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72화
강제 전이가 끝나고 던전으로 돌아오자 바로 옆에서 이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어 날개를 팔락거리며 주변을 빙글빙글 날았다.
“오셨어요, 마스터!”
“정신 사납다.”
파리마냥 날아다니는 이히의 몸을 잡아 던전 코어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히는 영체지만 던전 코어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런 접촉이 가능했다.
“마스터, 마스터. 이히의 말을 들어 보세요. 영원의 꽃을 15층에 심었더니 주변 경관이 너무 예뻐지는 거 있죠?”
이에 아랑곳 않고 이히가 조잘거렸다.
영원의 꽃은 1년 차 마계 옥션이 끝나고 내가 이히에게 선물한 아이템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영원히 피는 희귀한 꽃. 나는 가볍게 답했다.
“그렇군.”
“이참에 꿀벌들도 옮기려고요. 이히히, 더 맛있는 꿀이 만들어질 거 같아서 이히는 굉장히 기대 중이랍니다.”
“그렇군.”
“그런데 마스터. 이번에는 이히에게 줄 선물이 없나요?”
자신의 속을 못 알아차려서 조금 답답했는지 이히가 울상을 지었다. 하기야 난데없이 영원의 꽃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그 외엔 달리 없었다.
던전 코어의 요정 주제에 주인에게 무언가를 바라다니. 나는 이 행태를 한 번 꾸짖을까 고민하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곧 나올 거다.”
옥외 시장에서 이히가 좋아할 법한 물건을 하나 사 오긴 한 것이다. 꿀벌과 관련된 약간의 비리가 있긴 했지만 그간 던전을 제대로 경영해 준 공로를 높이 사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이히가 보석같이 맑은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마치 모터라도 달은 듯 날개가 퍼덕였다.
“와! 이히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요? 그럼 어디 한 번 맞춰 볼게요. 음, 아카시아 꽃! 밤꽃! 유채꽃! 이히히. 마스터, 이 꽃들에서 채취하는 꿀은 엄청 달아요. 또…….”
죄다 꽃 종류다. 그만큼 꽃을 사랑한다는 방증이기도 하였다. 어쩐지 맞춘다기보단 자기 취향을 나열하는 느낌이지만 나는 가만히 이히가 떠들도록 놔두었다.
곧 주변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내가 경매에서 낙찰 받은 물건들,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옥외 시장에서 구매한 몇 가지 쓸모 있는 물품도 마찬가지다.
이번 마계 옥션에서 구매한 모든 것이 공간의 균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자 이히는 입을 크게 벌리며 내내 감탄을 늘어놨다. 그러더니 한 곳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
킹 비!
그 크기만 1미터에 달하는 대형 벌.
하급이지만 마수로 책정된 괴물이다. 만물상점에서는 팔지 않지만 옥외 시장에서 파는 걸 발견하곤 사 왔다. 킹 비가 채취한 꿀은 조금 더 풍취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생에서 이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히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자신의 선물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생김새가 압권이다.
평범한 벌과 달리 더듬이가 집게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다. 입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다. 수십 마리가 모여 있으니 살 떨리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벌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모습.
“귀엽다!”
그러나 이히에겐 같은 벌일 따름이었다.
이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킹 비를 이끌고 사라졌다. 몸을 베베 꼬며 볼에 입을 맞추려는 걸 손가락으로 저지하니 그것도 괜찮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선물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연방 ‘마스터, 최고!’를 외쳐 대는 통에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이후 나는 경매에서 구매한 물건들을 쭉 훑다가, 아스트랄 코드를 손에 쥐었다.
‘우선 이것부터 사용해 봐야겠군.’
다시 한번 심안을 열어 아스트랄 코드의 옵션을 확인했다.
이름- 아스트랄 코드(U)
설명: 아이템에 한 가지 옵션을 부여한다.
* 능력치를 +1, 2, 아이템의 고유 특성 강화 중 무작위로 선택된다.
* 실패 확률은 사용자의 마력에 반비례한다.
결국 강화 아이템이다.
무작위 능력치 하나를 1에서 2 올려 주거나, 아니면 그 아이템이 가진 고유 특성 하나가 강화되는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강화시킬까?
잠시 고민하다가 분노를 꺼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 중 가장 좋은 무구가 이것이었다.
나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망토다. 직접 휘두르는 검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분노를 강화시켜야겠어.’
아이템을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스트랄 코드.”
그 이름을 한 번 불러 주면 된다.
곧 검은색의 물체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아스트랄 코드가 작동되었습니다. 강화시킬 아이템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분노(Epic) 2. 나태(Epic) 3. 파라노말(U)]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무구는 이 세 개가 전부였다.
나는 바로 분노를 선택했다.
[아이템 ‘분노’에 아스트랄 코드가 덧씌워집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높은 마력 보정(93)으로 성공 확률이 대폭 올라갑니다.]
[진행률 1%, 2%, 3%…… 100%.]
[특성 강화가 선택되었습니다. 아이템 고유 스킬 ‘분노(Epic)’의 요구 조건이 낮아졌습니다. 이제 지능이 76 이상이면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무작위 능력치 2가 올라도 대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성 강화가 선택된 것이다.
그것도 평소 문제라고 여긴, 계륵과 다름없었던 스킬 ‘분노’의 지능 요구 조건이 대폭 낮아졌다. 지금 내 지능은 74. 이 정도면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봐도 좋았다.
아니었다면 80은 넘어야 스킬을 사용할 엄두를 냈을 터였다. 아스트랄 코드를 사용한 덕분에 고질적인 문제 하나가 해결된 셈이다.
‘시작이 좋다.’
시작이 반이랬다. 나는 즉시 정령왕의 레시피를 들었다.
‘레시피라 함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겠지.’
어둠의 정령왕.
그는 내가 무엇을 만들길 바라며 선물이랍시고 이런 종이 뭉치를 건네준 걸까?
값비싼 양피지 몇 장이 둘둘 말려 있는 형태. 나는 말려 있는 양피지를 풀고 적혀 있는 글귀를 확인했다.
하지만 글자는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할 듯했다.
‘숨겨진 옵션…….’
이윽고 ‘유니크 등급 이상의 관찰 스킬’이 있어야 보는 게 가능하다고 적혀 있던 걸 기억해 냈다. 즉시 심안을 열자 글씨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정령왕의 레시피’를 확인했습니다.]
[봉인의 등급보다 심안의 스킬 등급이 더욱 높습니다. 아무런 페널티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창들.
나는 이를 무시하고 레시피에 적힌 글귀를 확인했다.
「이 레시피에 적힌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니크 등급 이상의 조합 스킬이 필요하다.
달의 눈물+태양의 미소=마력의 결정체(저주)
마력의 결정체(저주)+엘릭서+유니콘의 뿔=마력의 결정체(순수)
마력의 결정체(순수)+세계수의 씨앗=발아한 세계수의 씨앗」
단 세 줄.
그러나 매우 의미 있는 세 줄이었다.
‘세계수를 틔우는 방법……인가?’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레시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계수, 던전을 확장하기 위한 최고의 구조물. 그 하나만으로도 천만 포인트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였다.
과거 오쿨루스를 제외하면 누구도 싹을 틔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오쿨루스는 세계수를 띄운 방법을 철저하게 함구했다.
나는 잠시 감탄을 내뱉었다.
‘조합을 해야 했던가.’
단순히 세계수의 씨앗만 있다고 싹이 트진 않는다는 것이다. 조합을 통해 발아를 시켜야 함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세계수의 씨앗을 조합에 사용하려 했겠나.
씨앗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고가인 데다가, 구하기도 쉽지 않다. 전생을 통틀어 마계 옥션에 나타난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서너 번? 그런데 조합을 잘못하면 전혀 다른 아이템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것도 전혀 가치 없는 아이템으로 말이다.
도박. 그러나 레시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어둠의 정령왕이 제대로 적었을 경우에 한하지만 선물이란 이름으로 내줬는데 속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정령왕은 균형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를 시험하며 선택했으니…….
가장 빠르게 세력을 넓힐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세계수’였다. 마수의 번식률이 증가하고 대지의 정령이 자동으로 생성된다. 뿌리 등을 이용해 높은 등급의 무구를 만들 수도 있었다.
‘문제는 조합 스킬이로군.’
내가 가진 ‘스킬 조합(R)’은 아이템을 조합시킬 수 없었다. 턱을 쓸고 고민하다가 이번에 함께 구매한 현자의 비약을 들었다.
이름: 현자의 비약
설명- 연금술의 총체. 유니크(U) 미만 스킬의 등급을 한 단계 끌어 올린다. 유니크(U) 등급 스킬에 사용할 경우 반 단계 위인 익셉셔널 유니크(Ex U) 등급이 된다. 그 이상의 등급에는 효과가 없다.
레어 등급의 스킬은 유니크 등급이 되었을 때 한차례 변한다. 유니크란 말 그대로 유일무이. 레어 등급은 지천에 널렸지만 유니크 등급이 됨으로써 고유한 가치를 갖게 된다.
‘스킬 조합의 등급을 올리면 조합 관련 스킬이 나온다. 보통은 평소 행한 행동에 따라 변화하지만 현자의 비약을 사용하면 무작위인 경향이 있지.’
사용할지 말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유니크 등급 이상의 조합 관련 스킬은 만물상점에서도 팔지 않았다. 아니,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합 관련 스킬은 ‘스킬 조합(R)’ 하나뿐이었다.
다른 것을 구하려거든 마계 옥션을 통하거나 특수한 이벤트를 해결해 보상으로 얻거나 하는 방법뿐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군.’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무척 한정적이었다.
내년 마계 옥션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나온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시간만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템도 조합할 수 있도록 범용성 넓은 스킬이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령왕은 이런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물상점에서 파는 목록을 정령왕이 모를 리 없으니까.
조합 스킬을 구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면 아예 관련 스킬을 내게 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상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일 터.
혀를 차며 현자의 비약을 마셨다.
[현자의 비약을 섭취하였습니다. 등급을 올릴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스킬 조합(R)]
조합할 수 있는 스킬도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 스킬은 모두 에픽 등급이었는지라 현자의 비약이 소용없었다.
어차피 이미 시작한 일, 미련은 없었다. 빠르게 등급을 올릴 스킬을 선택했다.
[스킬 조합(R)이 만물 조합(U)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생소한 이름이다. 전생에서도 그다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상태창에서 스킬을 유심히 쳐다보자 그에 관한 설명이 허공에 떠올랐다.
만물 조합(U)- 만물(萬物)이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거창한 이름과 달리 한계가 있다. 사용자가 사용하는 스킬을 포함한 대부분의 것을 조합하는 게 가능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범용성이 무척 넓은 스킬이 나왔다.
‘괜찮군.’
예상한 것보다 더욱 좋은 결과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건 레시피에 적힌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달의 눈물과 태양의 미소, 엘릭서와 유니콘의 뿔,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
내 던전에 세계수가 나타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손에 땀이 고였다. 오쿨루스는 세계수 하나로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다른 마족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의 질 좋은 마수를 많이 보유했다.
지금도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수마저 나타난다면 적어도 던전의 질에 있어선 나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한국의 던전 하나가 다른 던전 다섯 개의 값어치는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고작 2년 차임을 감안하면 그 차이는 점점 벌어질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세계수의 씨앗이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마저 어떻게든 틔울 방법을 찾는다면 무려 두 개의 세계수를 갖게 된다.
전무후무. 전생에서조차 없었던 이변을 내가 직접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레시피에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만물상점 창을 불러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