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75화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온몸이 노곤해진다. 물에 잠긴 듯 전신이 무겁다.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는다. 이윽고 숨 쉬는 것마저 귀찮아졌다.
이것이 나태인가? 모든 게 느려지고 있었다. 행동 따위가 감속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100을 넘어 106에 다다른 민첩. ‘초월자의 벽’이라 불리는 그 기점을 단번에 뛰어넘었으니 평소와 같다면 말이 안 된다.
스킬 ‘나태’는 세계를 가속하는 능력이었다. 우월한 민첩의 시너지 효과가 더해지자 시간과 공간이 변화했다. 인지의 범위가 미친 듯이 넓어졌다. 아주 먼 곳에 있는, 던전 바깥에 존재하는 풀잎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나는 잡아낼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풀벌레가 미동하고 물방울이 생성되며 떨어지는 등의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만물의 정보가 들어온다. 그러니 움직일 필요가 없다. 모든 걸 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태인가 싶었다.
인지의 변화. 시간의 흐름도 달라졌다.
1초가 무척이나 길었다. 1분은 그럼 얼마나 길겠는가. 1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흘렀을 때 나는 시간이라 불리는 거대한 감옥 속에 그대로 갇혀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나태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흐름에 순응하며 그저 가만히 방관하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몸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내심 비명을 내질렀다. 전신을 짓누르는 시간의 벽이 점점 좁혀져 왔다. 가속하면 가속할수록 내 신체적 능력이 버티지 못한 탓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106이란 민첩에 비해 체력과 힘이 너무 낮았다. 나태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하락했고, 그 불균형의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온몸이 짓뭉개질 것이었다.
‘이대로도 괜찮은가?’
아득한 고통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이상 나태할 순 없었다.
귀찮음을 딛고 한 발자국 나아갔다.
‘나는 역행자다. 흐름을 거부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자. 순응하는 양들을 향해 차갑게 비웃으며 조롱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나이지 않았던가. 고작 스킬이 가져다준 상태 이상 따위에 굴복할 순 없는 노릇이다.’
작은 의문.
호숫가에 던져진 돌멩이가 전에 없던 파장을 만들어 냈다.
파장은 조금씩 커지더니 이윽고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일어나자, 랜달프 브뤼시엘. 너에게 나태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태 이상 ‘나태’가 해제됐다는 알림창과 함께 나는 눈을 떴다.
“후욱!”
막힌 숨을 토해 낸다.
즉시 시선을 내려 몸을 점검한다.
다행히 부서지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나 곳곳에 멍이 있는 걸 보아, 조금 더 늦었다면 꼼짝없이 느려진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압사당할 뻔했다.
‘이게 나태인가?’
다시 한번 자문한다.
상태 이상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고양감. 아주 미세한 공기의 떨림마저 잡아내는 그런 감각을 나는 여태껏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극도로 느려진 세계는 어떠했던가. 단순한 ‘가속’ 스킬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가속 스킬은 단순히 신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억지로 과부하를 걸어 버리니 결국 뇌에 부담을 줘서 사용자가 끔찍한 말로를 걷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었다.
하지만 나태는 그저 시간만 조율한다. 인지란 결국 감각의 영역. 육체를 억지로 강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사고하며 움직일 수 있었다. 모든 걸 느끼고 미리 반응하는 게 가능했다.
가속 스킬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몇 단계는 더 발전한 형태가 바로 나태였다.
말 그대로 의욕이 사라지고 움직이기 귀찮아지기는 했지만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쉬운 게 하나도 없군.”
쓰게 웃었다.
문제는 명백했다.
초감각이 활성화된다지만 육체가 그것을 버티질 못한다는 것. 육체 강화가 아니라 육체 약화를 시켜서 더욱 그렇다. 체력과 힘이 6이나 낮아진 덕분에 106이란 수치의 민첩을 보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지능은…….
‘분노와 나태를 동시에 쓸 수는 없겠어.’
지능이 한 90쯤 된다면 생각은 해 볼 수 있겠다.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였다.
분노는 전체적인 육체 능력치를 강화해 주고, 나태는 초감각을 활성화시킨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리고 남은 다섯 개의 죄악 중 지능을 올려 주는 게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기대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태가 무슨 스킬인지 알았으니 되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목적은 이뤘다. 나태가 무엇이고 어떠한 제약이 있는지 알게 된 걸로 충분했다.
나는 홀가분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나태의 실험이 끝나고 3일 후.
세계수의 성장을 지켜보며 던전의 내정을 행하고 있을 때 불현듯 크리슬리가 찾아왔다.
“드문 일이군.”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한마디다.
크리슬리가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내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녀 역시 매우 바쁘기 때문이다.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고, 내가 명령한 일을 처리하며 세계수 또한 돌봐야 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터였다.
“던전 마스터를 뵙습니다.”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크리슬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형식적인 인사는 되었다. 그보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진대.”
고개를 든 크리슬리가 말했다.
“세계수에 관해 여쭐 일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라.”
내가 허락한 이상 우물쭈물할 크리슬리가 아니었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싹을 틔운 세계수에게서 강렬한 음과 양의 마력을 느꼈나이다. 이것은 본래 씨앗에 없던 것입니다. 불순물. 하지만 순수하게 정제된 무언가…… 그동안 생각을 정리해 본 결과, 아마도 마스터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한 줄로 예상합니다.”
거의 맞췄다.
이 부분에선 나도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제 몸에 깃든 마력의 종류가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진마룡 아오진과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 서로 대치되는 극양과 극음이 한데 섞인 게 크리슬리였다. 그 방면으로는 무척이나 예민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순물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다. 하물며 두 마력이 정제되었다는 것까지 꿰뚫어 보았다.
‘지능 100의 영향인가.’
그 외에는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잠시 감탄하며 꺼낼 대답을 생각했다.
세계수에 관한 정보는 극비다. 가능성은 적겠지만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다른 마족이 세계수를 틔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크리슬리였다.
다크 엘프는 의식을 치른 상대방에게 헌신하며 결코 배반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크리슬리는 지능 100의 소유자였다. 내가 모르는 답을 도출해 줄 가능성 역시 저버릴 수 없었다.
열심히 저울질을 한 이후.
“조합이다.”
말을 해 주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합…… 입니까?”
아리송한 표정으로 크리슬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마법 주머니에서 레시피를 꺼내어 크리슬리에게 건넸다.
“그곳에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는 조합이 적혀 있다.”
“태양의 미소, 달의 눈물? 처음 보는 이름이로군요.”
“읽을 수 있나?”
내심 줘 놓고 아차 하던 참이다. 레시피는 어둠의 정령왕이 직접 봉인한 것이었다. 관찰 스킬이 없으면 읽을 수 없도록 말이다. 한데 그것을 크리슬리가 읽었다.
이것도 지능의 효과라면 지능이야말로 만능의 능력치가 아닌가 싶었다. 새삼 지능이 낮은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의 반응을 보곤 크리슬리가 도리어 물었다.
“이상한지요?”
“아니다. 어쨌거나 레시피에 적힌 대로다.”
“마력의 결정체…… 저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순수한 마력이 집결된 장소에 간혹 그러한 결정체가 생성된다는 이야기를요.”
태양의 미소나 달의 눈물의 존재 여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크리슬리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지금으로선 그것을 구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풍요의 여신상에 기대를 건 것이었다. 축복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하나의 씨앗이 발아하기를 바랐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지금까지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크리슬리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십 초. 다시 눈을 뜬 크리슬리는 묘하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달의 눈물, 태양의 미소. 이름으로 보아하건대 필시 극음과 극양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겠지요. 그렇다면…… 제 ‘피’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조합을 통해 마력의 결정체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
잠시 멍한 눈초리로 크리슬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방 맞은 기분이다. 왜 이런 간단한 것을 생각지 못했을까?
확실히 그녀의 피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극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마룡은 태양왕으로 불릴 만큼 극양의 성질을 띠고 있었고,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는 달의 여왕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만한 효과를 얻으려거든 상당한 양의 피를 빼내야 할 것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
“죽지 않겠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합은 만능이 아니다. 마력의 결정체가 완성된다는 보장도 없다.”
“어두운 숲속을 지날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첫발을 디디는 것이옵니다.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정론이었다.
회귀한 뒤 내가 임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남았다.
“너의 피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머지 마력을 충당하면 된다는 이야기.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제가 마력 추출과 관련된 스킬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력을 추출할 물건을 내어 주신다면 제 피와 결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배양해 보겠나이다.”
무조건 마력만 추출한다고 결합을 할 수 있지는 않았다. 추출한 마력의 비율을 정하고 마력이 정화되도록 배양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매우 고난이도 작업에 속했다. 하지만 크리슬리라면 그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의욕이 대단했다. 크리슬리는 평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건 처음이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나.’
스킬북을 내어 주고, 마력을 추출할 아이템을 건네주면 실패했을 경우 출혈이 크다. 하지만 전생을 겪고 완성된 지금의 나라면 조금은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휘하 마수가 자진하여 나선 지금…… 위에 선 자로서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실패를 예상하고 무조건 거부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2년 차. 나는 제대로 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여유가 생겼다. 이런 기회쯤이야 몇 번이고 줄 수 있었다.
“좋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도록.”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레어 등급의 마력 추출 스킬, 그리고 고농도의 마력이 깃든 아이템. 두 가지 모두 내 선에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때마침 마계 옥션에서 구매해 온 물건 하나가 고농도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숨길 것도 없이 대지룡의 사체다. 숲 전체의 생명을 잡아먹고 태어나는 마수가 대지룡이었고, 수천 년간 뼈에 쌓인 마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이 대지룡의 사체를 언데드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본 드래곤’으로 만들 셈이었지만…… 계획이란 언제든지 변하는 법.
확실한 결과를 위해 기꺼이 대지룡의 사체를 사용키로 마음먹었다. 물론 대지룡의 사체를 사용하기 전에 충분히 연습을 해야 함은 기본이다.
“크리슬리, 너를 마스터 가디언으로 임명하마.”
스킬북과 대지룡의 사체를 건네기 직전.
나는 크리슬리에게 말했다.
마스터 가디언으로 크리슬리를 택한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의식을 이행해 나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다는 점과, 장래성이 가장 밝다는 점이면 충분했다. 또한 모든 능력치 5가 오르면 앞으로의 일에 탄력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나 역시 106의 민첩이 가져다주는 위력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지능이 105라면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체력적으로도 도움이 될 터. 크리슬리가 마스터 가디언으로 선택되는 건 필연이었다.
“따르겠습니다.”
크리슬리의 장점은 또 있었다. 줄리엄과 다르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것. 내가 말하면 스스로 사고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래도 모르겠거든 내게 묻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흡족히 미소 지으며 즉시 내정 모드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절차를 이행하였다.
동시에 던전 코어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크리슬리를 감싸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치와 같았다.
이어 몇 개의 메시지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휘하 마수 ‘크리슬리’가 마스터 가디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마스터 가디언은 일반 마수와는 격이 다른 존재입니다. 최후의 창이자 방패.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며 모든 걸 수호할 것입니다.]
[‘크리슬리’의 모든 능력치가 5씩 상승합니다.]
[경고! 진마룡 아오진과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의 피가 반응합니다. ‘크리슬리’가 피의 각성을 시작했습니다!]