았느니라. 한데 너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마계의 율은 오직 하나다.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

나는 대놓고 아리엘을 부정했다. 비웃었다.

계급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

강자 독식.

강자가 모든 걸 가지는 게 마계다. 그곳의 절대적인 율법이었다.

마계에 있을 때 나는 대공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었다.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맹랑한 애송이’ 정도로 나를 취급했다. 기억에서 지우고 아예 없던 녀석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 애송이는 이제 없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날뛰던 녀석은 사라졌다.

지금은 어엿한 강자 한 명이 있을 따름이다.

아리엘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동시에 한 방 얻어맞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가장 기본적이지만 절대적인 율법을 내뱉을 자격이 되냐는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로 아리엘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질 수 없다, 아리엘 디아블로.”

나 자신이 결코 약자가 아니라는 것.

홀로 너희 모두를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 자신감!

아리엘마저 이 부분에선 살짝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 선택이 만용이 아니길 바라지.”

아리엘은 몸을 돌려 다른 세 개의 사이드 홀을 바라봤다.

이윽고 언령을 발동시켜 선언하였다.

“들어라! 랜달프 브뤼시엘을 휘하로 받아들이는 자, 나 대공 아리엘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 나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노라! 전력을 다해 깨부술 터인즉!”

공식 석상에서의 선언이다.

만약은 없다. 아리엘은 저 말 그대로 행동할 터였다.

누군가가 내게 접근하려는 의도를 차단시킨 것이다. 아리엘의 언령 스킬이 은은하게 묻어나며 말에 힘이 실렸다. 그렇다고 완전히 봉쇄되지는 않겠지만 이제 나에게 접근하려는 이는 한 번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내 발언이 더해졌으니 더욱 확실하다.

아리엘이 느지막하게 말했다.

“홀로 선 자의 끝이 비참이 아니길 빌어 주마, 랜달프 브뤼시엘.”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전개를 지켜보던 드보롱이 외쳤다.

“아리엘 님! 아직 경매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흥이 깨졌다.”

쿵!

거대한 문이 닫힌다.

아리엘이 경매장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경매장을 벗어나는 아리엘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꼭 손에 넣고 싶은 장난감을 찾은,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 * *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대공 아리엘이 사라짐으로써 그 휘하 마족들은 잠시 당황한 듯하였으나 곧 정상적으로 경매에 참여했다. 결국 경매 도중 자리를 벗어난 이는 대공 아리엘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분위기는 급변했다.

우선 나를 바라보는 마족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대공 아리엘의 선언과 나의 발언. ‘나’라는 존재가 더욱 강하게 부각된 계기가 되었다.

아직 부족한 감은 있지만…… 시간문제다.

강력한 마수, 두 개의 던전, 서서히 커 가는 인간들까지. 마족들은 몰라도 나 역시 숨겨 놓은 카드가 많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충분히 일인 군단, 개인 파벌의 위력을 뽐내게 되리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지금은 일단 인식을 조금이나마 비틀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허나 내가 바라는 건 모든 대공들과 나란히 서는 거다. 더 나아가 온전한 경쟁 상대로서 승리를 거머쥐는 게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며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였다.

고작 2년 차에 거의 그 목표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었다.

아리엘의 행동은 그 저의를 여전히 알 수가 없었지만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실보다는 득이 컸다.

더 많은 조명과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으므로…….

이 막의 주인공은 온전히 나 자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의 아이템을 더 얻은 뒤 나는 두 번째 경매를 매우 만족스럽게 끝마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