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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73화 (73/242)

던전 사냥꾼 73화

[마력의 결정체(순수)와 세계수의 씨앗을 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조합 결과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이 완성되었습니다!]

엘릭서와 유니콘의 뿔. 다행히 둘 다 만물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재료가 전부 모이자 조합을 시도했고, 조합이 완료되자 손 위에 싹을 틔운 씨앗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크기는 고작 엄지손가락만 하지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양지바른 땅에 묻어 주면 성장 정도에 따라 족히 수십, 수백 미터까지 자라나는 거대한 나무가 될 것이었다.

나는 마계에서 한 번, 그리고 오쿨루스의 던전에서 한 번, 총 두 번 세계수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위엄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보는 순간 압도되며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마력. 온몸에 전율이 흐르게 만드는 존재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 가장 아름답고 황홀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왜 엘프들이 세계수에 목을 매는지 알 수 있었지.’

물론 세계수 자체가 가져다주는 이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엘프에게 있어서 세계수는 자존심이며 긍지다. 생명력이 요동치는 거대한 나무는 엘프의 뿌리와 같았다.

강한 엘프만이 세계수 근처에 사는 걸 허락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적힌 내용은 얼마 없었으나…… 충분하다.’

레시피는 진짜였다.

적어도 어둠의 정령왕이 내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선물을 받으면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마계 옥션에서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사용했고, 앞으로도 사용할 예정이었다. 하물며 바람잡이 역할을 도맡아 그들에게 커다란 이득을 안겨 주지 않았던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내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내가 그들의 부탁을 거부한대도 그들로선 나를 해코지할 방법이 없었다.

VIP. 파벌급의 포인트를 사용하는 나다.

세계수로 큰 이득을 얻어 마계 옥션에서 사용한다면 정령왕으로서도 딱히 손해는 아니었다. 괘씸하긴 하겠지만 그게 전부다.

나는 조심스럽게 씨앗을 들고 15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다크 엘프의 마을 근처에서 마력을 개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줄리엄이 달려왔다.

“던전 마스터를 뵙습니다.”

“세계수의 씨앗을 심어 놓은 장소가 어디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돌 루프의 던전에서 얻은, 발아하지 않은 세계수의 씨앗.

지력이 가장 강한 장소에 묻어 놨을 터이니 그곳에 함께 심을 작정이었다.

줄리엄이 한 차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하온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작정이다.”

“이미 심어 놓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발아하지 않았지. 내가 말하는 건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보아라.”

오른손을 펼쳐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을 보여 주었다.

씨앗 자체가 방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기에 줄리엄이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묻은 세계수의 씨앗과 똑같이 생겼으니……. 하지만 한 가지, 씨앗이 발아한 상태라는 점은 확실히 달랐다.

“……!”

차이점을 깨닫고 줄리엄이 숨을 멈췄다. 전신을 바르르 떨어 대며 핏줄이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세계수의 씨앗이 두 개가 있는 걸로도 놀라운데 무려 하나는 발아한 상태다. 곧 줄리엄은 내가 한 말의 저의를 깨닫고 급히 허리를 세웠다.

“즈, 즉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침을 꼴깍 삼키는 줄리엄의 표정에 다급함이 서렸다.

* * *

15층의 중심부.

그곳에 세계수의 씨앗이 묻혀 있었다.

비옥한 땅. 흙의 상태도 고르고 지력 역시 훌륭했다. 심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빠르게 자라날 대지였다.

그 주변에서 수십의 다크 엘프가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크리슬리도 있었는데, 붉은 피로 얼굴에 문신을 그리고 씨앗의 가장 가까이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진다. 풀 따위가 눈에 띄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는 엘프라면 모두가 본능적으로 행할 수 있는 생명 찬가다.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한 의식인 듯싶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어 보였다. 씨앗은 조합을 통해 발아를 시켜야 했으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소용이 없는 듯싶었다.

“집중해 주십시오. 의식을 중단하겠습니다!”

줄리엄이 손뼉을 쳤다. 의식의 집중력이 단번에 흩어졌다. 다크 엘프들이 눈을 뜨며 의아해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던전 마스터를 뵈옵니다.”

“던전 마스터를 뵙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중심에 선 크리슬리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위해 피로 얼굴을 적시긴 했으나 평소의 매혹적인 자태가 어디를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태를 감상하기보다는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진전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크리슬리가 힘없이 답했다.

씨앗을 얻고 벌써 수개월. 자신 있게 시작한 일이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사용한 방법을 말해 보라.”

“먼저 지력을 높였습니다. 성장을 촉진하는 벌레를 이용했고, 요정님께 부탁하여 흙을 바꾸었습니다. 대지의 정령을 불러들여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는 잘 모르는 듯했습니다. 지력을 한데 모아 씨앗에 집중했지만 주변의 나무들만 죽었을 뿐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생명 찬가의 의식을 1개월째 행하는 중이었사온데…… 그다지 효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크리슬리는 하나의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답변했다.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의식을 행했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조합 외엔 없는 모양이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만에 하나를 위해 물었지만 예외는 없었다.

손에 든 씨앗을 크리슬리에게 넘겼다.

그러자 크리슬리가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요?”

“새롭게 심을 세계수의 씨앗이다.”

크리슬리는 눈치가 빠르다. 다시 물을 필요도 없이 이것이 진짜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인 점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미 발아를 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대로 보았다.”

“아……!”

제대로 보았다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모든 걸 깨우친 크리슬리가 감탄을 뱉었다. 지금껏 행한 다크 엘프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지만 그보다는 세계수가 발아했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함께 심을 생각이십니까?”

“고민 중이다. 혹, 세계수가 한 장소에 둘이 나타난 경우를 알고 있나?”

크리슬리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죄송합니다.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는?”

다크 엘프의 면면을 쭉 훑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잠시 턱을 짚었다. 줄리엄이나 크리슬리는 마계나 중간계의 역사에도 정통한 편이었다. 이 둘이 모른다면 진짜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의 던전에 심거나, 둘을 함께 심거나.’

나머지 하나가 발아한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심는 방향으로 점점 심증이 기울었다. 이는 경매에서 구매한 한 아이템 때문이다.

풍요의 여신상!

근처에 존재하는 한 가지 ‘종’에 대하여 번식률 등을 올려 주는 에픽 등급의 아이템. 세계수의 씨앗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다만 번식 대신 성장에 큰 영향을 줄 따름이다. 일본의 던전에 하나를 옮기면 그곳에 있는 씨앗은 이 효과를 받을 수가 없었다.

결정을 내리곤 말했다.

“둘을 함께 심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는 세계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발아한 하나의 씨앗이 제대로 성장한다 해도 나머지 하나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상관없다.”

크리슬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간언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모든 건 확실하지 않은 변수 속에 있었다.

고민한 대로 하나를 일본의 던전에 심으면 리스크는 확실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을 함께 성장시킨다면 그 이상 돌아오는 게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풍요의 여신상이 주는 축복의 효과를 하나만 받게 하자니 너무나 아까웠다. 게다가…… 이 축복의 효과로 말미암아 나머지 하나가 발아할지 어찌 아는가? 먼저 성장한 세계수가 좋은 효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거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100% 만족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더 이상의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크리슬리를 비롯한 다크 엘프들의 눈에 ‘사명감’이 생겨났다.

두 개의 세계수.

그들이라고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크리슬리는 단지 나를 생각하여 걱정을 했을 뿐이다.

만약 틔우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엄청난 축복이다. 유례없을 일이며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강력한 혜택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이곳이 가장 지력이 강한 곳임에는 분명할 테지?”

“분명하옵니다.”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크리슬리가 자신 있게 답했다.

나는 마법 주머니에서 풍요의 여신상을 꺼냈다. 1미터 50센티가량의 풍만한 여인이 미소 짓고 있는 석상. 다크 엘프들이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지만 아랑곳 않고 축복을 발동시켰다.

“풍요의 여신상.”

이어 창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한 가지 종에 한하여 ‘풍요의 축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축복의 범위는 여신상의 반경 50킬로이며 지정된 범위를 벗어나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근처에 존재하는 종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축복을 내릴 종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다크 엘프 2. 천년목 3. 킹 비 4. …….]

근처에 존재하는 종의 목록이 수없이 떠올랐다. 나는 그중 12번에 놓인 ‘세계수’를 찾아내고 선택했다. 그것만 있는 걸 보면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세계수를 선택하자 풍요의 여신상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던전의 15층에 넓게 퍼져 나갔고, 이윽고 세계수의 씨앗에 모여들었다.

[세계수에 풍요의 축복을 내렸습니다. 성장 속도가 대폭 증가하며 더욱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크리슬리의 손 위에 얹힌 세계수의 씨앗이 은은한 청색의 빛을 뿜었다. 축복이 제대로 부여된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효과가 없지는 않을 터였다.

“심어라.”

“예.”

크리슬리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이미 심어 놓은 세계수의 씨앗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을 선택했다. 굳이 깊게 묻을 필요가 없는 만큼 손으로 흙을 퍼내고 조심스럽게 씨앗을 묻었다.

막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은 순간.

후웅!

땅이 한 차례 진동했다. 주변의 지력을 빨아들이고 거대한 용트림을 뿜어낸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덮어놓은 흙 위로 조금씩 싹이 올라왔다. 그 크기는 고작 몇 센티에 불과하나 이제 막 태어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렬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아……!”

“세계수가…… 세계수가……!”

다크 엘프들이 일제히 말문을 열었다. 전율하며 세계수가 틔운 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홀하게 눈을 적시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예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포개어 세계수를 ‘영접’하는 다크 엘프마저 있을 정도다.

던전 마스터인 내게도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크리슬리와 줄리엄은 그나마 절제하는 모양이었지만 감격에 몸을 떠는 것은 같았다.

곧 몇 개의 메시지창이 허공을 수놓았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최초로 ‘세계수’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세계수는 숲의 어머니입니다. 한없이 인자하나 숲을 헤치는 적에게는 가차 없이 철퇴를 가하는, 그 스스로가 천혜의 요새인 초대형의 특수 구조물입니다.]

[던전의 등급이 올라갑니다. 내정 모드에서 추가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칭호 ‘세계수의 주인’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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